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2화
‘물론 번헬리어와 굳이 척을 질 생각은 없다.’
고룡에 대해서 아는 자들은 번헬리어를 혹독하게 비평하곤 한다.
번헬리어가 바알 앞에서 약해지는 것과 별개로, 타고난 권위 자체를 수준 미달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절대자들 사이에서의 인식이다.
심지어 번헬리어를 낮게 평가하는 절대자들조차도 여태껏 번헬리어를 어쩌지는 못했다.
아마도 결사들의 어그로를 끌고 자의적으로 탑에 호송되어 온 듯한 눈앞의 고룡은, 온갖 원한을 사고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스스로 하찮은 미물 취급하는 인간마냥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해서 인간을 대하는 감각으로 마주해선 안 되는 것이다.
마침 용살자 하야테가 경고를 보내왔다.
-우리들 셋이 합심하여 저자를 억압할지언정 참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번헬리어는 이미 먼 과거에 죽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리드에게만 들리는 전음을 속삭일 때의 하야테는 극존칭을 사용했다. 의식해서가 아니다. 그리드를 공경하는 마음을 품은 탓에 저절로 그렇게 됐다.
-번헬리어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단이 존재한다거나, 타고난 고룡의 위계가 우리들이 체험한 것보다 한층 더 대단하다거나. 둘 중 하나일 게요.
물론 그리드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곧바로 말투를 고쳤다. 이렇듯 의식해야만 하대가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굳이 적대해서 이로울 게 없다는 말씀이시죠?
-맞소. 단순히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은 까닭이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서 세 사람이 번헬리어와 싸워서 승기를 잡는다고 한들.
번헬리어가 도주하는 것까지 막을 거라는 장담은 없다.
도망친 번헬리어가 실시간으로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을 막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고.
과장 좀 보태서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고룡의 마법 폭격을 무슨 수로 일일이 대응하겠는가?
템빨계의 주력들이 방비하는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들은 그날로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저 목줄도 번헬리어 저놈이 스스로 만들어 채운 것일세.
그리드와 하야테가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유추한 비반이 끼어들어 첨언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적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가고 싶었을 뿐이죠.
바알 토벌에서 번헬리어가 불필요하다는 건 절반만 진실이다.
우선, 현재 바알의 전력이 어느 수준인지 그리드는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유라의 정기 보고를 통해 파악한 사실은 바알이 신살의 기운과 종횡무진을 비롯해 몇 가지 신규 스킬을 습득했다는 정도인데, 그 정도로는 그리드와 사도들, 결사들의 협공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그리드의 판단이다.
번헬리어의 도움이 없어도 수백수천 번을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 수많은 죽음을 선사하는 과정에서 서사시를 이용하면 인류가 바알에게 품어온 공포의 근원을 지울 수 있다는 계산도 섰다.
하지만 만약 바알이 예측보다 더 강해졌거나, 숨겨놓은 비장의 수단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면... 가장 최악의 경우 아수라를 완성시켰다면.
그때는 반드시 번헬리어의 도움이 필요해질 것이다.
‘번헬리어의 주특기는 마법이다. 지옥에서 약해진 상태라고 해도 브라함과 놀라운 시너지를 선보일 가능성이 높아.’
단순히 그리드가 탑승해도 좋다.
아무래도 네펠리나보단 번헬리어를 탔을 때 얻는 효과가 더 컸으니까.
물론 네펠리나 또한 1분 한정 슈퍼카이긴 했지만, 번헬리어는 무려 하이엔드급의 하이퍼카다.
최신식 하이엔드급의 하이퍼카인 다른 고룡들과 달리 연식이 좀 있다고 비유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네펠리나보단 훨씬 나았다.
‘...이렇게 말하면 꼭 네펠리나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연히 그건 아니야. 렌터카가 아무리 좋아봤자 자차가 최고지.’
무엇보다 네펠리나는 짧지만 완전한 용언을 구사할 수 있다.
적어도 용언과 관련해선 번헬리어보다 뛰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게 맞나?’
번헬리어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에 측은지심이 스쳤다.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감정이었지만 번헬리어는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뭐냐? 네가 지금, 나를 진정으로 조롱하는 것이냐?”
번헬리어는 바알을 반드시 없애야 하는 입장이었다.
저주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바알에게 족쇄가 채워진 개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었으니까.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자신과 똑같이 바알을 적대하는 그리드와 당연히 협력해야 옳았다.
우리가 힘을 합쳐야 바알의 무한한 목숨을 끊을 가능성이라도 생길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되도록 그리드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함께 지옥에서 싸웠을 무렵부터 품었던 생각이다.
하여 번헬리어는 그리드를 마땅히 존중해주었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드를 위대하다고 칭송했었을 정도로.
한데 그리드는 거만하게도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협력을 단칼에 거부한 것으로 모자라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온다.
숫제 아랫놈 보듯이...
“못 본 새 무척 오만해졌구나. 일종의 방어기제인가? 자신보다 고결한 존재를 욕보임으로써 미천한 태생을 감추려는.”
성질대로 지껄이면서도.
번헬리어는 지금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룡이다.
비록 아쉬운 입장이라고 하나 치욕을 고스란히 감당할 위계가 아니었다.
점차로 분노를 키워나가는 번헬리어를 보면서, 그리드는 우선 분위기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오해야. 바알을 잡는데 당신의 힘이 불필요한 것과 별개로 당신을 저평가하진 않아. 애초에 당신이 우리들 중 누구보다 고강하단 사실을 뻔히 알면서 당신이 불필요하다는 이유가 뭐겠어?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되겠지?
