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18화
악룡 번헬리어는 전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었다.
국가대항전 서버에 난입해 당시 최강을 다투던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티끌 따위로 전락시킨 까닭이다.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절대방어를 갑옷마냥 대수롭지 않게 두른 채 무지막지한 능력치를 뽐낸 괴물.
Satisfy가 묘사하는 드래곤은 가히 무적이었다.
플레이어가 평생을 노력해도 도전하지 못할 절대자로 비추어졌다.
실제로도 그랬다.
지난 수년.
플레이어들이 Satisfy의 세계관을 깊이 파헤칠수록 드래곤은 몇 번이고 재평가 됐다.
모든 역사가 드래곤을 대적 불가한 존재라고 서술했으니까.
언젠가 S.A그룹이 드래곤에 대해서 말하길, ‘잡으라고 만든 존재가 아니다.’라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하야테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드래곤 슬레이어.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을 짓밟고 드래곤의 목을 벤 인물.
만인이 숭상하는 그가, 전신이 새카맣게 그을려진 채 죽어가고 있었다.
트라우카의 거대한 그림자에 서서히 삼켜지듯 숨소리를 잃어갔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서 무기를 뽑아 쥔 사람들 중에서.
승산을 엿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처음부터 희망이 없음을 이해하면서도 다만 그리드를 돕기 위해 반사적으로 무기를 쥐었을 뿐이다.
그들이 그리드에게 갚아야 할 빚은 너무 많았기에.
전멸.
템빨단을 포함한 플레이어 전원의 머릿속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못 박히는 그때였다.
염룡 트라우카.
일부 고서에서 ‘태초 이전 혼돈부터 존재해온 절대자’라고 서술하는 드래곤.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놈이 지상 가까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히익!”
사람들은 곧 뿜어질 불기둥에 재가 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하고 공포에 휩쓸려 허우적거렸다.
불기둥 대신 퍼지는 트라우카의 음성을 듣고도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죄하마. 유일신 그리드. 내가 너의 영토를 허락 없이 침범했던 것은 어떤 악의를 품어서가 아니었다. 앞서 밝혔던 바와 같이 나는 다만 선물을 받고자 했을 뿐이다.]
“...?”
겁에 질렸던 사람들이 점차 정신을 차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트라우카와 그리드를 번갈아 쳐다봤다.
산맥마냥 거대한 용 앞에 선 그리드는 의외로 작지 않았다.
몸에 두른 짙은 신성 탓인지 만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수년 전 번헬리어 앞에 섰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존재감이었다.
사람들은 새삼 실감했다.
자신들이 그간 그리드의 성장을 지켜봐왔다는 사실을.
막연한 감동이 밀려와 가슴이 뭉클해졌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나 때문인가...?”
누군가가 침묵을 깨뜨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사람들이 술렁였다.
브라함.
그리드와 더불어 제국 최강의 전력이라고 평가 받는 마법과 지혜의 신이 이해하기 힘든 혼잣말을 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와 관련 된 일화 하나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염룡 트라우카의 레어를 범하고도 유유히 살아남았다는 내용의, 대단히 유명하고 전설적인 일화였다.
“설마...?”
“과연 브라함이다!”
어떤 가설을 떠올린 사람들이 감탄했다.
표정들이 하나 같이 상쾌했다.
염룡 트라우카가 갑자기 싸움을 중지하고 그리드에게 사죄한 이유가 뭘까?
영 꺼림칙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라함 덕분이었다.
천하무적이라는 트라우카조차도 그리드와 브라함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벅차다고 판단한 거겠지.
아무렴.
무신 제라툴과 그를 섬기던 신들을 박살낸 듀오가 아닌가.
“...”
제멋대로 오해하고 편안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뭔가 영 찝찝한 기분을 느끼던 그리드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트라우카를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거북한 마음은 필시 트라우카를 향한 분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다.
트라우카는 이프리트를 죽였다.
화룡 이프리트.
그녀는 그리드의 인생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인연이었다.
비록 그리드는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했지만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협력해서 환국의 신들을 패퇴시킨 경험을 어찌 잊겠나.
그리드는 이프리트와 짧지만 확실하게 교감했다.
그녀의 뿔을 매개로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렸다.
급기야 용의 목덜미에 올라탔다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우고 드래곤 나이트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바알과 싸워서 이기고 종국에는 절대자가 됐다.
