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6화
양반은, 의지의 상징이다.
레베카의 권위에 재차 도전하겠다는 한울의 의지.
또한 약조의 상징이기도 했다.
무신 치우를 죽이겠노라는 약조.
한울이 치우에게 도움을 요청할 당시 맺었던 약조다.
양반들이 종종 신살의 자격을 개화하는 배경이 되어주는 비화였다.
신을 죽일 자격을 ‘재능’으로 갖고 태어나는 양반이 더러 있었다.
바알도 그 사실을 안다.
“양반 미르... 옳다, 나는 너의 대척자다. 우리는 거대한 운명으로 묶인 셈이지.”
하여 바알은 웃었다.
양반을 역겨운 복제품 취급했던 리파엘과 달리 미르를 몹시 반겨주었다.
최근 드디어 소화되기 시작한 양반 가람의 영혼을 떠올린 까닭이다.
가람에겐 희미하게나마 신살의 자격이 있었다.
훗날 그리드와 다시 싸울 때 큰 힘이 되어줄 자격 말이다.
양반 중 최강이라는 미르의 영혼까지 섭취하면 신살의 자격이 몇 배는 강력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순간이었다.
은근한 미소가 번졌던 바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쩌저정!!
놀랍도록 쾌속한 미르의 검술이 그렇게 만들었다.
‘뭐지?’
미르가 바알과 리파엘의 대적자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과물은 제작자의 의도와 다른 가치를 지니게 마련이었다.
천사와 인간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고 강제로 신격을 부여한 반신.
양반은, 어디까지나 한울의 실험쥐에 불과했다.
오리지널리티가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결여 된 가짜란 말이다.
야탄의 자식인 바알과 감히 대적한다는 건 사실 어불성설이었다.
한데 이 순간.
미르는 다른 사도들보다 한 차원 높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검술의 속도와 파괴력, 더불어지는 기술이 바알을 점차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꽈아아앙!!
급기야 바알이 뒤로 크게 물러섰다.
미르의 검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미르가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뇌신화하여 바알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공세를 퍼부었다.
그가 사용하는 검술의 근간은 검성 뮐러의 무쌍검이었다.
뮐러와 같진 않았다.
당대의 검성 크라우젤처럼 무쌍검을 재해석한 새로운 검술을 선보였다.
먼 옛날.
뮐러와 수차례 겨룬 경험을 토대로 궁리한 검술이다.
오늘.
잃었던 기억을 모조리 되찾은 미르는 자신의 몸에 남은 검흔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도무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던 뮐러의 검술을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토대로 떠올리며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했다.
“크아아아아!!”
연신 밀려나던 바알이 포효했다.
등장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도 자신의 뜻대로 풀리는 일이 없자 울화가 치솟은 것이다.
세상 만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입맛대로 주물러온 내가 이런 수모를 겪다니?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역시 그리드다.
그리드 그놈이 모든 걸 망쳐놓았다.
“처음부터 쉽게 가는 게 좋았을 것을...!”
꾸드드드득!!
바알의 오른 팔이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올랐다.
검력을 끌어올리는 여파로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하는 것이다.
“오십만대군.”
“...!”
“...!”
“피해!!”
백만대적검이 아닌 오십만대적검.
현재 바알의 상태가 온전치 않음을 증명하는 기술의 전조였다.
애초에 붉은 살덩이는 이곳을 ‘지옥과 닮은’ 환경으로 만들어줬을 뿐, 완전한 지옥으로 가꾸진 못했었다.
더군다나 피아로가 한 번 환경을 바꿔놓기까지 했다.
바알이 절대자의 위용을 드러낸 시간은 지극히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바알은 이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오십만대군 사멸검.
사도들은 몰라도 피라미들은 모조리 죽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몹시 거대한 후유증이 발생할 터라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지만 괜찮다.
하나의 목숨을 거는 대가로 다수의 힘을 취할 수 있다면.
결코 손해가 아니었으니까.
“사멸검.”
쿠콰콰콰콰콰콰콰콱!!
검기가 켜켜이 겹쳤다.
가로로, 세로로.
마치 쇠창살을 이루듯 모든 방위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그 안에 갇힌 존재들을 산산조각 낼 검기가 공동을 가득 채웠다.
“병신.”
비명이 빗발쳐야 할 상황에 누군가가 이죽거렸다.
바알의 시선이 자연히 후로이에게 향했지만, 후로이는 억울했다.
잠시 갈 길 잃은 바알의 시선이 뒤늦게 화려한 여성에게 닿았다.
거대한 주작을 등에 짊어진 채 불꽃보다 짙은 적발을 흩날리는 여성.
바알도 익히 아는 궁성 지슈카다.
중지를 치켜세운 그녀가 바알을 조롱했다.
“우린 죽어도 지옥에 안 떨어져.”
“...흥.”
그쯤이야 바알도 알고 있다.
플레이어의 개념은 몰라도, 당대의 인간들이 죽어도 부활한다는 사실쯤이야 인지하고 있었다.
“내 목적은 네놈들이 아니다.”
기고만장하게 웃는 바알의 수십 개 눈동자에 무후총의 리치와 데스나이트들이 투영된다.
바알이 아주 오래 전부터 심어두었던 씨앗들.
본래라면 진즉 바알의 양분이 됐어야할 자들이다.
망령에 의해 죽지 않고 언데드화 됐던 그들이 이제야 ‘죽음’이라는 길에 발을 들이게 됐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도무지 도망갈 틈을 엿볼 수 없는 쇠창살의 검기.
바알이 자신의 오른 팔을 대가로 치르고 전개한 오십만대군 사멸검이 일대를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
닿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소거하는 빛이었다.
단순히 위력 면에서 무패왕의 검술은 최강이다.
