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8화
‘피아로의 심상은 급하지 않다.’
피아로는 사도들 중에서 템빨을 가장 덜 탄다.
전투 스타일이 무기 데미지보단 스킬 데미지에 치중하기 때문인데, 스킬 데미지에 영향을 주는 각종 능력치를 <자연경>의 활용으로 충족하는 탓에 무기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애초에 피아로의 무기는 농기구다.
위력보단 밭을 더 빨리 가는 것에 중점을 뒀다.
씨앗 뿌리기와 급성장의 연계를 통해 공방을 이루는 피아로에게 중요한 건 밭을 가는 속도였고, 그 속도는 이미 최고점을 찍은 상태였다.
‘게다다 요즘 피아로는 전투의 중요도를 낮게 두고 있기도 하고.’
피아로는 농부다.
황금호두처럼 이로운 농작물을 개발하고 생산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발휘했다.
피아로가 템빨국 최고의 전력이던 시절에야 농부의 소임을 외면하고 장수로 활약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현재 템빨국엔 피아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최소 다섯 명 이상 있다.
그들 전부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피아로가 전선에 설 이유는 사실상 없었다. 아니, 전선에 세우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바람직했다.
물론 바알 원정에 나설 땐 필수로 데려가야 했지만, 그때까지 시간은 충분하다.
원정 일정을 조율하는 건 바알이 아닌 바로 그리드 자신이니까.
굳이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드에겐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피아로는 반드시 심상세계를 개방할 수 있다는 믿음.
피아로가 만드는 논밭이 이미 심상세계와 비견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는다.
‘피아로는 심상세계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작은 깨달음을 얻는 즉시 심상세계를 열 수 있는 입장이야.’
깨달음의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머지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그 사실을 피아로 본인도 인지하고 있기에 초조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입장이 달랐다.
그녀 본인부터가 항상 전선에 서길 바랄뿐더러 무기 의존도도 높았다.
본래 기사라는 직업 자체가 장비 착용 시 보정 효과를 얻는다.
심지어 메르세데스가 거듭 써온 기사도는 그리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템빨을 숭상하여 장비 착용 시 보정 효과를 추가로 얻었다.
단순히 사도라는 이유로 그리드의 아이템을 제대로 다루는 다른 사도들보다 입장이 훨씬 우위에 있는 셈이다.
이제 낡은 무기 취급 받는 백호검을 빨리 갈아치울수록 그녀의 전투력도 수직상승했다.
심상세계를 개방하지 못했을 경우 좌절해야 옳았다.
태연한 얼굴로 ‘심상세계를 열지 못했다’고 답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메르 너... 심상 있지?”
“딸꾹!”
역시나.
메르세데스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도 못하면서 누굴 속이려고.’
메르세데스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녀에게 거짓말이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드는 메르세데스가 누군가를 속이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심상을 보여줘.”
“...”
“조금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괜찮아. 어디까지나 무기를 만들려고 하는 거니까... 의원 앞에서 탈의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
“주군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선 탈의하지 않아요.”
“그, 그래... 아무튼.”
이상한 부분에서 반응하네.
예쁜 눈을 치켜뜨는 메르세데스에게 압도당한 그리드가 잠시 어버버 하다가 재차 설득했다.
“새로운 드래곤 웨폰을 제작하기 위해선 사용자의 심상이 필요해.”
“심상 없이도 만들 수 있지 않나요? 황혼처럼요.”
“그야 그렇지만 위력 면에서 아쉬우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의 황혼은 유일한 신화가 될 명검 중의 명검인데 무엇이 아쉽겠어요? 저는 황혼과 동격의 무기로 충분해요. 함께 성장해가는 보람도 있을 테고요.”
확실히, 성장형 무기의 매력은 대단하다.
당장 황혼만 봐도 언젠간 역천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성장형 신화 등급의 무기를 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전용 무기는 성장을 마친 성장형 무기 이상의 위력을 처음부터 발휘한다.
“전용 무기 하나는 무조건 갖고 가야 돼. 성장형 무기야 이후에 보조 무기로 쓰면서 육성하면 되는 거고.”
“...읏.”
메르세데스의 도톰한 입술이 꿈틀거렸다.
난처할 때 보이는 습관이다.
그리드도 초야를 치렀던 날에야 처음으로 목격했던 습관.
‘이해는 된다.’
심상의 표출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드의 심상세계야 칸의 마음을 근원으로 삼는 까닭에 매우 건실한 편에 속했지만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
지크와 미르의 심상이 증명한다.
사실 브라함의 심상세계도 오만과 욕망의 덩어리에 가까웠다.
