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68화 (1,667/1,794)

템빨 82권 - 22화

쏴아아아...

지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색채가 무후총의 어둠을 밀어냈다.

황금보다 밝고 찬란하여 한없이 빛에 가까운 망령의 머리카락이 부서진 가면의 파편들과 함께 나부끼는 여파다.

최초의 인간.

망령은 ‘규격’이다.

태초의 신들이 인간 여성을 창조함에 있어서 그녀를 표본으로 삼았다.

그 사실이 망령에게 어떤 감흥을 주진 못했다.

망령 또한 레베카를 표본으로 삼아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망령은 인류를 위해서 싸웠다.

인간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단순한 이유다.

그녀는 위대한 신의 사도다.

그게 전부였다.

“나의 이념이. 그대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

지옥을 수복하기 위한 노력도.

홀로 짊어진 커다란 책임에 짓눌려 좌절하지 않고 버텨온 것도.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망령은 단순히 야탄 신의 뜻을 헤아리고 실행해왔을 뿐이다.

그리드와 달랐다.

그러므로 이해 받지 못한 것임을, 망령은 이 순간 눈치 챘다.

그리드가 쌓아온 신화를 엿보고 깨달았다.

그리드의 모든 신화에는 인연이 담겨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반드시 묻어났다.

“나에게는 결핍 된 것이... 그대에게는 전부였구나.”

망령이 보는 건 ‘미래’다.

현재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을 수복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드가 보는 건 ‘현재’다.

앞날을 위한답시고 지금을 희생하는 일 자체를 용납하지 못한다.

영리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가 아니다.

이 세계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그렇다.

망령의 거시적인 계획은 그녀가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다.

“...설득이. 가능할 리가 없군.”

그리드는 어리석지 않다.

힘들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현재를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진심으로.

“불가능에 대한 도전. 낭만...이라는 건가.”

망령은 수천 년을 존재해온 끝에 마모되고 말았다.

무후총의 퇴적 된 지층보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그녀의 마음은 여느 인간들의 것과 달리 부동했다.

아무리 강렬한 자극을 받아도 감화되는 법이 없었다.

한데 이 순간.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녀의 마음이 떨렸다.

열정과 낭만.

야탄 신께서 죽은 자들을 위한 낙원을 만들겠노라 선언하셨을 때의 모습이, 지금의 그리드와 닮지 않았을까.

그런 허황된 생각이 떠오른 까닭이다.

‘실력 또한 출중하다. 세상의 운명을 맡겨도 좋지 않을까.’

망령의 마음에 꽁꽁 묶여있던 무게추 하나가 벗겨질 듯 흔들렸다.

지상의 미래와 같은 중량의 무게추였다.

‘내가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저자가 대신 해결해주지 않을까.’

지옥의 미래와 같은 중량의 무게추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떨어지진 않는다.

야탄의 사도로서 짊어진 책임의 중량과 같은 무게추는 흔들리는 일조차 없었다.

‘...이 무슨 헛된 희망이란 말인가.’

지옥을 수복한다.

그 결과값으로 인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낸다.

망령의 단 하나뿐인 원동력은 긴 세월 동안 유지되어왔다.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진 않았다.

“유일신 그리드.”

망령이 무장한 해골 갑옷은 인신들의 뼈를 엮어 붙인 것이다. 그녀에게 사냥당하고 붉은 살덩이에 영혼이 갇힌 인신들의 신화가 담겨있었다.

신화가 소멸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 개념이란 말이다.

꾸드드득!

6융합 검무와 낙월검에 잘려나가고 무패왕의 검술에 조각났던 갑옷과 가면이 점차 빠르게 수복되어간다.

망령의 고결한 외모와 어울리는 밝은 머리카락과 얇은 순백의 의복이 재차 모습을 감추고 물러났던 어둠이 다시금 도래했다.

“...유감이다.”

망령이 잠시나마 그리드에게 희망을 엿보고 흔들렸던 이유는.

그리드의 허황된 바람이 자신의 뒤틀린 이념 따위 보단 훨씬 더 옳다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허황된 바람에 마냥 희망을 걸 순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

짊어진 의무를 끝내 던져버리지 못한 망령의 몽둥이가 종전보다 커다란 무게를 품었다.

파지직!

몽둥이 주변으로 점멸하는 벼락 사이로 벌떼 우는 소리가 섞였다.

앞서 신들의 무덤이 떨어뜨린 메테오를 가루로 만들었던.

서리처럼 번진 신성의 파편들이 진동하는 것이다.

하나하나가 그리드의 신검과도 같은 예기를 품은 주제에 한층 더 강력한 파괴력을 내포하게 됐다.

망령의 본질은 파괴에 있다.

모종의 이유로 세상을 파괴하길 되풀이했던 야탄 신의 사도가 바로 그녀이기에.

“...”