중앙에 주황색 신성이 맴도는 새카만 눈동자.
그리드는 깊고 신비한 눈으로 번헬리어를 응시한 채 라우엘과 후로이의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잠시간의 텀을 둔 뒤 입을 열었다.
“악룡 번헬리어.”
“...?”
“스스로를 고결하다 자처하기엔 신세가 매우 영락하지 않았나? 지금의 당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건 인류 정도밖에 없다. 자칫 세상이 새로운 종말을 맞이해서 인류가 모조리 죽어버리면, 그때 당신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 것을 스스로도 잘 알 텐데?”
“네가...! 망언을 일삼는구나...!”
“아니, 당신에겐 지독하게도 현실이야. 안 그래도 광증을 얻은 네바르탄조차 감당 못해온 당신이 바알 탓에 한층 더 약해진 지금, 지옥의 악마들과 천상의 신들이 당신을 제대로 존중할 것 같아? 바알과 협력한 시점부터 다른 고룡들에겐 상종 못할 놈으로 낙인 찍혔을 테고... 똑똑히 기억해 둬. 지금의 당신은, 드래곤이라면 마냥 두려워하는 인류가 없었다면 위신조차 세울 수 없는 쓰레기다.”
“...”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번헬리어의 안색이 하얗게 돌아왔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신세를 인정하자마자 마음을 다스린 것이다.
고룡의 정신력은 과연 초월적이었다.
“굳이 당신과 협력하기엔 우리의 입장도 난처한 거야. 기껏 다시 지옥을 침공하는데 당신과 협력한다? 하물며 지옥에선 대부분의 힘을 상실하는 당신과? 입장이 얼마나 아쉬우면 저럴까 싶어서 바알과 악마들의 사기만 올려주는 꼴이 되겠지.”
“...”
지금부터라도 엄한 놈들이 인간을 해치지 못하도록 단속해야 하나.
번헬리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그리드의 힐난은 계속 됐다.
“당신이 뿌린 씨앗이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기만과 조롱을 반복해온 끝에 당신은 고독해졌고, 약해진 당신을 도울 존재는 세상 전체를 통틀어도 없어.”
“협력하기 싫다는 네 뜻은 충분히 이해했으니 적당히 해라. 들어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단 한 명.”
지금.
그리드는 아이템을 만들 때처럼 장인의 정신을 품고 있었다.
라우엘의 지혜와 후로이의 입을 통해 완성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심력을 다해 연결시켜나갔다.
“오직 나만은 당신을 도울 의향이 있어.”
“...”
의외의 말에 번헬리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명백히 의심을 품고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당연하잖아. 당신은 적어도 나만큼은 존중해줬었으니까.”
번헬리어가 그리드를 위대하다고 칭송했을 때.
미약하나마 용언이 발현됐다.
세계가 그 순간의 주인공을 그리드로 지목했었다.
번헬리어의 말에 진심이 담겼었다는 증거다.
번헬리어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러므로 이 순간 그리드의 말을 더 이상 의심하지 못했다.
“번헬리어, 당신이 바알 토벌에 동참해서 바알의 목숨을 확실하게 끊어놓고 싶다면 약속해라. 앞으로도 나와 내 동료만큼은, 또한 우리가 지키려하는 것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겠다고. 당신이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당신의 편일 테니까 손해는 아닐 거다.”
“...고작 그게 전부인가?”
번헬리어가 기껏 지웠던 의심을 재차 품었다.
“너와 네 동료들을, 그리고 인류를 존중하는 것으로. 고작 그 정도로 나는 너희와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냐?”
그리드는 늘 싸워서 이겨온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말과 감성으로 상대방을 설득했고 그를 기반으로 세력을 일궈왔다.
여기서 감성이란 그리드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 반면, 말은 대개 라우엘의 머리와 후로이의 이빨에서 나왔다.
두 사람과 협력을 이룬 그리드는 조금 다른 면에서 천하무적인 셈이다.
타고난 본성이 악하여 오판을 거듭해온 끝에 고독해진 고룡을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물론 그리드가 <드래곤 나이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룡 이프리트의 염원에서 비롯한 드래곤 나이트는, 드래곤이라는 종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염원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존재였다.
“그래, 온 세상이 당신을 부정할지언정 내 생각은 다르니까. 당신이 나를 위대하다고 말해주었듯이 나 또한 당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해. 당신과의 협력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해도, 당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함께하고 싶다.”
“...그것 참, 고맙군.”
‘황당한.’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비반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협력을 영광으로 알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접근해왔던 번헬리어다.
한데 순식간에 입장을 바꾸었다.
그리드와의 협력이 순전히 그리드의 호의 덕분에 가능한 거라고 믿고 감사를 표하고 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드래곤 나이트의 저력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악룡 번헬리어가 당신에게 낯선 감정을 품습니다. 아직은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입니다.]
-잘 해결하셨군요.
-너희 덕분이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그리드, 라우엘, 후로이가 귓속말을 교환하며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가운데.
“나는...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이곳에 당분간 혼자 있고 싶군.”
“편히 쉴 수 있도록 다른 방을 내어드리겠소.”
“아니, 이동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시간을 아깝게 느낀다라... 처음 겪는 일인 것 같은데. 아주 흥미로워...”
“...알겠소.”
하야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긴 내 집무실이니까 다른 곳으로 가라고 재차 말하기엔 좀 난처했던 것이다.
“마침 잘 됐습니다. 장소를 옮길 필요가 있어보였거든요.”
그나마 그리드의 말이 위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