이미 한 번 그리드에게 파훼된 전력이 있지만, 그건 그리드의 심상에 깃든 ‘누군가의 의지’가 만든 변수였다.
보통의 존재는 이 위력을 견뎌낼 수 없다.
물론 그리드의 사도들쯤 되면 견딜 수도 있었지만.
제 한 몸 건사하는 게 고작일 터였다.
템빨단원들과 무후총의 언데드들,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져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검성 뮐러를 지킬 여유는 없는 것이다.
바알은 그나마 남은 변수에 집중했다.
일단 브라함.
바알에게 대량의 마법을 쏟아 부운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아직 경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검성 크라우젤.
놈의 검이 무패왕의 검술마저도 베어내면 낭패다.
뮐러의 검술을 구현하는 미르도 경계해야만 했고.
투쾅!
미르를 떨쳐내느라 상공까지 올라갔던 바알이 벼락처럼 하강했다.
잘려나간 팔에서 피 대신 뿜어지는 마기가 망토처럼 펄럭이며 그를 감쌌다.
“큭...!”
무패왕의 검술을 베기 위해 우주 검을 준비 중이던 크라우젤이 빈틈을 제대로 찔렸다. 초감각으로 바알의 접근을 읽음과 동시에 심장을 꿰뚫리고 불사를 소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킬 캐스팅까지 취소됐다.
꽈앙!!
바알을 따라붙은 미르가 크라우젤을 구출했다.
뇌기를 품은 청룡도로 바알의 남은 왼팔마저 잘라냈다.
다만 문제는, 바알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무패왕의 검술을 시전해서 이 공간 전체를 박살낼 계획을 세운 시점부터 그리드가 찾아오는 상황을 염두에 뒀다는 거니까.
놈의 목적은 단 하나.
최대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것.
놈의 머릿속은 무후총에 넘쳐나는 먹잇감을 모조리 뱃속에 채워 넣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제 목숨을 연명할 노력을 일체 하지 않았고, 그것이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부욱!
바알의 날카로운 이빨이 미르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팔이 잘려나가는 순간에 허리를 크게 굽혀 반격한 것이다.
예측하기 힘든 원시적인 형태의 공격이었다.
당황한 미르가 떨쳐내려고 노력했지만 바알이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놈의 양팔 전달 면에서는 마기가 끝없이 샘솟고 있었다. 망토의 수준을 넘어서 날개처럼 펼쳐져갔다.
암흑 속성을 제외한 속성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필드로 작동했다.
환경의 약화로 절대자의 자격을 잃고 초고속 재생의 권능마저 잃은 대신 마기의 운용에 집중하는 것이다. 차라리 힘으로 찍어누르려고 할 때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끝이다.”
여전히 미르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 바알이 음침하게 속삭였다.
그가 초월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사이에 지상으로 떨어진 검기의 철창이 템빨단원들과 언데드들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진짜로, 이제 다 됐다고 바알은 생각했다.
쿠와아아아앙앙!!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가 개입하기 전까진.
“...네놈?”
지하 깊은 곳에 있던 그리드가 벌써 이곳에 도착했다?
아니다.
타이탄의 뇌신이 타이밍 좋게 지원을 온 걸까?
그 또한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혜의 탑의 결사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바알을 훼방 놓은 존재는 다름 아닌...
“네놈...! 광룡의 딸!!”
그리드의 사도 중 하나인 네펠리나였다.
다른 사도들이 용맹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멀찍이 떨어져 숨죽인 채 있던 그녀가 놀랍게도 바알을 정면에서 마주보고 섰다.
커다랗게 벌린 입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입김이 조금 전 검기의 철창을 부순 브레스의 발원지를 알려주는 중이다.
“한낱, 헤츨링 따위가,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바알의 관자놀이가 씰룩였다.
인내심이 한계를 맞이한 듯이 두 눈은 붉게 충혈 됐고, 미르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뾰족한 이빨은 바득바득 갈려댔다.
“딸꾹!”
네펠리나의 커다란 두 눈이 투명한 눈물을 머금고 일렁였다.
초월룡.
그녀는 단 1분에 한해서 세월을 압축시키고 성룡에 근접하는 힘을 발휘한다.
하물며 고룡의 딸이다.
방금 그녀가 쏜 브레스가 무척 강력한 위력으로 무패왕의 검술을 상쇄시킨 근거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네펠리나는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바알의 살기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그녀의 곁으로.
“잘 하셨어요.”
“훌륭했네.”
“흥, 나쁘진 않군.”
사도들이 모여들었다.
하나 같이 상처투성이인 모습이다.
하지만 충분히 든든했다.
네펠리나의 덜덜 떨리던 작은 몸이 차츰 진정되어갔다.
“노, 노력했어. 그리드가 슬퍼하지 않도록.”
“기특하네.”
템빨단원들과 무후총의 언데드들도 함께였다.
네펠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가온 지슈카가 바알을 노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뒤져.”
협상의 여지는 없다.
여태껏 사도들과 템빨단이 바알에게 압도당한 이유는 단 하나.
바알이 ‘절대자의 영역’을 구사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피아로가 한 번 환경을 바꿔버린 뒤부턴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싸움'이 성립된단 말이다.
“...큭! 큭큭! 크하하하핫!! 미쳤구나!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태초신마저 기만하고 지옥을 장악한 자신이.
지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고?
“이건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뭔가가 크게 잘못 됐어. 나조차도 상상 못할 반동이 반드시 발생할 것이..”
호언장담하는 바알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지슈카의 화살에 미간이 꿰뚫리고 메르세데스의 검에 목이 잘려나간 까닭이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의 레이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드 없이.
사도들과 템빨단이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그리드가 일으킨 변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