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6화
‘저런... 저런 미친 템빨...’
처음에는 33개였던 마법의 수정구가 이제 단 7개 남았다.
바알의 파편 26개가 소멸했다는 뜻.
바알이 노릴 만한 표적을 예측하고 훼방을 놓은 템빨단의 영향력이 몹시 컸다.
십공신과 크라우젤, 지발, 휴렌트, 하스터 등의 최상위 랭커들.
표적이 된 초월자들과 협력한 그들의 실력은 과거와 전혀 달랐다.
로제가 기억하는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다.
각자 자신의 특징에 맞는 드래곤 웨폰을 위시한 덕분이다.
아수라의 신체 일부분을 대동한 바알의 파편들이 ‘물리적인 위력’을 감당 못하고 소멸하기 일쑤였다.
파삭!
또 하나의 수정구가 깨지기 직전이다.
죽어가는 파편의 시야를 투영하는 수정구에 카일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뇌전사 카일.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표적으로 지목됐던 놈마저 확보하지 못하게 됐단 말이다.
놈의 곁에 선 반트너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옅은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아그너스와 카일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해도 탱커 따위가 단독으로 레이드를...’
방어력과 비례하는 공격력을 발휘했던 반트너의 드래곤 실드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로제가 이내 꽈드득, 이를 갈았다.
그리드를 제외하고 나보다 강한 플레이어로 누가 있을까.
고민해 볼 때면 늘 선두에 떠올랐던 십공신들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이다.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이번에 바알의 파편을 사냥한 업적 보상만 해도 상당할 테니까.
“지옥달... 지옥달이라도 투영했으면 지금보단 상황이 낫지 않았을까요?”
로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왕좌에 앉아있는 바알의 눈치를 살피면서다.
성격 같아선 왜 지옥달을 사용하지 않은 거냐며 별에 별 쌍욕을 다 때려 박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이제 바알은 단순히 두려워해야할 대상이 아닌 상관이었다.
지난 9년 동안 몇 번이고 소속을 바꿔온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동아줄이다.
이쯤 되면 썩은 동아줄이 아닐까 싶었지만.
“지옥달의 달빛이 파편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고강하게 만들어줬을 텐데요. 그럼 임무 성공 확률이 크게 올랐을 거 아니에요? 한데 어찌하여 지상에 지옥달을 투영하지 않으신 거죠?”
혹시,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바알의 전성기는 이미 끝나버린 건가?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그녀에게 바알이 말했다.
“무의미했으니까.”
몹시 상냥한 어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그의 흑발이 어깨 위로 늘어졌다.
“만약 내가 지상에 지옥달을 투영시켰다면, 그리드가 직접 반응했을 테지. 파편들의 임무 성공률은 완전히 제로가 됐을 거다.”
마침.
잿빛의 기둥이 또 하나 바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새롭게 깨진 수정구가 없음에도.
바알의 파편이 아닌 다른 것이 죽어 바알에게 흡수됐단 의미였다.
바알이 표적으로 삼았던 초월자 중 하나가 죽은 것이다.
템빨단도 전지전능하진 않았다.지상의 모든 초월자를 파악하고 교류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초월자를 죽이고 힘을 흡수하는 건 덤에 불과해.”
바알이 몸을 일으켰다.
쿠자라크.
템빨단이 아닌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활약 중인 그의 모습이 흥미롭다는 듯이 수정구 앞으로 다가와 살펴본다.
“내가 파편을 운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보의 수집에 있다.”
말을 잇는 바알의 머리 위로 또 다시 잿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이번엔 파편의 죽음이 만든 기둥이었다.
쿠자라크와 쥬앙데르크, 그리고 챈슬러에게 살해당한.
놈의 기억과 경험을 음미하듯 눈 감은 채 감상하던 바알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쿠자라크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새 흥미를 잃은 느낌.
로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시...?”
“그래, 나는 파편을 통해서 학습한다. 파편을 해친 인간들의 힘과 기술은 내게 있어서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지.”
바알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히 강해진다.
죽은 자들의 힘을 흡수하는 권능 덕분이다.
숨만 쉬어도 강해진다는 표현을 써도 손색이 없었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본래라면 강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바알은 태도를 바꾸었다.
쉬지 않고 들려오는 그리드의 서사시를 접하면서였다.
급기야 고룡들과도 교류를 맺기 시작한 놈.
드래곤 나이트라는 신분을 고려해보면, 필시 전보다 엄청난 속도로 고강해지고 있을 터였다.
바알은 애써 무시했던 감정을 떠올렸다.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도전해왔던 그리드.
놈을 체험했을 당시 느꼈던 어렴풋한 위기감을 몇 번이고 되새기고 부풀린 끝에 경각심을 품었다.
그때부터였다.
타고난 권능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바알은 시간을 압축시켜 성장한 그리드의 배경에 존재하는 ‘경험’들에 주목했다.
영감을 얻었다.
자신 역시 경험을 쌓아 학습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파편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식을 잘게 쪼개 만드는 분신들.
놈들에게 나를 대신해서 경험과 지식을 쌓게 만들고 모조리 흡수, 연구해서 더 빠르게 힘을 축적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이 그 과정이다.
“그리드가 믿고 있는 드래곤 웨폰조차 나의 살가죽을 꿰뚫진 못하게 될 거다.”
뿌득, 뿌드드득...
바알이 몸에 두른 마기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얼개를 이루며 보다 단단해져갔다.
파편들을 벤 드래곤 웨폰의 위력을 무력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꽈드드득!!
