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6화
아이템에서 재료를 추출하는 것.
의념 제작에 이르러 대장장이 기술을 마스터한 그리드에겐 쉬운 일이다.
하지만 적기는 말 그대로 기운을 뜻했다.
물질이 아닌 까닭에 대장장이 기술로는 추출하기 힘들었다.
시도 자체는 가능하지만 성공 확률이 낮은 식이다.
‘사하란의 검을 분해하는 즉시 흩어져서 소멸할 우려가 있어.’
적기는 사하란의 ‘혈통’을 근원으로 삼는다.
덕분에 바사라도 보유하고 있었고, 그녀의 적기는 꽤나 훌륭한 편에 속한다고 들었지만, 시조 사하란의 적기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아주 만약에 잃을 경우 대체할 수단이 없다는 뜻.
지크가 사하란의 적기를 긴 세월 애용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벌어져선 안 될 사태였다.
‘적기와 지크의 궁합이 좋긴 해.’
물질을 통제하는 적기의 본질은 ‘개입’이다.
대상에 일단 개입하기에 통제할 수 있는 거니까.
특히 사하란의 적기는 세상 대부분의 물질에 개입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룬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크가 쓰는 룬어가 빠르게 형상화되는 건 적기의 힘을 빌린 가속력에 있는 셈이다.
“여기서 적기를 추출하란 말씀이시죠? 훌쩍. 네, 해볼게요...”
“한 번 해보겠다? 그 정도의 마음가짐으로는 부족하오.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약조하시오.”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 어찌 약조를...”
“왜 보장이 없지?”
“그야 이 적기는 본래 사하란의 것이니까요.”
사하란 본인이 아닌 이상에야 완벽하게 통제할 거라고 장담하기 힘든 것이다.
“그나마 소별왕의 신력이 있어서 가능성이라도 논할 수 있는 거예요...”
소별왕의 신성은 그것이 어떤 개념이든 흡착시키는 성질을 지닌다.
본래라면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을 똑같은 물질로 취급해서 섞어내는 식이다.
브라함의 심상이 어떤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고 파훼하거나 흡수한다 치면, 소별왕의 신성은 이해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대상을 자신의 신성으로 삼아 활용했다.
닮은 듯 전혀 다른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난지를 논한다면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단, 강제력은 당연히 소별왕의 신성쪽이 더 강했다. 대상이 무엇이든 자신의 신성으로 삼아 결과적으로 신성을 강화시킨다는 점이 사기다.
“물론 소별왕의 신성에 무조건 의지할 수도 없고요. 소별왕의 신성으로 적기를 추출하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적기가 신성으로 변질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사전에 룬어로 신성의 성질을 바꿔놓아야 하는데 이게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알아서 잘 하시오.”
“...네.”
어린 지크가 백날 떠들어봤자 그리드는 도울 수 없는 문제였다.
내게 설명할 시간에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일축했다.
뜻을 헤아린 지크가 곧바로 집중했다. 기억하는 모든 룬어를 점검하며 상황에 가장 적합한 단어와 문장들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리드는 심상에 입장하기 전 지크에게 양도 받았던 사하란의 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보검.’
사하란의 검은 훌륭한 작품과 거리가 멀었다.
흔한 강철을 재료로 삼았을 뿐더러 형태가 조악했으니까.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검답다며 납득해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설 등급의 판정을 받는다.
단순히 적기가 담겨서는 아니다. 사하란의 적기가 담겨있다곤 하나 이것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됐기 때문에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그럼에도 가치가 높은 이유는 배경에 있다.
사하란 제국 건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와 관련 된 배경 말이다.
‘보물이라고 표현함이 옳지.’
이런 귀중한 보물을 녹여 없애야 한다니 마음이 썩 편치 않다...
생각하면서, 그리드는 사하란의 검을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골몰하던 어린 지크가 번쩍 눈을 뜬 것이 신호였다.
세상 모든 고통과 근심을 떠안은 것처럼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
그래서 오히려 바다의 심연처럼 깊게 느껴지는 소년의 눈동자는 어른 지크의 눈동자와 같았다.