이름부터가 세계의 중심 아닌가.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긴다는 뜻.
보통 염치로는 남들 앞에 표출하기 부끄러운 심상이었다.
메르세데스의 심상도 그들과 닮았을 확률이 높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 어둠이 존재했으니까.
특히 메르세데스는 혜안을 타고난 까닭에 부모에게 버림 받았다.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그녀의 마음에 짙은 어둠이 도사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심상을 보여 달라는 게 얼마나 무례한 부탁인지 잘 알고 있어. 보여주길 망설이는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명심해 줘. 이 세상에서 나만큼은 네게 실망하지 않는다는 걸.”
“...”
그리드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던 메르세데스의 말이 뚝 멈췄다.
실망하지 않겠다는 그리드의 말을 되새기며 용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끝내.
“...정말로, 제가 어떤 여자일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주세요.”
결심을 세운 메르세데스가 힘겹게 말했다. 수줍은 소녀처럼 양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예쁘면 진짜 어떤 모습도 사랑스럽구나.
메르세데스의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에 재차 반한 그리드가 풀어진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 모든 걸 걸고서 약속할게.”
대답이 신호였다.
하아아...
메르세데스의 호흡이 겨울날의 숨결처럼 짙어졌다.
차가운 냉기가 그녀의 푸른 머리카락과 뒤얽혀 색을 흐리게 만들었고 대지는 메마르다 못해 갈라져갔다.
쩌저저저저저정!!
메르세데스가 딛고 선 땅을 중심으로 세상이 결빙되어간다.
그리드의 뜨거운 신성이 막을 틈도 없이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차갑게 얼어붙어있는 세상으로 그리드가 떨어졌다.
[메르세데스의 심상 <멈춰버린 세계>에 입장하였습니다.]
“...”
그리드가 가장 처음으로 본 것은 얼음으로 만든 세 사람의 조각상이었다.
어린 소녀의 조각상이 홀로 쓸쓸히 앉아있었고 부모로 보이는 어른 조각상들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 채 등 돌려 서있었다.
-저주 받은 아이.
-저런 괴물이 내 자식일 리가 없어. 당신, 어떤 놈과 놀아난 거지?
-꺄악! 저년 탓이야...! 저 저주 받은 괴물 탓에 내가 이런 꼴을...!
환청이 들려온다.
의심, 증오, 분노 따위로 점철 된 환청이다.
온갖 상태이상을 유발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서히 일어나 침입자를 노려보는 어린 소녀상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줄 뿐이다.
“넌 괴물이 아니야. 어리석은 부모의 의심과 증오 따위에 흔들리지 마라. 조만간 곧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잖아?”
따스한 신성이 어린 소녀상을 녹여간다.
환청이 멀어졌고 그리드가 보는 풍경 또한 바뀌었다.
거대한 궁전을 등지고 펼쳐진 연무장이다.
열과 오를 맞춘 수십 개의 얼음상이 누군가의 호령에 맞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린 소녀상을 목말 태운 기사의 호령이다.
기사 역시 얼음으로 조각 된 까닭에 이목구비가 똑바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드는 기사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상처 입은 소녀를 처음으로 웃게 만든 자.
꽤나 젊은 피아로였다.
제국의 기사였던 시절, 그는 다른 적기사들과 함께 단련에 힘쓰며 소녀의 부모 노릇을 해주었다.
꺄르르...
기사들의 기합에 섞이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만들 무렵.
척!
기사상들이 그리드에게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얼음 칼날을 겨눈 채다.
칼날마다 백호검의 예기가 피어올랐다.
과거를 재연하며 침입자를 적대하는 메르세데스의 심상에 무기 데미지가 적용된다는 의미였다. 그녀에겐 템빨이 정말로 중요했다.
-일평생 제국과 황제에게 헌신해온 우리다! 어찌 우리를 반역자로 몰아가는가!
-메르세데스! 네가 증언해줘! 우리가 제국을 배신할 리가 없잖아!
그리드를 공격하는 기사상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피눈물을 쏟는 여파다.
공교롭게도 기사상들의 외침은 소녀에게 닿지 못했다.
소녀는 어느새 높은 탑에 고립되어 있었다.
야탄의 종에게 회유 된 다른 기사들이 수련을 명목으로 그녀를 가뒀다. 진실을 분별하는 혜안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스모펠! 네놈이 우리의 가족을...!!
-메르세데스, 어째서 도와주지 않았니...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기사상들의 비명과 원망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급기야 그들이 섰던 자리엔 핏자국만이 가득했다.