손과 손톱의 모양과 성질 또한 변하는 중이다.
파편들이 꿰뚫지 못했던 드래곤 아머를 손쉽게 찢을 수 있을 형태로.
며칠이 지나 이 변화가 완료됐을 때.
바알은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경계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될 터였다.
그리드가 새롭게 만든 드래곤 웨폰들의 수준이 황혼과 비교해서 딱히 뛰어나지 않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그리드... 네가 나를 회귀시키는구나.’
아주 오래 전.
바알에게도 적수가 있었다.
같은 핏줄인 베리아체다.
특정한 조건을 갖출 때마다 바알에게도 큰 위협으로 다가왔던 그녀는, 지옥에서 추방당하기 직전까지 바알에게 늘 궁리하고 노력하게끔 만들었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을 뿐이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와의 경쟁이 바알을 빠르게 발전시켰었다.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될 거다.’
미소 짓는 바알이 일으키는 힘의 파동이 무지막지했다.
마치 전성기를 맞이한 느낌.
종전과 비교할 수가 없었기에 로제는 전율을 느꼈다.
***
“신을 뵈러 왔네.”
황도 라인하르트가 술렁였다.
결사 비반의 방문 여파다.
수백 명의 기사가 도열해서 예의를 갖췄고 버선발로 뛰어나온 라우엘이 그를 직접 맞이했다.
“실례지만 제가 감히 용무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비반을 그리드에게 안내하는 길.
라우엘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비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내가 신께 말씀을 전하면 어차피 그대 또한 내용을 알게 될 것 아닌가?”
비반은 라우엘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내심 뿌듯해하는 라우엘에게 그가 설명했다.
“아수라의 머리라는 것을 만났네. 범상치가 않아서 신께 미리 언질을 드려야겠다고 판단했네.”
“머리...”
아수라의 어깨와 다리, 몸통과 둔부 등.
지난 며칠 동안 템빨단원들이 조우한 아수라의 파편들은 아수라의 손과 비교했을 때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하여 머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하던 라우엘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놈이 보게 해서도, 듣게 해서도, 말하게 해서도 안 될 게야.”
비반의 말이 무척 의미심장했으니까.
마침 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장간 입구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던 랜디가 방실방실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햇살 아래에서 뒹굴거리기만 할 뿐, 두 사람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노에와는 태도가 많이 다른 것이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비반이 그대로 대장간에 입장했다.
잠시 작업을 멈춘 그리드가 그를 반겼다.
반면 칸은 비반의 방문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일반 공격을 광역 공격으로 만드는 드래곤 웨폰.
그리드가 요구하는 작품을 개발하기 위해 몇 날 밤을 샜다가 방금 전에야 막 잠든 까닭이다.
애초에 비반과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평범한 전설의 기감으론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비반의 방문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드가 누군가와 도란거리고 있단 사실만 자각한 채 꿈결을 유지했다.
“...신격 없는 신.”
팔자 좋은 칸과 달리 헥세타이아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검신 비반.
풍문으로만 접해온 인간 검사는, 명백히 정점에 오른 존재였다.
공백의 신격과 별개로 신으로 추앙 받는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비반도 헥세타이아에게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오랫동안 한 분야에 종사하며 정점에 올랐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주제 파악 못하고 날뛰는 파편 하나가 있던데. 비반 님께서 나서시는 낌새를 읽고 관망했습니다. 부러진 검의 성능은 제대로 테스트 해보셨습니까?”
“검을 뽑을 가치도 없는 상대였네. 다만 아수라의 머리라는 게 상당히 위협적이었기에 내 미리 알려주러 찾아왔다네.”
“머리...? 어땠기에 그러십니까?”
“아수라의 다른 신체 부위들은 ‘가까이 닿는 것’의 기운을 소멸시킨다고 했었지? 한데 머리는 단순히 보는 것과 듣는 것만으로 기운을 소멸시키더군. 만약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판단되면 말로 법칙을 만들어서 확실하게 기운을 소멸시켰고. 마치 용언처럼 말일세.”
“그건... 말만 들어서는 가히 절대신의 권능과 비견되는구려. 정녕 바알이 그런 걸 만들었단 말이오?”
비반과 눈짓으로 인사를 교환했던 헥세타이아가 다소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끼어들었다.
비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만들어진 경위까지야 나는 모르지. 아무튼 내 말에 과장은 없소.”
“...어찌 보면 당연한 겁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바알의 목적은 새로운 악신을 만드는 거였어요. 바알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탄과 달리 진정한 악신으로 야탄보다 도리어 나은 존재죠. 처음부터 절대신급으로 설계하고 만든 겁니다.”
그리드는 지옥달을 투영했던 붉은 살덩이를 떠올렸다.
지옥에 떨어진 무수한 원혼을 담았던 그것은 필시 초월적인 개념이었다. 절대신을 생산하는 재료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납득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지옥 원정... 생각보다 힘들 걸세. 주의하게.”
경고하는 비반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리드는 바알과 직접 싸워봤다.
수십 번을 싸우고 대부분 패배했다.
바알의 목숨이 무한하단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서사시가 없었다면 레이드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대상이란 말이다.
심호흡한 그리드가 대장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마안족 왕을 데려와줘.
아수라의 강력한 권능을 억제할 만한 수단.
드래곤의 용언이 있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공교롭게도 그리드가 동료로 맞이한 드래곤은 용언이 약했으니까.
그러므로 그리드는 또 다른 강력한 권능에 의지할 계획을 짰다.
그리드와 바알.
지상과 지옥의 절대자들은 이미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