템빨 82권 - 21화
우주 검.
세계를 가르는 검성의 비기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지진이 나거나 바다가 갈라진다 싶으면 십중팔구 크라우젤이 궁극기를 쓴 거였으니까.
하지만 ‘바로 곁’에서 우주 검의 전개 과정을 목격한 사람은 몹시 드물었다.
그중 하나가 그리드다.
그리드는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
크라우젤과 비반에 이어서 뮐러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검성의 궁극기를 코앞에서 목격한 사람은 세상에 자신이 유일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츠카카카카칵!
그리드의 시야가 사선으로 기울었다.
뮐러의 검에 잘려나간 무후총의 지반이 뒤집어진 여파다.
콰르르르릉!!
요란한 굉음이 연쇄되며 지층이 붕괴됐다. 무너진 천장에서 떨어지는 암석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며 넓은 공동의 벽면들이 쩍쩍 갈라져댔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음에도.
망령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가면 너머 그녀의 시선은 오직 붉은 살덩이에 꽂혀있었다.
베리아체의 심장을 재료로 만든 살덩이에는 ‘죽어선 안 되는 자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망령이 긴 세월 동안 고심하고 고심해서 걸러낸 존재들의 영혼 말이다.
그중 일부가 빠져나간 게 느껴졌다.
지옥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대들이... 바알을. 실시간으로 더욱 더. 고강하게. 만들고 말았음을... 자각해야 한다. 지옥의 왜곡에 힘을 보태고. 결과적으로 지상에 해악을 끼친. 대죄... 죄책감에 시달려야 옳다.”
원망어린 음성에 한기가 실렸다. 새카만 신성이 서리처럼 얼어붙어가며 무량대수의 파편을 이뤘다. 하나하나가 그리드의 신검마냥 날카로운 예기를 흘렸다.
콰아아앙!!
벌어진 천장의 틈새로 비집고 내려온 운석이 그녀를 덮쳤다.
신들의 무덤의 원거리 포격은 계속되고 있던 것이다.
[지옥으로 거듭나길 소망하는 깊은 지하에 신벌이 내렸다.]
[신께서 새로이 얻으신 절세의 보검이 베었고, 신들의 무덤이 떨어뜨린 별들이 베인 상처를 헤집었다.]
지옥으로 거듭나길 소망하는 지하.
서사시가 그간 베일에 싸여있던 무후총의 진실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갔다.
그리드가 이곳을 징벌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신들의 무덤이 큰 활약을 하고 있음을 각인시켰다.
신들의 무덤이 ‘움직이는 템빨계’로 완성 될 명분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콰자장!
망령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운석이 폭발하며 사방팔방으로 나부꼈다. 갈라진 세계가 빠르게 수복되고 있었다.
대지의 신 가리온조차 ‘지상’의 땅을 즉시 회복시키는 마당이다.
무후총의 주인이 무후총의 상처를 즉시 회복시키지 못할 리 만무했다.
붉은 살덩이 또한 마찬가지다.
무후총과 함께 반으로 갈라졌던 살덩이가 빠르게 하나로 회복되어 버렸다.
분명히 손실은 있었다.
몇 개의 영혼을 잃은 살덩이의 가치가 다소 하락했다.
지옥을 고스란히 재현하기에는 아슬아슬하게 부족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니... 아직까진 괜찮다.’
망령은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결론은 하나다.
그리드와 뮐러를 이곳에서 추방하는 것.
확고한 신념을 지닌 그녀의 입장에서 그리드와 뮐러는 해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일단 죽이는 건 당연히 안 된다.
바알을 돕는 꼴이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인신들처럼 지옥을 재현하는 재료로 쓰거나 자신의 양분으로 삼기엔 너무나도 고귀한 면이 있었다.
‘긴 세월을 살아갈수록 세상에 이로울 자들이다.’
인류의 입장에서 망령은 악당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방식’이 잘못 됐기 때문이다.
관점이 다를 뿐, 망령의 ‘성향’은 한없이 선에 가깝다.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낙원.
다름 아닌 지옥을 세운 야탄의 따스한 마음에 감화되어 사도가 된 존재이니만큼 당연했다.
“나는, 이곳에서...”
콰착!
급히 도약하는 뮐러의 허벅지를 망령의 몽둥이가 스쳤다.
검성의 왼쪽 다리가 골절 된 순간이다.
켜켜이 겹쳐놓았던 검기가 호신강기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런 위력을 무슨 수로 버텼지?’
그리드를 괴물 보듯이 쳐다본 뮐러가 이내 혀를 내둘렀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리.”