화르륵!
맹렬히 회전하며 문장을 이루는 룬어들 사이로 무색의 신성이 들불처럼 번졌다. 용광로 안에서 녹아가는 사하란의 검을 향해 뻗어지는 것이다.
즉시 변화가 생겼다.
무색의 신성이 점차 붉은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성공했다.’
그리드가 안도하는 순간.
쏴아아아...
어린 지크를 향해 되돌아가는 신성이 빛깔을 잃어갔다.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무색으로 회귀했다.
‘아니, 실패한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리드의 귓전으로,
“성공했어요.”
안도의 한숨이 섞인 어린 지크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소별왕의 신성에 흡수 된 적기는 전보다 강력해져 있었다.
어른 지크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어린 지크가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이젠 그리드가 보답할 차례였다.
“제작을 시작하지.”
지금부터 만들 지크의 검은.
적기와 더불어 지크가 외면해온 그의 심상을 담을 것이다.
어쩌면 지크에겐 고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주해야 옳다.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자가 어찌 당당하게 세상을 바라보겠나.
또한 무슨 배짱으로 천상의 신들을 올려볼까.
스스로를 외면했던 시절이 있기에.
그리드는 지크의 심상을 끄집어낼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따앙, 따앙, 따앙!
룬어를 둘러친 그리드의 망치가 트라우카의 비늘과 뼈를 두드린다.
그때마다 트라우카의 불꽃과 맞물려 날뛰는 적기를 다스리기 위해 어린 지크는 부단히 애써야만 했다.
오늘 그리드와 지크가 함께 만들게 될 검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서는 용기였다.
***
고통을 확산시키는 검.
이튿날 새벽에 완성 된 지크의 검은 무지막지한 기능을 자랑했다.
매 공격 시마다 전 방위로 공포와 고통을 흩뿌리고, 그것에 오염 된 대상을 모조리 적기의 표적으로 삼아 통제하는 식이다.
공격이 중첩 될 때마다 고통의 확산 범위와 디버프 효과가 수직상승했다.
숫제 괴물이라는 표현을 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휘두를 때마다 스플래쉬 데미지가 발생하는 것부터가 그냥 말이 안 되네.’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지크의 검이 고통을 흩뿌리는 이유는 지크가 인식하는 세상이 고통으로 얼룩져있단 뜻이 됐으니까.
그렇다.
지크의 검에 깃든 지크의 심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통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지크 본인이 겪어온 고통을 당연하게 남들과 공유하려는 본능을 발휘했다. 심상이라는 무의식에 봉인해뒀던 고통들 말이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검을 몇 번 휘둘러본 지크가 황폐화 된 주변의 풍경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의 신께서 올바르게 만들어가고 계신 세상을 자신이 부정하고 부수는 꼴이었기에 면목이 없는 것이다.
“귀공의 잘못이 아니오. 귀공에게 거듭 고통을 안겼던 세상이 문제였던 거지.”
황제가 되고 신이 된 이후로.
늘 위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그리드다.
최대한 예스럽고 고상한 말투를 쓰기 위해 노력하며 지크를 달랬다.
“언젠간 귀공의 검이 축복을 흩뿌리는 날이 올 게요.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소. 물론 귀공이 함께 도와줘야 하오.”
“...예, 저의 신이시여.”
“음.”
간신히 평정을 되찾는 지크의 어깨를 그리드가 두드려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이전 세계의 최강자, 일곱 선인, 제국의 기둥 등등.
그리드가 없던 시절부터 세상의 중심에서 활약해온 지크는 그리드에게 다소 불편한 존재였으니까.
마치 하버드대 출신인 아버지뻘의 부하 직원 같은 느낌이랄까.
지크가 아무리 공손한 태도를 보여도 좁히기 힘든 거리감이 존재했다.
한데 오늘, 그 거리감이 확연하게 좁혀졌다.
심상합일의 여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속내를 엿봤다.
서로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스레 상기하는 한편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피차 닮았음을 알게 됐다.
존경심에 더불어 동질감까지 느끼게 됐단 말이다. 거리가 좁혀지는 게 당연했다.
