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37화 (1,736/1,794)

템빨 86권 - 7화

“내게 낮과 밤의 다름을 알려주신 위대한 자여. 나는 오늘 또한 당신께서 내려주신 햇살 아래서 하루를 시작하였고, 총천연색의 꽃밭에 맺힌 이슬을 통해 생명의 탄생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소.”

포리오르떼르포로노피 뜨노 지오르떼베.

글자수 제한에 걸려 생략될 정도로 긴 마안족 왕의 이름에는 많은 뜻이 담겨있다.

한 종족의 수장답게 지혜롭고 덕이 높길 바라는 염원에서였다.

결론적으로 마안족 왕은 이름값을 했다.

‘눈’을 뜨게 만들어준 그리드에게 은혜를 잊지 않았고, 그리드를 본받아 아랫사람들에게 어진 왕이 되었으니까.

다만 그리드를 만날 때마다 너무 거창한 인사를 건넨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드를 매번 민망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리드가 신이 된 이후부터는 더더욱.

“뭐라고 지껄이는 게지?”

2등신 대두 종족.

드워프보다 작고, 드워프와 달리 귀여운 마안족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비반이 눈살을 찌푸리며 갸웃거렸다.

“아침 인사하는 겁니다.”

짧게 설명한 그리드가 마안족 왕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간 잘 지냈어, 친구?”

“물론이오. 세계의 이치에 따라 매번 새로운 시련을 겪을지언정 과거보단 낫소. 당신께서 저주를 풀어주신 이후부터 나의 삶은 늘 찬란하였소. 당신의 부름을 받고, 당신께서 내려주신 길을 걸어 무사히 당신 앞에 당도한 지금 이 순간에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느끼는 바이오.”

더 이상 맹인이 아니게 된 덕분에 살기 편하다. 길을 보면서 걸을 수도 있고.

대충 그런 뜻으로 해석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군. 아무튼 친구를 부른 이유는 마안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인데, 협력해줄 수 있을까?”

마안족 왕의 마안은 특히 강력하다.

‘보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광선을 무한히 쏘아댔으니까.

강제로 눈을 감은 채 소중한 모든 것을 외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마안족 왕에게 마안은 저주인 것이다.

그에게 다시 눈을 떠달라고 부탁하려니 그리드의 마음이 불편했다.

“당연히.”

마안족 왕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가 에테르 안경을 써서 마안을 봉인한 것은.

단지 ‘일상’을 영위하기 위함일 뿐, 힘을 포기했다는 의미는 아니었기에.

일행은 장소를 옮겼다.

라인하르트 인근에서 가장 고난이도를 자랑하는 사냥터.

개벽 이후 생긴 호수다.

타이탄의 거울 산맥마냥 수면에 비추는 생물의 모습을 복제, 환상체를 생산해댔다.

환상체의 기본 능력치가 워낙 높은 까닭에 일반인은 이곳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템빨단에서도 최상위 전력이나 사냥터로 이용하는 형편.

덕분에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 그리드와 마안족 왕이 마주보고 섰다.

드래곤 아머를 무장한 그리드가 말했다.

“준비 됐어. 이제 안경을 벗어도 좋아.”

“좋소. 저 하늘의 별빛처럼 수없이 많은 운명들이 평소처럼 나를 방해할지언정. 나는 당신의 뜻에 따라 나의 피와 영혼에 새겨진 저주를 공개하여 세계에 아로새기겠소.”

둥글고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고즈넉한 표정을 짓고 대답하는 마안족 왕의 모습이 라우엘을 전율시켰다.

동시에.

번쩍!

에테르 안경을 벗은 마안족 왕의 커다란 두 눈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파동을 감당 못한 주변의 수풀이 모조리 뿌리 채 뽑혀나갔고 커다란 암석들도 균열을 일으켰다.

[<절대방어>를 활성화시킵니다. 초당 5만의 마나가 소모됩니다.]