그리드는 문답무용으로 임했다.

망령의 슬픈 눈동자가 자꾸만 눈에 밟혀서다.

그녀의 입장을 차츰 헤아리게 되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정이라도 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선 안 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답이 없는 상대다.

최대한 마음을 비운 그리드가 살의를 품고 전력을 다했다.

꽈아아아아앙!!

격이 훼손되지 않은 그는 망령과 거의 호각을 이뤘다.

절대자의 영역에서 망령의 공격을 모조리 맞받아쳤다.

[91,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세계를 멸망시켜온 신성의 미세한 잔재가 당신을 파괴합니다.]

[두상 피격으로 <묵단룡 크란벨의 머리>의 <은신> 효과가 발동합니다.]

손속을 나눌 때마다 그리드는 큰 손해를 입었다.

망령의 몽둥이가 퍼뜨리는 검은 번개와 신성의 파편이 기본적으로 광역 공격 판정을 받기 때문이다.

봉쇄로 몽둥이를 막을지언정 큰 피해가 뒤따랐다.

하지만 위축 될 이유는 없었다.

피투성이가 되는 건 망령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신장 효과를 등에 업고 연속해서 휘두르는 6융합 검무의 기세는 절대자도 쉬이 감당하지 못했다.

황혼에 담긴 그리드의 신성은 착실하게 망령의 새카만 신성을 헤집고 나아가 급기야 그녀의 갑옷과 육신마저 갈라냈다.

다만 문제는.

‘회복력이 미쳤어.’

도무지 쓰러뜨릴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

절대자란, 자신의 영역에서 비로소 완전해지는 법이다.

망령의 회복력은 지상으로 원정 왔던 제라툴 일행의 기세를 가볍게 웃돌았다.

‘학습 능력도 상당하고.’

망령의 몽둥이와 봉쇄가 겹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갔다.

망령은 자신의 권능을 봉인한 원인이 봉쇄에 있단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공격 효과로 <묵단룡 크란벨의 머리>의 <드래곤 블레싱>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격 효과로 <묵단룡 크란벨의 머리>의 <드래곤 블레싱> 효과가 발동합니다.]

[<힘의 상징>을 얻습니다. 이번 공격에 ‘파쇄’ 효과가 발생합니다.]

[<권위의 상징>을 얻습니다. 적의 공격 기회를 1회 빼앗습니다.]

[<생명의 상징>을 얻습니다. 다음에 입는 피해를 흡수합니다.]

[<영원의 상징>을 얻습니다. 보유 중인 이로운 효과의 지속 시간이 증가합니다.]

크란벨의 머리를 재현한 투구.

투구에 달린 커다란 뿔 한 쌍이 적색으로, 녹색으로, 청색으로, 금색으로 점멸하며 그리드의 전투 지속력을 대폭 상승시켰다.

상징 하나하나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특히 권위의 상징이 현재 상황에서 가장 뛰어난 효력을 발휘했다.

망령의 움직임이 뮐러의 심검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멈칫거리는 것이다.

물론 뮐러의 심검보다 위력이 약했고, 대상이 대상인지라 지속 시간 단위가 0.001초까지 내려갔지만.

이곳엔 뮐러가 있다.

뮐러의 심검과 연계되면 유의미한 가치가 있었다.

“...”

문제는 뮐러의 체력에 있었다.

심검은 의념이다.

당연하게도 무지막지한 정신력을 소모했다.

뮐러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의 가빠진 호흡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검기를 쏘아 도움을 주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브라함 만이라도 불러야하나? 아니, 안 돼.’

그리드는 사도들을 부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의 목숨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물론 브라함은 예외였지만, 브라함을 부르기도 영 찝찝했다.

자칫 망령에게 브라함의 신화가 빼앗기라도 하면?

정녕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 것이다.

‘네펠리나가 어서 커야 되는데.’

시간은 늘 그리드를 초조하게 만든다.

다른 절대자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짧은 삶.

인연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다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만약 내가 저들과 마찬가지로 긴 세월을 살아왔다면.

모조리 압도할 수 있었을 텐데.

쩌어어어어엉!!

망령의 행동이 멈췄다.

여태까지와 비교가 안 될 만큼 긴 시간 경직 됐다. 무려 초 단위였다.

그리드의 바람에 호응하듯 궁극의 무가 발생한 것이다.

6번째 찾아온 기회다.

궁극의 무의 발동 확률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자꾸만 희망을 심어줬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스턴에 걸린 망령에게, 그리드가 다시 한 번 궁극기를 연환시켜 타격을 입혔다.

망령의 생명력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리드!”

“오빠!”

한데 어째서일까.

적들의 진격을 막는 한편 주작궁과 힐로 그리드의 회복을 돕던 지슈카와 루비가 새 된 비명을 지른다.

“...허?”

그리드가 한 발 늦게 자각했다.