무척 감사한 존재인 것이다.
그녀를 살아생전 내내 괴롭히다가 급기야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트라우카에게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오늘.
트라우카는 제논마저 죽였다.
인간들을 해친 대가를 치르겠다며 주기적으로 찾아와 도움을 주었던 그를 그리드가 지켜보는 앞에서 잡아먹었다.
제멋대로 선물로 오해했을 뿐더러, 제논은 진즉부터 각오했을 일이라며 그리드에게 죄책감마저 떠안겼다.
“...”
그리드는 묻고 싶었다.
지금 대체 무엇을 사죄하는 거냐고.
이프리트와 자신의 인연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않고, 끝까지 제논을 선물이라 착각했다는 핑계 따위나 늘어놓는 주제에 그것이 정녕 사죄냐고.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현재 그리드는 몹시 냉정한 상태였다.
트라우카를 찾아온 시점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자칫 흥분했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트라우카는 그리드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실제로 처음 보는 만전의 마리로즈, 그리고 하야테를 비롯한 탑의 결사들과 협공을 펼치는 순간에도 승산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에게 품은 감정과 별개로 굳이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트라우카와 적대하는 순간 많은 게 뒤틀릴 것임을 알았다.
하여.
“...고맙습니다.”
그리드는 속내와 달리 정중히 답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트라우카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전투가 재개됐을 것이다.
적어도 지혜의 탑이라는 기관은 오늘을 기점으로 기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사들이 거의 전멸했을 테니까.
그리드에게 아직 여력이 있듯이 트라우카에게도 여력이 있었다.
“낭군.”
드래곤의 사죄를 받는 그리드의 위대한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재차 술렁였다.
그리드 곁으로 다가서는 절세의 미인에게 매료 된 까닭이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
단순히 외모만 놓고 보면 지구와 Satisfy를 통틀어서 최고의 미인이라고 평가 받는 여자다. 등장만 해도 파장이 컸다.
“정말로 마리로즈였어...”
사람들이 막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그리드는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트라우카의 심장을 파고들고 있었다.
짙은 신성과 폭우처럼 쏟아지는 핏물, 그리고 트라우카의 거체 탓에 누구인지 정확히 분간하기 힘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추측대로 정녕 마리로즈인 것이다.
그리드가 그녀를 새로운 측근이자 측실로 맞이했다는 소문이 사실일 확률이 대폭 상승한 셈이었다.
“흡족하지 못한 눈치로구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질투하고 원망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사람들이 한탄하는 그때 마리로즈는 그리드에게 속삭였다.
“속내를 솔직하게 밝히렴. 나도, 저 용도 낭군의 뜻을 우선할 거란다. 낭군에게는 자격이 있으니까.”
마리로즈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현재 위치가 완벽하게 노출 된 트라우카가 다른 상위룡이나 고룡에게 도전당할 사태를 염려하는 것을 뻔히 알았다.
이 싸움이 어서 끝나길 바라는 건 누구보다 트라우카였다.
그리드의 입장이 한없이 유리하단 말이다.
“사죄를 받았으니 충분합니다.”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짊어진 입장이다. 트라우카를 상대로 굳이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또 같은 사태가 없길 바랄 뿐입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훈훈하게 마무리되는구나.
템빨단원들이 안도하는 순간.
푸화하하학!!
트라우카가 제 팔 하나를 스스로 뽑아버렸다.
쿠우우웅!!
장정 수백 명이 협동해도 들지 못할 커다란 팔이 그리드 앞에 떨어졌다. 땅이 흔들린다.
[나의 말에는 지고한 가치가 있다.]
뽑은 팔을 즉시 재생시킨 트라우카가 어안이 벙벙해진 그리드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므로 거짓을 말할 순 없다. 이 팔은 회색룡 제논을 선물로 오해하고 네 땅을 침범한 잘못에 대한 대가다. 제논을 해친 일은 우리 종족의 오랜 생리에 따른 결과이며, 이프리트의 일은 너와 별개로 나와 그 아이 사이의 오랜 관계가 만든 결과이니 양해를 구할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
[유일신 그리드. 나는 네게 솔직함으로써 진정어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길 소망한다.]
드래곤은 언약을 이행하여 용언을 강화시킨다.
그들의 말은 무겁다.
