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9화
메르세데스의 심상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후회다.
이곳에서 재연되는 광경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하필 그리드와 처음 만났던 날을 그중 하나로 꼽았다는 점이 꽤 의외였지만... 아무튼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의 취향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원기를 다 모으고 다시 잠자리를 갖게 되면...’
그날 밤엔 메르세데스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고 주종 역전 관계를 실천하리라.
유일한 신에게 허언은 없다.
진지하게 다짐하는 그리드의 귓전에 메르세데스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떨림 없이 잔잔한 목소리였다.
“감사해요. 주군 덕분에 가일층 발전할 수 있었네요.”
무릎 꿇고 앉아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드에게 발등과 발목, 종아리와 허벅지에 이어 더욱 높은 곳까지 키스를 강요했던 메르세데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다.
메르세데스가 직접 때려 부쉈다.
그래서일까.
방금 전 장면이 그녀의 기억에서 삭제 된 눈치였다.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말하고 있음이 증거다.
‘잘 된 일인가...?’
평정을 되찾은 메르세데스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표정이 미묘했다. 안도가 되는 한편으로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에겐 메르세데스의 취향에 어울려줄 의향이 있었으니까.
사실상 포상이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메르세데스의 가늘고 흰 발과 발목이 예쁘다고 생각했...
‘...그만.’
자꾸만 엇나가는 의식의 흐름을 그리드가 간신히 막았다. 삿된 잡념을 떨쳐내고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뭘. 늘 그랬듯이 스스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낸 너를 존경한다, 메르. 축하해.”
메르세데스가 잊은 듯한 광경을, 그리드 또한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못 본 사람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네...”
메르세데스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졌다.
그녀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리드와의 추억... 아니, 망상 하나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슬펐다.
기껏 하나의 후회를 지운 심상에 새로운 후회가 싹트려고 했다.
그리드가 고스란히 느꼈다.
부부 아닌가.
평소에도 교감해오던 차에 하물며 이곳은 메르세데스의 심상이다.
이곳에서 그리드가 그녀의 감정과 생각을 읽지 못한다면.
그건 눈치가 없는 수준을 넘어서는 질병일 것이다.
“다음에 직접 해줄게.”
“...?”
두서없는 말에 의아해하던 메르세데스의 안색이 이내 창백해졌다.
그리드의 말에 담긴 뜻을 읽은 여파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음흉한 취향을 들켰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안 그래도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었어. 그... 발등에 키스라던가.”
메르세데스의 심상이 출렁이는 것을 느낀 그리드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정말이요?”
메르세데스의 굳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당연히 진짜지.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해?”
“기뻐요.”
취향의 존중을 넘어서는 공유.
이것이야말로 천생연분 아닌가?
메르세데스는 그리드를 사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의 협곡>이 메르세데스의 심상 <멈춰버린 세계>에 동화합니다.]
심상합일이 이뤄졌다.
온천에는 무엇이 있는지.
저 짙은 수증기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그림 같은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보려던 차에 발생한 일이다.
아무리 천생연분이라고 해도 거기까지 보여주기엔 아직 다소 망설여졌던 메르세데스가 그리드의 주의를 돌렸다.
“이제 시작하는 건가요?”
“어...? 으, 응. 근데 저기 뭐가 저렇게 덕지덕지 붙어있...”
“주군과 하나가 된 상태로 만드는 무기라니, 너무 기쁘고 설레요. 몬스터들의 피로 얼룩졌던 산맥에서 치렀던 초야처럼요.”
“나도 그래. 그날 밤처럼, 오늘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두 사람이 온전하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의념제작을 활성화시킨 채로 새로운 드래곤 웨폰의 제작에 착수했다.
동시에 기적 같은 광경이 연출됐다.
파스슥!
그리드가 피어올린 용광로 속 불길의 표면이 얼어붙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불꽃마저 얼려버리는 냉기라니.
섭리에 위배 된다.
심상세계가 현실과 단절 된 공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광경이었다.
따앙, 따앙, 따앙!!
메르세데스의 심상이 피어 올리는 냉기는 그리드의 제작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긍정적이진 않았다.
시뻘겋게 달궈진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급격히 냉각시켜 표면을 훼손시키길 반복했으니까.
“저는 방해만 되는 거 아닌가요?”
결국 보다 못한 메르세데스가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 이걸 봐. 눈꽃처럼 아름답지?”
그리드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온전하게 받아들여야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심상합일을 이룬 상태로 만든 결과다. 이 현상들은 자연스럽고 이로운 것들일 거야.’
실제로 그가 단련 중인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은 실패작으로 보기 힘들었다.
형태가 예술품마냥 아름다운 까닭이다.
냉기에 훼손 될 때마다 발생한 균열이 뼈와 비늘의 표면을 눈꽃처럼 만들었는데 심지어 몹시 강렬한 예기까지 담겼다.
물론 이 상태로 무기를 만들 경우 적을 베는 검이 아닌 때려죽이는 철퇴가 되겠지만...
‘...메르하고 철퇴라. 잘 어울리긴 해.’
전설의 기사인 메르세데스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잘 다룬다. 검에 얽매이는 검사들과는 결이 달랐다.
“...”
문득 얼굴이 가렵다고 느낀 그리드가 시선을 돌려보았다.
메르세데스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하고 철퇴가 왜 잘 어울리죠?”
심상합일을 이룬 상태라는 걸 깜빡했다.
현재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는 깊이 교감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내를 읽을 정도로.
