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4화
“...”
검성 뮐러는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그리드와 망령의 전투를 복기하는 한편 그리드의 의도를 헤아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째서 굳이 망령을 살려주신 걸까.’
망령은 감정을 잃었다.
태초신의 사도로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다.
인간과 다른 관점을 지니는 게 당연했고, 의도치 않게 재차 인류를 위협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망령은 그리드 님과 비교해서 크게 나약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망령이 그리드보다 더 강했다.
물론 무후총이 망령의 영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리드는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나.
망령이 자칫 날뛰기 시작했을 때 그리드가 그녀를 확실하게 통제할 거라고 장담하기 힘든 것이다.
‘망령이 가여운 건 사실이나... 깔끔하게 없애는 편이 나았을 것을.’
두 눈을 감고 선 역대 최강의 검성.
진중한 표정으로 골몰하는 그의 주변을 템빨단원들이 맴돌고 있었다.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인 채 온갖 포즈를 취해댔다.
뮐러와 자신의 모습을 함께 스크린 샷에 담는 것이다.
숫제 슈퍼스타 취급이었다.
“...”
뮐러의 굵은 눈썹이 씰룩거렸다.
‘순수한 상태’의 그는 비록 절대자가 아니지만 극성에 이른 초감각을 바탕으로 절대자급의 기감을 지녔다.
소리만 안 낼 뿐 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을 당연하게 읽었다.
‘하나하나가 필시 이름 난 영웅들일진데...’
뮐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드를 제외하고 봐도 템빨단의 면면은 대단하다.
전설과 초월자가 있을 뿐더러 한 분야의 달인들이 즐비했다.
당연히 체면을 중시해야 할 자들이었다.
한데 하는 짓들이 순진무구한 시골동네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물며 그리드 님의 측근으로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채 싸우는 자들이 어찌 이리도 해맑단 말인가?’
의아해하던 뮐러가 문득 깨달았다.
‘설마 이게 그리드 님의 진정한 능력인가?’
참혹한 현실과 별개로 주변인들을 안심시키고 평안한 ‘일상’을 선사하는 힘.
어쩌면 그리드 님께선 망령 또한 이들처럼 만들 수 있다고 믿으신 게 아닐까?
하여 본래라면 망령의 목덜미를 베었어야 할 그 쾌속한 검을 도중에 거두셨던 게 아닐까.
‘정녕 대영웅이시다...’
뮐러는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성량한 사람들을 지키는 절세의 보검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도 몇 없을 ‘영웅왕’으로 불리었던.
뮐러의 입장에선 부끄러운 칭호였다.
자신은 단순히 한 명의 검사일 뿐, 사람들을 이끄는 구심점은 될 수 없었으니까.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뮐러의 뜻이 민생을 살피는 것에 있는 이상 일부 고귀한 신분의 인간들은 그를 멀리하려는 습성을 보였다.
애초에 지상엔 수십 개의 국가와 셀 수 없이 많은 세력이 존재했다.
출신, 신분, 소속, 사상, 정치 등등.
온갖 이유와 핑계로 뮐러를 멀리하는 자들이 많았고 심지어 훼방 놓는 자들도 더러 존재했다.
지상을 구원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가 됐어야 했던 ‘대통합’을 이룬다는 건 단순히 적을 잘 베는 검사의 역량으론 불가능했던 것이다.
한데 그리드는 이룬 상태였다.
무후총까지 오는 길에 대륙 곳곳에 우뚝 섰던 신상이 증명한다.
‘신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드가 본래 인간이었단 사실을 뮐러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말과 뜻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이룬 대통합은 신이라서 가능했던 게 아니란 말이다.
아마도 ‘그리드’라서 가능했던 일일 테지.
‘존경할 만한 위인...이라...’
뮐러의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을 위인으로 숭배하며 신뢰하고, 응원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그는 단 한 명도 잊지 못한다.
차원의 틈새에 숨어 지내온 세월 동안.
매일 같이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렸으니까.
감히 원망하진 못했다.
다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대들의 시대를 책임졌던 영웅이 한낱 필부가 아닌 그리드 님이셨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요...’
템빨단원들의 행태에 굳어있던 뮐러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크라우젤을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애써 견뎌온 심마가 그를 다시 괴롭히는 것이다.
자신과 달리 진짜 위인인 그리드를 흠모하게 된 여파다.
과거 자신을 흠모했던 양민들의 모습과 그리드를 흠모하는 자신을 겹쳐보며 마음에 더 큰 병을 얻었다. 주화입마 직전까지 갔다.