그리드가 이룬 학살이 아니다.
그리드는 차마 반격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힘썼다. 제한 시간이 지나자 기사상들이 스스로 무너졌을 뿐이다.
그때쯤 탑에서 나온 소녀상의 가슴에 처참한 균열이 생겼다.
회복되지 않은 채, 소녀상은 여인의 모습으로 성장해갔다.
‘메르 입장에선 새로 얻은 가족에게도 배신을 당한 격인가’
모든 진실이 차단 된 상황 속에서.
메르세데스는 피아로와 적기사단이 제국을, 자신을 배신했다고 착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르의 심상의 얼개를 이루는 건 고통이 아니야.’
심상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의 정체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건 고통이 아닌 후회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메르세데스의 심상세계는 비교적 최근에 개방 된 것이다.
피아로와 적기사단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란 말이다.
그녀의 심상에 그날의 사건이 새겨진 이유는, 피아로와 적기사단에게 배신당한 아픔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돕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에 있었다.
‘너무 착한 나머지... 메르는 자신을 증오한 끝에 내쳤던 부모에게도 죄책감을 느끼는 거구나.’
어린 시절의 메르세데스는 부모의 마음을 읽고 충격 받아 침묵했었다.
그때 침묵하지 않았다면 부모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고 가정이 지켜지지 않았을까.
메르세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여 그날의 기억 또한 얼어붙은 마음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다.
마음씨가 참으로 고운 사람이다.
메르세데스를 사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그리드는 따스함을 느꼈다.
실제로도 온기가 피어오르지 않나.
‘...온기?’
잠시 상념에 잠겼던 그리드가 당황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곳곳에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설원 위에 덩그러니 놓인 노천 온천 때문이었다. 그리드가 느낀 따스함에서 온천의 열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만은 않은 듯했다.
‘온천?’
갑자기 웬 온천?
그리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우는 순간.
-무릎 꿇으세요.
또 환청이 들려왔다.
이번에 들려오는 환청은 메르세데스의 음성을 닮았다.
그리드의 시선이 소리의 발원지로 향했다.
옥좌에 걸터앉은 메르세데스의 얼음상이 보였다.
그녀 앞에 무릎 꿇는 사내가 있다.
왕관을 쓴 사내.
그리드였다.
정확히는 막 템빨국을 세웠을 무렵의 그리드.
확실하다.
그리드의 모습은 얼음으로 조각 된 게 아니라 실물과 똑같았으니까.
“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광경이다.
그리드의 마음이 왠지 뭉클해졌다.
‘메르세데스는 그날의 태도 또한 후회하고 있는 거구나.’
제국의 첫 번째 기사였던 메르세데스는 황제를 대행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그리드에게 온갖 죄를 물으며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했다.
당시의 그리드에겐 당연히 수모였고 치욕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 지난 일에 불과했다.
추억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메르세데스에겐 깊은 후회로 남아 심상세계에서 무한히 그날의 사건을 재연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메르세데스를 잘 달래줘야겠다.
적어도 그날의 사건만큼은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실히 말해줄 것이다.
“...응?”
재차 다짐하던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르세데스의 조각상이 뺨에 홍조를 띄운다 싶더니 무릎 꿇고 있는 그리드의 입가로 발을 가져가는 게 아닌가?
-입 맞추세요.
“...”
발등에 키스를 요구하다니?
실제와 다르다.
현실의 메르세데스는 저러지 않았다.
쪽.
그리드의 태도는 몹시 온순했다.
메르세데스의 발등에 순순히 입을 맞추었다.
-더. 더, 더.
메르세데스는 만족하지 않았다. 여전히 발을 내민 채로 있었고, 무릎 꿇고 앉은 그리드는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그녀의 발목과 종아리, 무릎에 이어 허벅지까지 입을 맞춰갔다.
“거기까지!!”
이거 대체 뭐냐?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넋이 나가있는 그리드의 귓전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이번엔 환청이 아닌 진짜 육성이었다.
첨벙첨벙!
온천에서 뛰쳐나온 메르세데스가 옥좌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제 얼음상을 힘껏 때려 부쉈다.
“허억...! 허억...! 이, 이건...! 이건!!”
흥분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메르세데스가 차마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메르세데스의 심상 <멈춰버린 세계>가 하나의 후회를 극복하고 진화합니다.]
[진화 효과로 <멈춰버린 세계>의 디버프, 빙결, 재연 효과가 강화됩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축하해, 메르. 시작이 좋네. 그치?”
그리드는 최대한 밝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메르세데스의 심상 구석에 쥐구멍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