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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82화 (1,681/1,794)

템빨 83권 - 14화

[...그래.]

염룡 트라우카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지면에 깊고 길게 새겨진 흉터는 그의 턱이 처박혔던 흔적이다.

여섯 보의 춤사위를 펼치며 도약한 뱀파이어가 만든 개벽의 상징이었다.

[인정하마.]

뚜둑! 꽈드드드득!!

강력한 참격에 얻어맞고 박살났던 트라우카의 정수리 비늘이 빠르게 재생하고 맞물렸다.

일말의 빈틈조차 남기지 않고 흡착하는 붉은 비늘의 행렬은 마치 성벽과 같았다.

지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끝없이 펼쳐진 성벽.

천상의 신들이 끝내 넘지 못하고 자신들의 피로 점차 붉게 덧칠했던 벽이다.

[세계가 변하였음을.]

낭군이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서 군림해온 용아...

트라우카는 마리로즈의 속삭임을 반추해보았다.

섣불리 부정하지 않고 진중하게 받아들였다.

확실히, 작금의 세계는 트라우카가 기억하는 세계와 달랐다.

채 1년이 안 되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 동안.

그는 벌써 두 번의 상처를 입었으니까.

첫 번째 상처는 아비의 입장을 전혀 헤아려주지 않는 불효자식에게 얻었고, 두 번째 상처는 미치광이 뱀파이어에게 얻었다.

둘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새로이 탄생한 유일신 그리드로부터 얻은 힘을 휘둘렀다는 점.

그래, 이 개벽은 놈이 일으켰다.

영겁의 세월 동안 완전하게 군림했던 자신에게 두 번의 상처를 입혀 세계가 바뀌었음을 증명했다.

[유일한 신의 영향력이라는 건 과연 좌시할 수준이 아니군. 치우를 처음 봤을 때가 어렴풋이 떠오를 지경으로 충격이 크다.]

드래곤이 신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레베카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트라우카는 레베카와 대적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하여 약속을 맺었고, 지켜왔다.

엄밀히 말해서 통제 당한 셈이다.

반면 치우는 달랐다.

어쩌면 유일하게 레베카가 통제하지 못한 대상이 치우였다.

반드시 죽을 줄 알았던 한울을 살려냈을 정도니.

트라우카는 인정해야만 했다.

유일신은 특별하며, 그리드 또한 유일신이다.

하지만.

‘특별함’의 총량은 각자 다른 법이다.

더군다나 트라우카 자신도 특별했다.

[하지만 말이다. 그리드의 영향력이 나를 사죄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데.]

드래곤은 망각하지 않는다.

트라우카는 베리아체의 능력을 똑똑히 기억했다.

흡혈한 대상의 힘을 최소에서 극한까지 1회 재현하는 것.

재차 재현하려면 또 다시 흡혈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심지어 극한까지 재현했다는 것은 무언가를 희생했다는 뜻이 됐다.

마리로즈가 베리아체보다 낫다고 가정해도.

현재 마리로즈는 반드시 ‘소비’되었으며 일부나마 ‘훼손’됐다.

낙룡.

용을 떨어뜨린다는 오만방자한 검술을 재차 사용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더 이상의 변수를 만들 여력이 없었다.

[베리아체의 원념아. 네게 세상은 무척 단순하게 보일 것이다. 어미의 복수를 이루어 완성시키느냐, 복수에 실패하여 완성시키지 못하느냐 따위로 나뉘는.]

트라우카의 거대한 눈동자는 우주를 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광채를 띄었고, 그 하나하나에 현생인류는 알 수 없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무수히 많은 경험과 감정이 녹아있었다.

[하지만 실지 세상은 네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여기서부턴 개인의 영역이 아니다. 너무나도 많은 것이 달려있다.]

화르륵!

염룡의 호흡이 짙어짐에 따라서 불길 또한 거세졌다.

상처 입은 고룡의 존재감이 몸집 이상으로 부풀어갔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임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마리로즈는 위축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누구와 대적하는지.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으니까.

차분한 표정과 별개로 그녀는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단지 그리드가 존중 받길 바랐다.

자신이 선택한 사내였으니까.

[...개새끼를 앉혀놓고 지껄여도 이것보단 덜 답답할 것 같군.]

트라우카가 눈치 챘다.

눈앞의 뱀파이어.

내 말을 죄다 한 귀로 흘리고 있다.

말간 눈동자가 증거다.

저 붉은 눈에 담긴 열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았다.

[미친 것이.]

콰아아아아앙!!

마리로즈의 시야가 아래로 훅 가라앉았다.

그녀가 섰던 지면이 벼락처럼 꽂힌 트라우카의 꼬리에 완전히 박살난 여파다.

무너진 지면의 파편들이 완전히 멈춰버린 절대자의 영역에서 공방이 펼쳐졌다.

파편을 넘나드는 마리로즈와 트라우카가 서로를 집요하게 위협했다.