자신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됐다는 사실을.

반대로 뒤집힌 시야로 휘청거리는 제 다리를 목격한다는 건 실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비장의 수를 숨겨두고 있었군.”

뮐러의 침음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그리드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송아지처럼 큰 눈이 어째선지 빛을 잃어갔다.

어떤 끈적거리는 감촉을 느낀 그리드가 손을 들어서 제 뺨을 닦았다.

대량의 핏물이 묻어났다.

뮐러의 벌어진 가슴에서 흘러내린 핏물이다.

조금 전.

망령이 그리드의 검에 베이는 순간 그리드를 베었던 새카만 신성이 뮐러의 가슴마저 베어버린 것이다.

사실상 뮐러가 뛰어들었다고 봐야 옳다.

그리드가 산산조각나지 않도록.

“보시다시피,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불사.

5초의 유예를 얻은 전설이 그리드를 등지고 서며 말한다.

“이 뒤는 제가 책임질 터이니, 벗들과 함께 떠나시길.”

뮐러는 부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리드가 후배와 템빨단원을 본인과 동등하게 존중한단 사실을 진즉부터 알아봤던 것이다.

스륵.

조용히 기수식을 취하는 뮐러의 손에는 드래곤 웨폰이 아닌 낡은 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최후를 직감한 까닭이다.

잠시 빌린 물건을 저승길까지 가져갈 순 없으니 내려놓았다.

“죽일 생각은... 없다. 떠나라. 그걸로 우리의 인연은 끝이다.”

망령이 말했다.

숫제 설득하는 느낌.

그리드와 뮐러를 정녕 보내줄 기세였다.

뮐러가 거부했다.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기회를... 어찌 놓치겠나.”

천하의 검성이 호흡을 유지하지 못하고 간신히 말한다.

점차 흐릿하게 꺼져가는 그의 눈동자에 망령의 모습이 투영됐다.

넝마가 된 망령.

그리드나 뮐러와 비견 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상태 또한 온전치 못했다.

파괴 된 갑옷 일부를 수복시키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그리드에게 입은 피해가 그만큼 엄청났다.

파편으로 나눴던 신성을 거대한 낫으로 바꿔 그리드를 벤 비장의 한 수가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고.

“신께서 말씀하셨지. 네 뜻은 거기까지라고. 내가, 행하지.”

[영웅의 기상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절세의 보검이 있다.]

[검성 ‘뮐러’로 회자되는 그는, 신의 뜻을 행사하는 검으로 최후를 맞이하길 각오했다.]

그리드가 얻은 절대 보검.

서사기가 그 보검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순간이었다.

[인류에게 큰 존경을 받아온 검성 ‘뮐러’가 24번째 서사시의 가치를 대폭 상승시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금의 성역 속에서.

그리드의 갑옷 위로 겹쳐져있던 투명한 발할라.

칸의 유작이자 그리드의 심상인 그것이 실물처럼 뚜렷한 형태를 갖추어갔다.

“희생은.”

쿠웅.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탐욕이 수복시킨 그리드의 하반신이 발생시키는 소음이었다.

결손 된 신체를 탐욕으로 즉시 수복하는 것.

그리드의 권능이다.

“내 몫이오.”

그리드는, 무력으로 휘둘러야 할 사도들의 안위마저 걱정해 혼자서 싸우길 반복해왔다.

기껏 얻은 인연을 희생시킬 리 만무했다.

[당신의 존재감이 강해진 여파로 당신의 심상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존재감 또한 강해집니다.]

[당신 이후 가장 위대했던 대장장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당신을 느낍니다.]

-그리...드?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시울을 붉힌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따앙...

희미한 망치질 소리가 넓은 공동에 메아리쳤다.

[아스가르드의 이름 모를 천사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착용 중인 모든 아이템의 내구력이 회복됩니다.]

[착용 중인 모든 아이템의 강화 수치가 일시적으로 +1 상승합니다.]

“위룡극파살연.”

그리드가 나아갔다.

놀랍도록 강력해진 기세로 지친 망령을 압박했다.

망령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굳이 봉쇄로 맞서지 않고 황혼으로 쳐내거나 맞아주며 망령을 베는 일에 집중했다.

전투의 파장이 몹시 대단해서 공동의 수복보다 파괴가 더 빠를 지경이었다.

끝내.

“...그대가. 부디 옳기를.”

망령이 무릎 꿇었다.

의외로 별 미련 없어 보이는 표정이 그리드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어긋난 이념으로 수많은 신화를 찬탈하고 제2의 지옥을 세우려 했던 무후총의 망령을 쓰러뜨렸습니다.]

힘든 싸움이 끝났다.

인류의 잠재 된 위험이 사라졌...

[무후총의 망령에게 덕공(德公)의 자비를 베풉니다.]

“...”

“...”

(82권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