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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28화 (1,727/1,794)

템빨 85권 - 17화

“무슨 수로 가짜라는 걸 눈치 챘나?”

꾸득, 꾸드드드드득...

거검을 쥔 비반의 손에서 연신 울리던 소음이 멎었다.

거검 최후의 단말마가 그친 것이다.

비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큰 몸을 비틀어대던 녀석은, 꼼짝도 않는 비반의 손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갔다.

합일.

아니, 되돌아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거검의 형태로 분산됐던 의념이 비반의 의념과 합쳐졌다.

이제 거검은 비반이다.

본래 비반이었다.

“나조차도 깜빡 속아 넘어갔을 정도인데.”

그리드에게 묻는 비반의 눈동자에 흥미와 감탄이 교차했다.

약 2시간 전.

그리드가 체감하기론 몇 년 전일 수도 있을 그때, 비반은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그리드를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순보를 사용할 때마다 즉시 뒤쫓는 기척.

그것은 분명 그리드의 신성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 그리드라고 생각했다. 그리드와 함께 거검을 탐색 중이라고 인지했다.

폭음이 들려오기 전까진 그랬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서있는 건 그리드가 아닌 인형이었다.

비반의 심상세계에서 주인처럼 행세해온 거검이 수작을 부려서 만든 인형.

그리드의 신성을 담은 채 그리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없었다.

소란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이상했다.

그제야 인형의 정체와 상황을 파악한 비반은 다급히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마침 거검을 제압 중이던 그리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드는 무슨 수로 나와 꼭 닮은 모습을 했을 거검의 정체를 파악했단 말인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리드가 간단히 대답했다.

“제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잖습니까.”

“...허.”

사실 깜빡 속아 넘어갔다.

만약 거검의 성격과 말투가 ‘검신이 되기 전의 비반’과 닮지 않았다면, 그리드는 거검의 정체를 끝까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자칫 비반이 서운하지 않도록, 또한 자신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드는 태연하게 진실을 숨겼다.

“그렇군. 우리의 사이가 꽤 각별하긴 하지. 내가 자네의 입장이었어도 금방 눈치 챘을 것 같구만.”

비반 역시 그리드와 같은 이유로 진실을 숨겼다.

자신이 가짜 그리드에게 깜빡 속았다는 사실을 굳이 고백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도, 약간의 허세도 닮은 것이다.

두 사람은 천생연분에 가까웠다.

심상합일 또한 쉽게 이뤘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그리드가 금의 성역을 켜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합일 됐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망치와 모루를 꺼낸 그리드가 의념 제작을 활성화시켰다.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 그리고 비반의 의념을 재료로 갖췄다.

고개를 끄덕인 비반이 도왔다.

화르르륵!!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녹이는 용광로 속 화염에 비반의 검기가 보태졌다.

검기의 화염.

그것은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단순히 녹이는 게 아니라 연마하고 분쇄하는 사전 작업을 거쳤다. 날카로운 형상을 각인시키는 느낌에 가까웠다.

끝내 녹아 줄줄 쏟아져 나오는 붉은 쇳물이 마치 칼날 같은 예기를 품었다.

검으로 완성됐을 땐 얼마나 날카로워질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따앙, 따앙, 따앙!!

그리드는 비반과 실시간으로 상의하며 단조했다.

대장장이 신 헥세타이아의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 받은 그리드와 검신 비반의 합작품.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완성돼야 옳았다.

한데 점차로 모양을 갖춰가는 검의 형태는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일반적인 규격에서조차 어긋났다.

과연 저게 검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형태가 불완전했다.

마치 쪼개진 듯한 칼날.

차가운 광채를 흩뿌리는 칼날이 손잡이에서부터 유려하게 솟아나는가 싶더니 도중에 뚝 끊긴다.

그리드와 비반이 고심 끝에 완성시킨 검은, 처음부터 부러진 형태였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습니까? 제련 과정에서 기껏 각인 된 검기가 무용해지는데.”

“완벽하네.”

그리드가 걱정했지만 정작 비반의 표정은 밝았다.

반으로 동강나 짧은 대검.

칼날의 끝이 직선을 이루는 그것을 쥐고 휘둘러보면서 몹시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숫제 과거로 회귀한 듯하다.

반으로 뚝 잘린 검을 좋다고 허허 웃으며 휘두르는 모습이 꼭 치매 걸린 검사 같았다.

<부러진 검>

등급:유일

내구력:9,200~??? 공격력:13,060~???

그리드가 완성 된 검의 정보를 재차 확인했다.

드래곤 웨폰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력치가 처참하다.