그리드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봐봐. 이 상태로 만드는 철퇴는 얼마나 아름답겠어? 붉고 투명한 눈꽃의 기둥을 손에 쥔 느낌일 텐데, 메르 너의 흰 피부와 정말 잘 어울릴 거야.”
“그렇...네요.”
메르세데스는 철퇴를 쥔 자신의 모습을 굳이 상상해보지 않았다.
그리드가 어울릴 거라고 말하니 그저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실 철퇴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도들 대부분이 검을 주력 무기로 삼는 상황에서, 도검불침을 이룬 존재와 대적할 경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녀의 생각을 읽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특히 바알이 도검불침을 이뤘을 가능성이 높지.”
바알은 그리드에게 이미 몇 번의 죽음을 겪었다.
물론 그리드가 겪은 죽음의 횟수가 더 많긴 했지만, 아무튼 황혼에 제대로 당했다.
재차 베이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제대로 방비했을 터였다.
“망자들의 영혼을 뒤지고 또 뒤져서 검에 면역하는 체질을 갖췄다고 봐야 무방... 응?”
연신 망치를 두드리며 설명하던 그리드가 당황해서 말을 멈췄다.
하나의 무기로 제련되어가던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에서 눈꽃의 파편들이 분리 된 탓이다. 뾰족뾰족한 입자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가자 제련 중인 무기가 매끄러운 표면을 갖게 됐다.
“...역시 철퇴보단 검이지.”
그리드가 말을 고치는 순간이었다.
쏴아아...
드래곤의 뼈와 비늘에서 분리 된 붉은 눈꽃의 파편들이 메르세데스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서서히 회전하며 토성을 공전하는 고리와 닮아갔다.
“아...”
그리드와 교감할수록 깊은 음욕에 물들어가던 메르세데스의 두 눈이 불시에 맑아졌다.
숭고한 기사의 눈빛.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허공에 손짓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쫓아 고리가 회전하고,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한다.
망치질을 멈춘 그리드의 모루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검’으로 날아가 처음처럼 달라붙어 철퇴의 형상을 갖추기도 했다.
‘형태를 바꾼다는 점에서 역천과 조금 닮았다.’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붉은 눈꽃의 파편이 움직임을 더할 때마다 급격히 냉각 된 주위의 온도에 의외의 물건이 반응했다.
<서리여왕의 심장>이다.
종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냉기를 발산하기 시작한 그것이 메르세데스의 심상과 결합할 조짐을 보였다.
‘어딜.’
당연히 그리드가 차단했다.
서리여왕의 심장은 몹시 강력한 기능을 지닌 대신 치명적인 단점을 지녔으니까.
그건 바로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냉기를 상시 발산한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살아가지 못하는 얼음 왕국을 만드는 냉기였다.
극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리여왕의 심장은 숫제 보스 몬스터를 만드는 극약이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라고 봐도 무방한 그리드의 인벤토리에 봉인 된 이유다.
그리드는 이 저주받은 물건이 감히 메르세데스에게 침범하려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
“...메르세데스?”
서리여왕의 심장을 억누르기 위해 용광로의 열기를 높이던 그리드가 당황했다.
붉은 눈꽃의 고리가 용광로를 감싸 열기를 낮춘 까닭이다.
그 탓에 서리여왕의 심장이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다.
메르세데스가 그리드를 진정시키듯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물건. 제가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소화할 수 있어요.”
주작조차 꺼려하는 서리여왕의 심장을 통제하겠다는 선언도 대단한 것이다. 자칫 굉장히 오만하게 비칠 수도 있었다.
한데 메르세데스는 통제하는 수준을 넘어서 소화하겠다고 단언했다.
믿어도 될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메르세데스다.
그리드는 그녀를 무조건 신뢰했다.
이건 그녀를 향한 호감도와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신들조차 경계하는 혜안을 지닌 자.
유일신 그리드의 허락 없이 그리드의 신성을 강림시켜 강신을 이루는 자.
메르세데스는 비록 심상을 욕망의 분출구로 삼는, 다소 음탕한 취향을 지닌 여인이었지만, 취향과 별개로 무척 유능했다. 당연히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어디 해봐.”
그리드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근!
서리여왕의 심장이 맥동하며 잃었던 냉기를 발산했다.
메르세데스의 심상 전역으로 뻗어지는 냉기였다.
그대로 메르세데스의 심상을 지배해버릴 기세였다.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붉은 서리의 파편을 손에 두른 메르세데스가 날뛰는 서리여왕의 심장을 덥썩 움켜쥐자 심상을 물들여가던 냉기가 메르세데스의 심장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리드가 주작의 심장을 품은 것처럼.
메르세데스는 서리여왕의 심장을 품었다.
“...이걸로.”
차가운 숨결을 토하는 메르세데스의 외형이 변했다. 짙은 코발트블루의 머리카락이 맑은 하늘색으로 물들어갔고 고운 피부는 눈보다 더 새하얘졌다.
“제 심장 또한 멈추지 않게 되었네요.”
[당신의 사도 메르세데스가 <서리여왕의 심장>을 흡수하였습니다.]
[서리여왕의 심장이 발생시키는 강제 옵션 효과가 메르세데스의 뜻대로 제어됩니다.]
[처참히 부서져도 수복되는 심장을 갖게 된 그녀는 설령 죽음을 맞이할지언정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이걸로 영원히 함께예요.”
황홀한 표정을 짓고 속삭이는 메르세데스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너무 하얘진 피부 탓에 유독 붉어 보이는 입술처럼 짙은 홍조였다.
그리드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당장은 기쁨이 가장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