***
라인하르트는 그리드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도시다.
그리드가 사도들의 심상을 점검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거대한 도시 전역에 순식간에 퍼졌다.
“심상세계에서 만든 거라고...?”
브라함의 지팡이와 지크의 검.
역천과 비견되는 사도들의 전용 아이템 정보가 반트너의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정보의 출처는 라우엘이다.
십공신에겐 공유 받을 자격이 있었다.
“...심상 없으면 드래곤 웨폰 못 갖는 거냐?”
반트너의 민머리가 드물게도 빛을 잃었다.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 탓이다.
몰골이 초췌할 만도 했다.
드래곤 웨폰과 아머.
모든 플레이어가 꿈꿔온 종결템을 손에 넣기까지 이제 단 한 걸음 남았다고 믿었건만.
다짜고짜 심상세계를 창조하라는 공지가 내려온다 싶더니 그리드가 사도들의 심상을 점검하고 다닌다는 게 아닌가?
하물며 현재까진 심상을 보유하고 있는 사도들의 드래곤 웨폰만 만들어주고 있었다.
“드래곤 웨폰을 만드는 전제 조건이 심상인 거야?”
재차 묻는 반트너의 거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안 그래도 걸걸한 목소리가 요동치자 가래라도 튀어나올 듯해서 불안했다.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고 선 라우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심상세계에서 만드는 드래곤 웨폰은 전용 무기 판정을 받아 훨씬 더 특화 된 위력을 발휘할 뿐이죠. 우선 십공신에겐 평범한 드래곤 웨폰이 지급 될 예정입니다. 그 이상의 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심상세계를 개방하기 위해 노력해주시면 되는 거고요.”
“당최 그 심상세계라는 걸 어떻게 여는 거지?”
이번엔 폰의 질문이었다.
기본적으로 랭커는 탐구심이 강하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그들의 본성이기에 타인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최근의 행보만 봐도 그렇다.
트라우카가 온전한 힘을 개방한 여파로 바뀐 세계.
해수의 온도와 해류의 방향이 바뀌며 대륙의 생태계는 종전과 크게 달라졌다.
여태껏 체험해보지 못했던 지형에서 상상해본 적 없는 마물들이 날뛰어댔다.
하지만 인류의 피해는 적었다.
대영웅이라고 칭송 받는 십공신을 주축으로 삼은 템빨단원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들은 아직 공략집이 없는 세계에 금세 적응하며 온갖 활약을 펼쳤다. 새로운 길을 거침없이 개척했다.
하지만 그리드와 관련 된 일 앞에선 늘 그랬듯이 어설퍼졌다.
심상세계에 대해서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떤 방향으로 접근해야할지조차 가늠을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값싼 자존심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을 찾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진지한 표정을 짓는 십공신들의 면면을 둘러본 라우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폐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
십공신 전원이 일제히 집중했고,
“빡겜하다 보면 자연히 얻어진다고 하셨죠.”
라우엘은 그들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조금 더 열심히 하시라는 뜻 아닐까요?”
더 열심히.
이 이상 뭘 더 열심히 하란 말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십공신들은 하루 접속 제한 시간을 모조리 소모한다.
사는 곳에 강도 높은 지진이 발생하거나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무조건 Satisfy에 접속해서 일정을 소화했다.
감기몸살 따위는 당연히 그들의 발목을 붙잡지 못했다.
심지어 극검은 등산 중 사고가 나서 사지가 부러졌을 때도 캡슐에 누웠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가상현실게임이 과연 최고라면서.
여기서 더 열심히 하라는 건 솔직히 납득이 안 됐단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그리드보다 더 노력하고 있느냐에 대해선 확신을 품기 힘들었으니까.
‘앞으론 로그아웃 상태에서도 Satisfy만 연구해야겠다.’
십공신들이 일제히 다짐할 무렵.
“심상을 봅시다.”
그리드는 미르와 대면했다.
대체 어디서 어떤 헛소문을 들은 건지, 미르는 고아한 도포에 어울리지 않는 강철 면갑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