붉은 살덩이를 등지고 선 망령의 결의를 느낀 까닭이다.
절대자의 배수진.
도통 뚫을 틈이 없어보였다.
그리드도 잠시 압도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막아!”
템빨단의 최정예들이 대군의 합류를 막아내고 있단 점이었다.
망령을 섬기는 수십 기의 데스나이트와 리치들.
그리고 또 수천의 언데드와 토병들이 공동에 진입하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였다.
지슈카를 포함한 십공신과 포식이불족발, 지발, 휴렌트, 하스터, 그리고 성녀 루비와 교황 데미안, 끝으로 검성 크라우젤로 이어지는 인선이 엄청나게 강력해서다.
반트너의 민머리가 쏟아내는 무지막지한 빛을 중심으로 펼친 진영은 기본적으로 적의 시야를 훼방 놓는 천혜의 요새다.
거기에 포식이불족발이 소형 던전까지 세워버렸다.
적들을 분산시키고 고립시키는 미궁형 던전.
던전의 구조를 적극 활용하는 템빨단의 최정예를 돌파하는 일은 어지간한 초월자 집단에게도 힘든 일이다. 끝내 돌파하더라도 엄청난 시간을 소요하는 수밖에 없었다.
“몹시 놀라운 전력이군요. 세상이 평화로운 배경엔 필시 저들의 활약 또한 크게 작용했겠지요.”
모든 게 바뀐 세상.
수백 년 만에 속세로 돌아온 뮐러는 사람들의 활력을 보았다. 절망뿐인 미래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그들 모두가 영웅과도 같다고 느꼈다.
뮐러는 만들지 못했던 세상을 눈앞의 그리드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당연한 생리처럼 그리드를 향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만약 오늘 망령의 계획을 저지하고.
세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뮐러는 앞으로 세상을 떠도는 동안 마주하게 될 그리드의 신상 앞에 매번 깊이 고개를 숙이게 될 것만 같았다.
“맞소. 저들 덕분에 세상은 평화로울 수 있었소.”
그리드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과 늘 함께해준 소중한 이들을 떠올릴 때면 자연히 짓게 되는 미소였다.
미소 위로 덧씌워지는 결의는,
“내게는 저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고.”
배수진을 펼친 망령의 결의와 비교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망령의 열망이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서 축적 된 것이라면, 그리드의 열망은 수천 명의 인연과 엮여서 축적 된 것이다.
다를 뿐, 부족할 리 없다.
‘간다.’
그리드의 집중력이 순식간에 극한까지 도달했다.
대장간의 풍경을 떠올리자 가능했다.
수만 번도 더 반복해온 망치질을 심상에 세움으로써 아이템을 만들 때면 빠져들었던 무아지경을 유도한 것이다.
이는 절대자의 권능이 아니다.
그리드, 신영우라는 개인이 무의식중에 단련해온 능력이었다.
스칵! 콰콰콰쾅!
그리드와 망령이 얽혔다.
황혼이 퍼뜨리는 노을이 망령의 새카만 신성을 비집고 들어갈 때마다 망령이 무장하고 있는 해골 가면과 갑옷에 균열이 생겼다.
쩌정!!
봉쇄가 망령의 몽둥이와 맞물릴 때마다 봉쇄의 표면이 달아올랐다. 단련되는 금속처럼 붉게, 더 붉게.
콰르르르륵!!
망령의 몽둥이가 봉쇄의 방어를 돌파할 때면 그리드의 전신에서 비명 같은 소음이 번졌다. 드래곤 아머의 미늘이 흡착과 발산을 반복하며 몽둥이의 파괴력을 완화시켰지만 미늘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번개까진 어쩌질 못했다.
검은 번개.
칠흑의 신성이 품은 가장 기본적인 패시브 스킬이었다.
[세계를 멸망시켜온 신성의 미세한 잔재가 당신을 파괴합니다.]
세계를 멸망시켜온 신성.
시스템이 규정하는 ‘야탄의 신성’이다.
야탄이 벌써 몇 번이나 세상을 파괴해왔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라고 주지시키는 느낌이었다.
‘정황상 늘 사연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진실들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야탄을 악신으로 단정 짓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야탄이 세상을 파괴하고 레베카가 창조하길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왔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리드는 태초신들을 이해할 수도, 신용할 수도 없었다.
야탄의 사도인 망령 역시 신뢰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념과 별개로 존재 자체를 의심했다.
이긴다.
반드시 쓰러뜨린다.