[<절대방어>의 효과로 피해를 면역합니다.]

요란한 임팩트와 별개로 그리드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비반 역시 진즉부터 실망한 기색을 표출하고 있었다.

‘손색이 큰데.’

비반이 생각할 때였다.

저벅.

섬광이 뿜어내는 소음 사이로 희미한 발소리가 울렸다.

그리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소리였다.

“...?!”

왜 굳이 물러선 거지?

의아해하던 비반이 한 발 늦게 눈치 챘다.

마안족 왕의 눈에서 쏘아지는 파괴 광선.

저것의 ‘미는 힘’이 무지막지한 압력으로 치환되고 있다.

물대포를 떠올리면 쉽다.

쉬지 않고 쏘아지는 물대포.

대부분의 공격 마법, 심지어 드래곤의 브레스조차 단발성에 그치는 것과 달리 마안족 왕의 파괴 광선은 계속해서 쏘아진다는 강점을 지녔다.

쿠궁! 쿠구구구구궁!!

그리드 주변의 모든 것이 허물어져갔다.

과거의 마안족 왕이 맹인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이유다.

‘당연한 거지만 절대방어도 만능은 아니군.’

파괴 광선에 짓눌린 채 검을 뽑아본 그리드가 생각했다.

검을 뽑는데 무려 0.1초가 걸렸다. 평소보다 몇 배는 느린 속도.

‘하긴 절대방어가 만능이었으면 드래곤하고 비비지도 못했겠지.’

이 세계에 무적은 없다.

그러므로 서로 협력해야하는 것이다...

[<절대방어>의 활성화를 멈춥니다.]

템빨계에서 그리드는 여러 제약을 물리친다.

무한한 마나로 절대방어를 영원히 활성화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마치 드래곤처럼.

하지만 이 상태론 실험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드는 절대방어 스킬을 비활성화시켰다.

즉시 변화가 일어났다.

[1,2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마안족 왕의 파괴 광선이 그리드에게 데미지를 입히기 시작했다.

[81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905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66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2,678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타격 횟수 무한의 도트 딜이 빠르게 누적됐다.

그리드의 마법 저항력이 워낙 높은 까닭에 개별 데미지는 굉장히 낮게 들어왔지만 좌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데미지가 들어오는 속도가 원체 빨랐다. 초당 5회에서 8회의 데미지가 들어왔는데, 아주 가끔 치명타나 약점 공격이 뜬다는 점을 감안해야했다.

게다가 매 타격이 마법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디버프를 유발하며 일정 수준 중첩됐다.

그리드는 면역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데미지가 아니다.

그리드가 마안족 왕의 마안에 주목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 광선의 빛과 열기가 ‘머리’의 시야를 다소 협소하게 만들 것 같은데.”

“음... 공감하는 바일세. 거기에 더해서 청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겠군.”

파괴 광선은 밝은 빛과 열기, 그리고 엄청난 소음을 동반했다.

아수라의 머리가 보고, 듣는 것을 훼방 놓을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대상의 시야와 청력을 차단하는 마법이나 스킬은 세상에 여러 개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을 파괴 광선처럼 쉬지 않고 남발할 순 없었다.

“이론상 말을 못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광선을 주둥이에 쏴버리면 되니까.”

실제로 그리드의 목소리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광선의 압력에 성대를 포함한 장기가 계속 흔들리는 탓이다.

만약 광선이 작정하고 그리드의 입을 노린다면, 압력 탓에 입을 벌리기도 힘들어질 터였다.

“확실히...”

보고, 듣고, 말하는 것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아수라의 머리.

놈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것에 있어서 마안족 왕의 마안은 탁월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반이 납득했고,

“됐어. 이제 안경 써. 고생했어.”

연신 굉음을 토하며 쏘아지던 파괴 광선이 뚝 멎었다.