태산 몇 개를 담아도 될 정도로 거대했던 트라우카의 레어가 순식간에 붕괴됐다.

꽈아아아앙!!

외부에서 관측했을 때, 트라우카의 레어는 얼핏 달을 닮았다.

지상에 가라앉은 달.

둥글기 때문이다.

트라우카가 산 몇 개를 깎아 만든 둥지는 인간의 수준으론 넘보지 못할 예술의 경지였다.

그 하단부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꿰뚫린 구멍에서 요란하게 튀어나온 여인을 불줄기가 추격했다.

브레스.

트라우카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무기를 선보인 순간이었다.

[어서 지옥으로 꺼져라, 베리아체의 원념. 네놈은 평생을 그래왔듯 무가치한 삶 속에서 뒹구는 편이 낫다. 그게 너의 하찮은 존재 이유 아니냐?]

마리로즈에게 염룡은 최악의 상성이었다.

무엇이든 녹이는 의념의 불꽃을 둘둘 두른 트라우카는 마리로즈의 핏물이 어떤 시도를 해보기도 전에 증발시키길 반복했다.

혈마법과 권능을 실시간으로 봉인해갔다.

하지만 여전히 마리로즈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괴력난신.

그녀는 고룡을 상대로 힘 싸움을 서슴지 않았다.

불길을 꿰뚫고 나아가 트라우카의 비늘을 손톱으로 긁었다. 비늘이 흉터를 회복하기 전에 손날을 꽂아 넣어 헤집었다. 제 몸을 통째로 짓뭉개기 위해 날아오는 꼬리를 붙잡아 집어던지고 용의 뱃가죽이 발아래 노출되도록 만들었다.

뻐어어어어어엉!!

풍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마리로즈의 희고 작은 두 발에 짓밟힌 트라우카의 뱃가죽에서 나는 소음이었다.

누가 보면 구멍이라도 뚫렸다고 착각할 것만 같았다.

그래, 착각.

모기가 인간을 찌른다고 해서 인간의 살가죽이 터질 리 없잖은가.

마리로즈와 트라우카의 체격 차이는 그렇게 비유해도 될 정도로 컸다.

분명히 그랬다.

‘...이놈, 설마?’

안 그래도 매서운 트라우카의 눈매가 높이 솟구쳤다.

그의 뱃가죽이 미세한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마리로즈에게 짓밟힌 고통이 의외로 컸다.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건가?’

조금 전.

마리로즈는 유일신 그리드의 피를 기반으로 그리드의 검술을 재현했다.

그것은 필시 그리드의 궁극이었다.

명색이 유일신의 궁극기를 제 힘마냥 휘둘렀단 말이다.

당연히 큰 대가를 치렀어야 옳다.

베리아체였다면 잠시간 힘이 절반은 약해졌을 것이다.

한데 마리로즈는 전혀 약해진 기색이 없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괴물을 만들었군.’

베리아체.

바알에게 복수하는 것을 넘어 지옥에 새로운 수호자라도 세우고 싶었나 보지?

‘가여운 것.’

콧방귀 뀐 트라우카가 속도를 높였다.

그 거대한 날개가 흐릿해질 지경으로 빠르게 움직여 궤도를 연신 비틀어댔다.

마리로즈의 공격이 빗나가는 횟수가 잦아졌다. 간혹 그녀의 손톱이 트라우카의 비늘을 스칠 때면 불똥이 튀기며 도리어 그녀의 손톱이 떨어져나갔다.

염룡의 몸이 가열되고 있었다.

대기권에 진입하며 마찰열로 연소되는 운석마냥 발광했다.

절대자의 속도와 의념의 불꽃이 결합되어 만든 물리현상이다.

치치치치치칙!!

마리로즈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증기가 번졌다. 흐르는 핏물이 즉시즉시 증발되는 여파다.

‘최대한 멀리 날려버린다.’

염룡의 긴 꼬리가 뱃가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염룡이 일정 속도 이상에 도달하는 순간 팽창하여 마리로즈를 대륙 반대편까지 날려 보낼 괴력을 발휘할 예정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앙!!

급기야 뱃가죽에서 떨어진 꼬리가 채찍처럼 뻗어졌다.

마리로즈의 작은 몸을 강타했다.

마리로즈는 버틸 수 없다.

힘의 흐름에 역행해서 버티는 순간 그대로 몸이 산산조각 날 테니까.

물론 그 정도로 죽진 않겠지.

하지만 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라 즉시 재생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위험을 자초하는 셈이 된다.

트라우카는 마리로즈가 순순히 자리에서 이탈할 것으로 보았다.

꼬리에 실린 힘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날아가 목숨을 보전할 거라고 예측했다.

당연하다.

마리로즈는 이프리트와 달랐다.

비록 미쳤을지언정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트라우카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한데...

[...]

마리로즈는 필요 이상의 집착을 보였다.