거짓이나 빈말 따위를 일삼는 드래곤은 어쩌면 번헬리어가 유일했다.
우주가 담긴 트라우카의 두 눈을 잠자코 바라보던 그리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마음에 안 들지만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번엔 가식이 아니었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의 의미로 제 팔을 바친 것.
트라우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마침 회복한 하야테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를 탐탁찮은 표정으로 노려본 트라우카가 등을 돌렸다.
[용살자 하야테. 앞으로는 내 비늘로 만든 갑주를 무장하여 그 유리 같은 목숨을 단단히 보전하겠구나. 우리가 굳이 재회하지 않길 바라마.]
트라우카는 고룡이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세간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신경 쓰지 않는단 의미다.
하여 만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연신 솔직하게 말했다.
쿠와아아아앙!!
폭풍이 휘몰아쳤다.
거룡이 날개를 펼친 여파로 불어닥친 바람이 만든 폭풍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갔고 일부는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사람이 길을 걷다가 개미를 밟아 죽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개의치 않고 날아오르는 트라우카에게 브라함이 말했다.
“순순히 보내주마. 이걸로 과거의 빚은 갚았다.”
[...?]
날아오르길 멈춘 트라우카가 브라함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 황당하다는 반응. 귀를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리드가 다급히 말했다.
“무시하십시오.”
[...]
드디어.
염룡 트라우카가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밝아 오는 여명과 함께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일신 ‘그리드’가 25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떨어진 달의 잔해 위에서 비롯합니다.]
“마리로즈 네년...”
그리드가 겪은 전투는 몹시 짧았다.
현장에 도착하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상황이 종결됐다.
하지만 그리드는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찰나를 무수히 분절하여 질주한 여파다. 심력의 소모가 커서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마리로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브라함의 손목을 붙잡으면서.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뭣이...?”
브라함의 얼굴에 드문 경악이 번졌다.
어머니께 혈족의 자격을 박탈당했을 때 이상으로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무거워진 눈꺼풀 탓에 속눈썹을 더욱 짙게 드러낸 마리로즈를 부축하며 선언했다.
“마리로즈와 혼인할 겁니다.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건 저를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다.”
“...기어코! 기어코 네가 저 요망한 것의 미인계에 넘어가고 말았구나!!”
브라함이 분개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살기마저 피어 올렸다.
그리드에게 향하지 않고 갈 길을 헤매는 살기였다.
기껏 숨통이 트였던 플레이어들이 또 다시 상태이상에 시달렸다.
“단순히 미색을 원하는 거라면 내가 충족시켜주마! 성별을 바꾸는 마법을 오늘부터라도 당장 연구하겠다...”
높아졌던 브라함의 언성이 차츰 가라앉았다. 지혜의 신답게 이성을 금방 되찾는 것이다.
“정신 차려라, 그리드. 저것은 제 어미를 죽인 괴물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망각하고 의무를 외면해온 패륜아다. 금수보다 못한 놈이란 말이다. 결코 엮여선 안 될 저급한...”
“말씀을 삼가십시오.”
브라함의 말을 끊는 그리드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베리아체의 죽음은 마리로즈와 관계가 없잖습니까? 그녀는 단순히 낳아졌을 뿐, 베리아체의 죽음은 베리아체 스스로 선택한 일인데 언제까지 그녀를 원망할 겁니까? 그리고 의무? 부모의 뜻을 이루는 것이 자식의 의무라면, 자식은 오직 부모를 위해 태어난 존재란 겁니까? 자식의 삶은 없는 겁니까?”
그리드의 언성은 도리어 높아져갔다.
마리로즈의 슬픈 표정을 떠올린 탓이다.
그는 브라함이 편견을 버려주길 바랐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저주에서 벗어나주길 소망했다.
“익...! 이익...!”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어머니의 복수를 꿈꿨고, 마리로즈가 태어난 시점부턴 그녀를 원망해온 브라함은 적어도 가족의 일에선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최소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브라함 또한 자리를 떠났다. 즉시 발동하는 텔레포트를 타고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서사시는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태초 이전 혼돈부터 존재해온 위대한 고룡이 그리드에게 사죄하고 팔을 진상했다는 내용의 서사시였다.
당연히 마리로즈의 활약상도 묘사됐다.
그리드는 믿었다.
브라함이 이 서사시의 내용을 곱씹으며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