주륵...
재차 각오하는 그리드의 입과 코, 눈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온갖 방어 수단이 무색하게 내부로 침투해온 망령의 신성이 그의 몸을 파괴하고 있었다. 단순히 생명력을 하락시키는 수준을 넘어서 피를 증발시키고 뼈를 가루로 만드는 식이다.
플레이어가 느끼는 통각에는 한도가 있지만 정신적으로 받는 충격이 엄청났다.
실제 느껴지는 통증보다 더 큰 통증이 그리드의 전신을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전투력도 약해져갔다.
[신화를 빼앗는 찬탈의 권능이 당신이 쌓아온 신화 일부를 흐릿하게 만듭니다.]
[일시적으로 격이 하락합니다.]
[일시적으로 격이 하락...]
...
..
그리드가 지닌 능력 중 상당수는 높은 격을 기반으로 한다.
격의 하락은 그가 보유한 각종 능력치와 패시브 스킬을 무효화시켰고 초월적인 권능들마저 훼손시켰다.
하지만 그리드의 집중력은 건재했다.
망령의 공격이 점차로 읽히지 않는 지경에 도달했을지언정 위축되지 않았다.
스팟!
첫 번째로 검성 뮐러를 믿었다.
망령의 신성에 먹히지 않기 위해 충분한 거리를 유지 중인 뮐러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망령과 얽힌 여파로 약화 된 그리드가 반응하지 못하는 공격들을 원거리에서 요격했다. 마법처럼 뻗어지는 검기를 다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뚝!
뮐러가 훼방을 놓는 와중에도 그리드의 급소를 노리던 망령의 행동이 멎었다.
뮐러가 심중에 품은 검이 그녀의 심장을 난도하는 여파였다.
격을 잃은 그리드에겐 쏜살같이 지나가는 찰나였다.
망령이 한 순간 드러낸 빈틈을 그리드는 파악하지 못했다.
신화 찬탈자.
그녀는, ‘신’에게 상극이다.
바알에게 복수하기 위해 쌓아온 힘이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절대자들을 겨냥하게 된 돌연변이였다.
싸우면 싸울수록 그리드가 불리한 건 당연하다고, 뮐러는 생각했다.
그리드가 놓친 기회를 굳이 아쉬워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였다.
심검을 떨쳐낸 망령이 재차 그리드를 공격한 순간.
쩌어어어어어엉!!
놀랍게도 그리드가 반응했다.
망령의 회심의 일격을 넝마가 된 상태로 정확하게 막아냈다.
그의 주변을 방금 막 돌아온 10개의 갓 핸드가 맴돌고 있었다.
절대자가 된 이후 쓸 필요가 없었던 <인공 감각>을 펼친 채다.
“...가공할 만한. 저력이다.”
워낙 무미건조한 까닭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망령은 그리드와 싸우는 내내 감탄했다.
신격을 약화시키는 자신과 정면에서 맞붙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신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약해진 근력은 증폭공과 살레오스의 힘 등으로, 느려진 속도는 종횡무진과 청룡의 부츠 등으로, 단단함을 잃은 방어력은 드래곤 아머와 백호의 각반 등으로, 멈춘 회복력은 도란의 반지 등으로 대체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드는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보다 훨씬 더 고강해지는 적을 상대로 아이템과 스킬을 적극 활용했다.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서 고갈되는 소재들을 돌려쓰면서 초조해하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한 채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지금.
기회가 도래했다.
[30회 단련 된 <봉쇄>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거기까지다.”
어차피 패시브 스킬이다.
스킬명을 외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굳이 외쳤다.
망령의 계획을 기필코 막아내겠다는 선언이기도 했기에.
[<거기까지다>의 효과로 대상의 스킬 하나를 봉쇄합니다. 패시브 스킬을 최우선 대상으로 삼습니다.]
“...!”
그리드의 신성을 파고들며 좀먹어 가던 망령의 신성이 점차 기세를 잃고 밀려난다.
신화를 찬탈하는 권능이 마비 된 여파였다.
[격을 회복합니다.]
그리드가 권리를 되찾았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거듭해온 끝에 정당히 얻은 자격이 6융합 검무와 무패왕의 검술, 그리고 낙월검의 연환으로 표출됐다.
쩌저저저저저정!!
[크리티컬!]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파스스...
산산이 조각나는 가면의 틈새로.
망령의 부릅떠진 두 눈이 그리드와 시선을 맞춘다.
예상치 못한 위기를 직면한 상황에서.
그녀는 도리어 희망을 엿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