벗어뒀던 에테르 안경을 다시 쓴 마안족 왕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억눌러온 힘을 마음껏 뿜어댄 덕분이다.

‘오줌을 참았다가 쌌을 때의 느낌하고 비슷한 건가?’

상당히 실례되는 생각을 품는 그리드에게 비반이 물어보았다.

“저자의 마안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은 알겠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겐가? 저자의 신체능력에 엄청난 하자가 있어 보이는데.”

마안족은 마족 중에서도 유독 강력한 편이다.

순전히 마안 덕분이다.

마안이 없는 마안족?

어린애와 같았다.

어쩌면 인간 어린이보다 약할 수도 있었다. 신체 밸런스가 워낙 엉망인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으니까.

단순한 달리기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다.

“아수라의 신체들이 드래곤 웨폰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나 또한 접했네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가 만든 드래곤 웨폰이 강력했기 때문일세. 아수라가 약한 게 아니야. 신체 능력도 최소 초월자에 근접하네. 심지어 부위별로 나뉜 상태인데도.”

마안족 왕의 파괴 광선이 제아무리 강력해봤자 지속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광선을 쏘는 순간.

마안족 왕은 즉시 적들의 표적이 되어 순식간에 살해당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마안족 왕의 마안을 활용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적인 문제가 많았다.

마안족 왕 역시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옥에 도착해 안경을 벗는 순간 목이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혹시 눈알을 뽑아도 마안의 효과는 유지되는 건가?”

궁리해보던 비반이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마안족 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그리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중한 벗의 눈알을 뽑으라뇨? 끔찍한 이야기는 자제해주십시오.”

“귀중한 벗이었나? 음... 농담이었네.”

“여전히 짓궂으시군요. 잠시만요.”

휴대용 용광로와 모루, 망치를 꺼낸 그리드가 뭔가를 주섬주섬 만들기 시작했다.

손잡이다.

얼마 전 반트너에게 만들어준 드래곤 실드의 손잡이와 꼭 닮은.

“...?”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성큼성큼 마안족 왕에게 다가간 그리드가 마안족 왕의 옷깃에 손잡이를 걸었다.

“...??”

사람들의 의문이 커졌다.

손잡이에 꿰어진 채 번쩍 들어 올려진 마안족 왕이 특히 당황하며 혼란해했다.

그를 한 손에 들고 다양한 포즈로 움직여본 그리드가 이내 설명을 시작했다.

“반트너라고 방패를 아주 잘 쓰는 친구가 있습니다. 심지어 2개의 방패를 무장하고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탁월한데...”

“...?”

“...??”

설명이 시작되자 도리어 의문을 키우는 사람들.

라우엘만 어떤 사실을 눈치 채고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하는 가운데 그리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에게 방패처럼 활용해보라고 하죠.”

“...뭘?”

“보시다시피 마안족 왕을요. 지오르떼, 친구는 그저 눈만 뜨고 있으면 돼. 반트너가 알아서 조준점을 맞춰줄 거야. 아, 물론 지켜주기도 할거고.”

“...”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멀쩡한 얼굴로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그리드를 다들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옥 한복판에서 방패처럼 휘두르겠다라... 차라리 눈만 따로 뽑아가는 게 덜 가혹할 것 같은데.”

곧 정신을 차린 비반이 혀를 내두르는 그때.

“송구하오만...”

마안족 왕이 입을 열었다.

“...지오르떼베요. 내 이름은.”

얼떨결에 맡게 된 무지막지한 임무를 차마 거절하진 못하고.

이름이라도 정정해 달라며 간접적으로 서운함을 토로했다.

“앞으론 편하게 지오라고 부르도록 하지. 그편이 서로 친밀하지 않겠어?”

“...”

마안족 왕은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지만, 수많은 말들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그리드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 컸다.

감히 거스를 수가 없었다.

“뜻대로 하시오...”

결국 마안족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수라의 머리에 대항할 수단은 마안족 왕으로 결정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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