형태부터가 불완전한 까닭이다.

저건 온전한 검의 판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사용한 재료가 고룡의 뼈와 비늘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부가 옵션도 전무했다.

명백한 실패작.

지나가는 개가 봐도 실패작임을 알아 볼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리드도 슬슬 현실을 받아들였다.

‘저건 실패작 따위가 아닌 보검 중의 보검이다.’

부러진 검의 진가는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아이템 정보 아래로 이어지는 설명에 대놓고 명시되어 있다.

유일신 그리드가 검신 비반과 심상합일을 이룬 상태로 만든 검입니다.

염룡 트라우카의 의념이 잔재하는 뼈와 비늘, 검신 비반의 의념을 재료로 삼아 검기의 불꽃으로 단련했습니다.

검신 비반의 의지에 호응하는 검으로, 간격과 위력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간격과 위력을 가늠할 수 없다.

간격도, 위력도 비반의 의지를 따르니까.

역천과 닮았다.

하지만 다르다.

역천은 그리드가 종이나 횡으로 휘두를 때, 찌를 때, 곧추세울 때 등등.

상황에 따라 최적화 된 형태를 갖추는 식으로 그리드의 의지에 호응한다.

반면 부러진 검은 비반이 원하는 순간에 커졌다.

그게 전부다.

훨씬 단순하되 도리어 예측이 안 되는 것이다.

“손에 쥐어지는 감각이 무척 좋군. 저절로 감싸지는 듯해.”

사용자(비반)의 의지로 칼날을 완성시키는 검이다.

제작자인 그리드 입장에선 아무래도 손잡이에 가장 큰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기뻐하는 비반의 모습에 보람을 느낀 그리드가 재촉했다.

“한 번 휘둘러보시죠. 성능을 시험해 보셔야하지 않습니까?”

“자네 앞에서? 자칫 눈에 차지 않을까 싶어 두려운데...”

“그럴 리가요.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그럼 사양 않고.”

비반이 광야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향이다.

거리는 500미터.

그것을 향해서, 비반은 부러진 검을 조준했다.

한쪽 눈을 감거나 호흡을 고르진 않았지만, 총을 조준할 때의 유라와 어렴풋이 닮았다.

순간.

번쩍!

부러진 검이 늘어났다.

한 순간 거검의 형상을 갖췄다.

500미터 바깥에 서있던 바위는 이미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리드가 한 발 늦게 눈치 챘다.

비반의 표적은 바위 하나가 아니었다.

바위의 수 킬로미터 뒤편 곳곳에 늘어선 또 다른 바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쪼개지고, 파괴되어 증명했다.

‘미친.’

비반의 검은 용의 목이 아닌 몸통을 통째로 베리라.

깨닫는 그리드가 전율하는 사이.

비반은 몇 번이고 다시 검을 찌르고, 휘둘러보고 있었다.

광야가 통째로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을 연출했다.

하지만 비반이 휘두르는 검은 정확히 표적만을 베었다.

경로 상에 그리드가 서있어도 그리드를 해치지 않았다.

검신의 역량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비반의 거대한 검은, 오로지 비반이 원하는 대상만 베었다.

“이건 숫제 무적이 된 기분인데...”

부러진 검의 성능을 몇 번이고 실험해본 비반이 중얼거렸다.

“이 검을 휘두르고도 진다? 그건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는 격이라고 볼 수 있겠어. 물론 절대자를 상대로 싸울 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렇죠. 베이지 않는 자들 또한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요.”

“...이 경지에 이르고서 보니 자네가 상정하는 적들의 수준이 너무 높군. 자네는 당최 무슨 수로 견뎌온 겐가?”

조심스레 묻는 비반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스쳤다.

지옥과 천상의 절대자들.

그리드는 그들의 수준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 준비해왔다.

보통의 정신력으론 견딜 수 없었을 일이다.

도망치지 않은 게 용했다.

그리드가 웃었다.

“당신 같은 분들이 계시기에 견딜 수 있었죠.”

절망적인 현실 속에 존재하는 희망.

그것은, 그리드에게 있어선 인연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 많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며 버텨왔다.

“이제부턴 더욱 더 의지하겠습니다.”

“그러게. 밥값 하겠네.”

두 사람의 손뼉이 마주쳤다.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손들이 마주치는 소리는, 의외로 작았다.

***

그리드와 비반이 나란히 현실로 돌아왔다.

갑옷까지 만든 후였다.

비반의 염룡 갑옷은 용살의 기운과 검기의 색이 섞여 짙은 잿빛이었다. 하야테의 새하얀 갑옷과 비교해서 아름다움은 덜했지만 위압감이 있었다.