“너 때문에 그러잖아 정신 나간 놈아.”
“지들도 같이 찍어 놓곤?”
뮐러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진 것을 본 템빨단이 수군거렸다.
특히 폰은 반트너를 지적했다.
명상 중인 뮐러 곁에서 은근히 스샷을 찍는 짓.
반트너가 가장 먼저 시작했으니까.
장내가 소란스러워지는 와중이었다.
“뮐러 공.”
지발이 뮐러에게 말을 걸었다.
반란을 꿈꾸던 황자를 섬겨본 경험이 있는 그는 주화입마의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황실의 암투에 시달리던 고위 NPC들이 종종 피를 토하며 죽거나 폐인이 되는 광경을 목격한 바 있다.
“어떤 심정으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으나, 부디 마음을 잘 다스리십시오.”
지발 또한 누군가의 영웅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그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는 했다.
하여 영웅의 상징과도 같은 뮐러에게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다른 템빨단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황이 심상찮단 사실을 깨달은 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떻게든 뮐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진귀한 영약을 꺼내는 등 노력했다.
소란이 점차로 커질 때였다.
두근!
붉은 살덩이.
그리드가 망령을 거둔 시점부터 멈췄던 그것이 갑자기 크게 박동했다.
“...!”
“...?”
템빨단원들은 물론이고 언데드들의 시선까지 모조리 살덩이에 꽂혔다.
무후총의 정보를 상세히 검토 중이던 지슈카가 가장 큰 지팡이에게 물었다.
“뭐야? 저거 작동을 멈췄던 거 아니었어?”
““맞습니다. 망령께서 지고하신 분께 저것을 폐기하겠노라 맹세하신 시점부터 작동을 멈췄습니다만...””
의아하긴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답하던 가장 큰 지팡이가 슬그머니 지슈카의 앞으로 섰다.
마치 그녀를 호위하듯이.
지고하신 분의 예비 신부분께 이참에 큰 점수를 따두려는 것이었다.
상황이 심상찮기도 했다.
““뭔가가... 옵니다.””
지팡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부우우우욱!!
가죽이 터지고 뼈가 갈라지는 소음이 울렸다.
동시에 거대한 붉은 살덩이가 반으로 갈라지면서 무언가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어미의 배를 찢고 나온 짐승처럼.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출현하였습니다!]
인류의 진정한 대적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기괴한 괴물로, 누군가에게는 잘생긴 신사로,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짐승으로.
저마다에게 다른 모습을 선사하면서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놈의 시선이 템빨단원들 사이에 있는 뮐러에게 꽂혔다.
“과연 사실이었군? 그리드의 서사시라는 것 말이다. 엄청난 무기인 동시에 약점인 거 아닌가? 너무 많은 정보를 떠벌리는데 말이지.”
“바알...!”
순식간에 무기를 거머쥐고 대열을 맞춘 템빨단원들이 뮐러를 호위하듯 섰다.
그들의 중심엔 어느새 지슈카가 있었다.
파마의 화살을 장전한 그녀가 바알의 미간을 조준하며 이죽거렸다.
“뭐야, 너? ‘그거’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어?”
“궁성 지슈카. 당연한 질문을 하는구나.”
망령이 만든 붉은 살덩이는 지옥에 있는 붉은 살덩이를 재현한 것이다.
또 다른 지옥을 만들 재료가 되어줄 거라고 망령은 주장했었다.
그래서다.
바알의 감각은 망령이 만든 붉은 살덩이에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망령이 간과한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즉부터 바알의 손바닥 위였다.
“내가 둘이 된다? 나조차도 상상하기 힘든 혼돈이 도래하겠단 생각에 기대하며 이브의 발악을 응원했었지. 조금 솔직히 말하면 껄끄러운 상대라 방관한 것도 있고.”
““네놈, 감히 망령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느냐.””
가장 큰 지팡이가 격노했다.
오랜 세월 망령에게 훈육되어온 무후총의 언데드들은 당연히 바알을 증오했다. 언젠가 반드시 멸해야 할 궁극의 적으로 인식했다.
바알이 큭큭 웃었다.
“감회가 깊군. 오래 전에 내가 버린 장난감이 나를 물 기세로 이를 드러내는 모습은.”
““무슨 헛소리냐?””
“설마 몰라서 묻나? 올버른, 네놈이 생전에 겪은 모든 고통과 슬픔은 내가 선사했던 것인데 말이지.”