꼬리에 강타당하는 순간 날아가길 선택하지 않고 땅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지면에 양발을 바짝 붙였다. 굳이 두 팔을 들어 올려 트라우카의 꼬리를 막고, 버텼다.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양팔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양팔이 보호하지 못한 옆구리 일부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열기에 핏물이 증발한 탓에.

도축 된 가축마냥 깔끔하게 늘어진 몰골이다.

[설마 여기서 죽을 셈이냐? 왜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버티는 거지? 네겐 따로 짊어진 의무가 있을 터인데?]

트라우카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마리로즈가 극성까지 끌어올린 호신강기와 충돌한 여파로 그의 꼬리 역시 폭발한 상태였다. 영겁의 세월 동안 자랑해온 무기 하나가 처참하게 손상 됐다.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체력을 소모한 건 그 역시 같았기에.

애초에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마리로즈의 붉은 눈동자는 도리어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나태의 저주를 고통으로 잠시 떨쳐낸 것이다.

“트라우카 너는 자식의 심정을 아느냐.”

[...?]

생뚱맞은 질문.

트라우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곁에 곤히 잠든 네 기척을 느끼면서 안심했을 알 속 아이의 심정을 헤아려 본 적이 있느냐?”

[...뭐라는 거냐?]

주제가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트라우카는 눈앞 뱀파이어가 순수하게 미쳤다는 사실을 재차 실감했다.

여태껏 어떤 대화를 시도해도 전혀 대꾸를 않다가 갑자기 개소리를 지껄여댔으니 당연하다.

“헤아려보지 않았겠지.”

마리로즈는 떠올렸다.

태어난 날.

어머니의 손을 붙잡기 위해 뻗었던 손이 뿌리쳐졌던 순간을.

트라우카가 자신을 ‘베리아체의 원념’ 취급 할 때마다 어머니를 겹쳐 본 이유다.

마리로즈가 생각하기에.

제 자식을 포식해온 트라우카는 제 자식에게 복수를 짊어지게 만든 베리아체를 닮았다.

자식을 부모를 위한 도구쯤으로 취급하는 태도가.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지옥과 바알은 내 관심사가 아니란다.”

그러므로 눈치 없이 지옥과 바알을 논하며 의무 따위를 지껄였겠지.

마리로즈가 재차 본론을 말했다.

“낭군에게 사죄나 하렴.”

순간.

트라우카의 시선이 마리로즈가 아닌 그녀가 등진 하늘로 향했다.

깊은 밤에 어울리지 않는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제법 낯익은 기척이 다가온다.

유일신 그리드의 기척이었다.

[고작 저걸 믿는 건가?]

트라우카가 실소했다.

[나는 방금 너를 통해 그리드의 궁극을 체험했다. 순전히 네 덕분에 놈이 내게 큰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꽈드드드드득!!

마침 트라우카의 꼬리가 재생을 마쳤다.

마리로즈의 양팔 역시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직후였다.

다만 마리로즈의 옆구리는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신 증기를 일으키며, 마리로즈는 휘청거렸다.

[그리드가 합류한다고 해서 전황이 바뀔 리 없단 말이다.]

트라우카의 실소가 조소로 바뀌기까지.

순식간이었다.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노을을 마리로즈가 완전히 등지고 선 순간을 노리고.

크롸라라라라라!!

트라우카는 브레스를 쏘았다.

마리로즈와 그리드를 통째로 쫓아낼 의도였다.

“나는 낭군의 궁극을 재현한 적이 없는데.”

귓전에 스며드는 헛소리는 무시했다.

“정확히 말하면, 재현할 도리가 없단다.”

마리로즈의 6융합 검무는 필시 강력했다.

나태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스탯은 그리드의 스탯을 초월하기에.

하지만 과연 그녀의 검무가 그리드의 검무보다 강력했을까?

“흡혈은 대상의 잠재력을 넘보지 못할뿐더러 내게는 드래곤 웨폰이 없잖니.”

아니, 도리어 약했다.

마리로즈가 재현한 6융합 검무엔 <황혼>과 <궁극의 무>가 결여되어 있었으니까.

꽈아아아아아아앙!!

브레스가 제 몸을 녹이는 것을 무시하고 접근해온 그리드에게 베이면서.

‘이건...’

트라우카는 직감했다.

위험하다.

[나는, 베이지 않는다.]

자존심을 버리고 다급히 용언을 외친 이유다.

절대방어와 비늘이라는 호신강기 위로 새로운 섭리가 덧씌워졌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이었다.

까가가가가강!!

그리드의 손에 쥐어진 채 질주하는 황혼이 트라우카의 붉은 비늘을 베지 못하고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휘리릭!

황혼이 그리드의 손 안에서 회전했다. 역수로 쥐어졌다.

“위룡극파살연(爲龍極派殺聯).”

단순하다.

그리드는 벨 수 없기에 찔렀다.

트라우카의 거체를 관통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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