다소 마르고 유약해 보이는 하야테와 달리, 비반은 승모근과 어깨가 워낙 발달해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하구려.”

두 사람을 마중하는 하야테의 시선이 부러진 검과 염룡의 갑옷을 번갈아 살폈다.

심상세계에서 만든 작품.

본래라면 현실로 반출하는 게 불가능한 개념이다.

하지만 의념 제작에 의해서 물질화 되었고 이렇듯 보란 듯이 현실에 존재하게 됐다.

이쯤 되면 그리드에겐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싶었다.

“별 일 없으셨습니까?”

그리드가 주변을 경계하며 물었다.

악룡 번헬리어가 바로 건너편 방에 있는 상황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란 것을 잊어선 안 됐다.

“마침 번헬리어의 낌새가 변했던 참이오.”

‘역시.’

안 그래도 날카로운 그리드의 눈매가 솟구쳤다.

상대는 악룡이다. 사악한 용이란 말이다.

갑자기 어떤 흑심을 품고 돌변했을 확률이 아주 높다.

“마력이 거세게 진동하고 있군. 대마법의 전조인가?”

마찬가지로 수상한 낌새를 느낀 비반이 부러진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드도, 비반도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동시에.

쾅!

방문이 허락도 없이 벌컥 열렸다.

두려움을 모르는, 정확히는 알 필요가 없는 침략자가 발생시킨 소란이다.

어느새 깊은 밤.

복도를 가득 채운 어둠 속에 번헬리어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시체의 것처럼 창백해져서 도드라졌다.

“노크하는 법을 모르나 보지? 하기야 고고한 절대자가 하찮은 인간의 법도를 배울 필요 따윈 없었겠지.”

그리드가 번헬리어의 태도를 지적했다.

오전과 비교해서 급격히 상승한 아군의 전력을 가늠하면서다.

당장 번헬리어가 난동을 피울 경우.

물론 힘들겠지만 제압은 가능하다.

관건은 놓치지 않는 것.

‘비반 님이 부러진 검의 기능을 잘만 활용하면 놈의 도주를 막는 게 가능할 수도...’

그리드가 계산하면서 역천을 뽑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법도라.”

그리드의 눈이 맹금류의 것과 닮았다면 번헬리어의 눈은 뱀의 것과 닮았다.

한층 더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운 눈으로 세 사람을 응시하던 번헬리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배워나가도록 하지.”

“...?”

기괴한 헛소리였다.

한 순간 당황해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그리드가 아차 하는 그때.

“너희는 반용족이라는 버러지들의 기원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나는 먼 과거에 놈들을 나의 한 방울 피로 탄생시켰노라 밝힌 적 있다만, 그건 순전히 거짓이다. 무척 수치스러운 나머지 숨겨온 진실을 이제 와서 밝히자면... 그 버러지들은 내가 인간 암컷과 교미해서 얻은 결과다.”

번헬리어의 헛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드의 머리 위로 연속해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맥락 없는 대화를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네 입장을 헤아렸다는 듯이, 번헬리어가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인간 암컷을 사랑했었다. 영원히 묻고 싶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너희의 신뢰를 얻기 위해 고백하마.”

“...”

“나는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단 말이다. 인간 암컷을 사랑했던 나의 본능이 증거다. 너희가 신뢰해도 좋을 단 하나의 드래곤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하야테의 집무실에서 고뇌를 거듭하던 번헬리어는 도중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날이 저물 무렵.

즉, 번헬리어의 입장에선 찰나보다 짧은 채 반나절이 안 되는 시간 동안 하야테와 비반의 기운이 급격히 강해진 탓이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그 정도로 비현실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이다.

지금 막 두 눈으로 확인했다.

하야테와 비반이 몸에 두른 갑옷, 그리고 비반이 손에 쥔 괴상한 검.

저것들 전부가 번헬리어에게 위협이었다.

이대론 정말 명줄이 끊길 수도 있다는 걱정을 품어야만 했다.

스스로 탑에 잡혀온 선택을 후회하게 됐다.

하여 고뇌를 끝냈다.

스스로 쌓아온 업보 탓에 지옥에서도, 천상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내가 의지할 대상은 지상의 인간들뿐이란 사실을 상기하면서, 번헬리어는 선언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동료다.”

“...”

진짜?

...근데 왜 제멋대로?

그리드가 황당해하는 것과 별개로 번헬리어의 선언엔 드문 진심이 담겨있었다.

대기 중에 흐르기 시작한 용언의 기운이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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