망령이 거둬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들고 훈육한 무후총의 언데드들.
그들은 모두 과거에 영웅이면서 죄인이었다.
자신들의 세상을 구원하고 멸망시킨, 무지막지한 경력을 지녔다.
바로 그 배후에 바알이 있었다.
바알의 오랜 유희 중 하나가 재능 있는 인간들을 괴롭히는 거였으니까.
“네가 결과적으로 너의 세상을 구원하고, 또한 멸망시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나의 의도였음을 알아라.”
““...네놈!!””
듣다 못한 큰 지팡이, 올버른이 마법을 캐스팅했다.
천하의 제1위 대악마를 보고 주눅이 들기는커녕 당장 때려죽일 준비부터 하는 거다.
무후총 원정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강력해진 템빨단의 전력을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바알도 인정했다.
“신을 벤 당대의 검성, 그리고 궁성과 베리아체의 기사...”
바알이 템빨단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지목했다.
차례대로 크라우젤과 지슈카, 카츠와 지발, 크리스와 페이커, 반트너와 휴렌트, 하스터 등등.
최강의 실력자들을 일일이 파악하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오직 그리드만 경계했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태도인 것이다.
끝으로 영 떨떠름한 얼굴로 후로이까지 지목한 바알이 솔직하게 말했다.
“여기서 너희를 일일이 상대해봤자 나만 손해일 테지.”
그리드에게 들키기 전에 움직일 수 있는 시간엔 제약이 있으니...
그렇게 중얼거린 바알이 살덩이의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나와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비켜라. 뮐러만 데려가마.”
검성 뮐러는 인류의 염원 그 자체였다.
과거 시대의 그리드인 셈이다.
악마들에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 그는 바알에게 여러모로 가치 높은 존재였다. 반드시 손에 넣고 싶다고 오래 전부터 열망해왔다.
콰드드득!!
바알이 처음부터 전력을 해방했다.
붉은 살덩이 덕분에 어느 정도 지옥의 습성을 가진 무후총에서 잠시나마 제1위 대악마의 위용을 보였다.
템빨단과 무후총의 언데드들을 돌파하고 뮐러에게 도달하기까지 순식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무수히 많은 상처는 개의치 않았다.
설령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바알에게 있어서 상처는 크게 문제 되는 요소가 아니었다.
“뮐러, 내가 드디어 너를 손에 넣는구나.”
끈적하게 속삭이는 바알의 불길한 음성이 뮐러의 의식을 깨웠다.
쿨럭.
주화입마로 인해 얻은 내상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낸 그가 자신의 코앞에 서있는 거악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휘둘렀다곤 믿기지 않게도 놀라운 위력의 참격이었다.
어깨부터 허리에 이르기까지.
상체가 사선으로 갈라진 바알이 박장대소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내가 네놈을 갖고 싶었던 이유.”
“...”
뮐러의 팔이 축 늘어졌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휘두른 우주 검이 그의 마지막 저력이었다.
파마의 화살을 피하는 한편 크라우젤의 검을 마검으로 막아낸 바알이 뮐러의 목을 거머쥐었다.
포식이불족발이 급조한 미궁이 그를 현혹하려 들었지만 힘으로 파괴했다.
뮐러는 생각했다.
역시, 위험하다고.
템빨단의 면면이 대단할지언정 망령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했다.
망령이 배신했을 때 그리드 님께서 감당하기 힘들 터였다.
‘아무래도 전 당신의 곁에 남을 수 없을 터이니... 역시... 죽이셨어야...’
뮐러가 안타까워하는 순간이었다.
꽈르르르르릉!!
천장이 무너졌다.
몹시 강맹한 기운을 품은 기척이 뮐러의 등 뒤로 떨어졌다.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일곱이었다.
그중 일부가 자신과 필적하는 강자임을 눈치 챈 뮐러는 어찌나 놀랐는지 희미해지던 의식을 다시 붙잡고 말았다.
“이쯤 되면 우리도 나서도 되지 않나?”
마법과 지혜의 신이 영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신께서도 칭찬해주실 게요.”
이전 세계의 최강자가 동조했다.
“바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네놈이...”
의외로 아름다운 고릴라가 사람의 말을 했다.
“그리드의 사도들입니다.”
바알이 당황하는 틈에 페이커와 함께 뮐러를 구출한 크라우젤이 속삭였다.
“...허.”
뮐러의 근심걱정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