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58화 (1,757/1,794)

템빨 87권 - 6화

“아니 무슨...”

이벨린과 코크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부러진 검.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그것을 뽑아 쥔 비반이 광속으로 접근 중인 아수라의 파편을 조준한다 싶었을 때.

두 사람의 시야는 ‘벽’에 가로막혔다.

진짜로 벽이었다.

갑자기 환상처럼 나타난 벽이 두 사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어서 지진이 일어나고 벽이 걷히자.

두 사람은 어느새 곤죽이 된 전장의 마물들이 잿빛으로 산화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수천 마리의 마물이 막말로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아수라의 파편 또한 사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해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뒤늦게 진실을 눈치 챈 두 사람이 비반의 부러진 검에 시선을 고정시킨 순간이었다.

“과연. 베이지 않는군.”

비반이 재차 검으로 하늘을 조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설마 싶었던 일이 벌어졌다.

이벨린과 코크의 시야를 가로막은 벽의 정체.

급격히 커진 비반의 검이었다.

검기로 세계를 가르는 검성의 궁극기, 우주 검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느낌.

표적이 된 아수라의 파편이 홈런 맞은 공처럼 멀찍이 날아갔고 전장은 반으로 갈라졌다. 충격에 휩쓸린 악마와 마물들은 곤죽이 되거나 절벽으로 떨어져서 죽었다.

“하핫! 검신도 템빨이네?”

방금 생긴 절벽에 매달린 아스카가 낄낄 거렸다. 자칫 죽을 뻔하고도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도리어 비반에게 호감을 품은 눈치였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네.’

그리드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긴 하다.

이들 또한 그렇겠지.

힐끗, 가면 쓴 천사들의 눈치를 살피던 이벨린이 눈을 부릅떴다.

“뒤요! 뒤!”

일행이 등지고 선 지하 입구.

그곳에서 슬라임 같은 살덩이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매우 수상쩍다. 지하에서 유라 일행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붉은 살덩이의 일부가 아닐까 싶었다.

펑!

이벨린의 검에 담긴 파괴력은 엄청났다. 일격으로 살덩이를 산산조각 냈다.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는 살점을 살핀 비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이하군. 기척을 못 느꼈어. 저놈은 끈질기고.”

일행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조금 전 날아갔던 아수라의 파편이 돌아오고 있었다.

반드시 지하로 진입하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방법을 바꾸는 편이 좋겠는데.”

비반이 부러진 검을 거뒀다.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떡하니 가로막고 서서 광속으로 다가오는 아수라의 파편을 노려봤다.

곧.

콰작!!

도착한 아수라의 파편이 비반의 양손에 붙잡혔다.

두 팔은 왼쪽 손에, 하체는 오른쪽 손에.

끝으로 몸통은 비반의 겨드랑이에 끼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

다소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조각난 신체들이 날아다닌다는 것부터 비정상적이긴 했지만.

아무튼 아수라의 팔과 다리는 보통의 성인남성보다 배는 컸는데 비반은 그걸 양손으로 거머쥔 것이다.

막말로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꽈득! 뿌드드득!!

목과 이마에 핏대를 세운 비반이 아수라의 관절을 모조리 접어버렸다.

무시무시한 괴력.

기이하게 꺾인 팔과 다리로 제 몸통을 감싸게 된 아수라의 파편을 방석마냥 깔고 앉은 그가 이벨린에게 말했다.

“어디 묶어놓을 곳 없나 찾아보게.”

“...옙!”

이벨린과 코크가 얼떨결에 충성까지 하면서 대답했다.

비반이 보여준 모습들을 보고 군기가 바짝 든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스카도 잠자코 두 사람을 따라갔다.

금색 가면의 천사 역시 일행을 쫓았다.

비반이 덩그러니 남은 은색 가면의 사내에게 말했다.

“눈빛이 살벌하군. 기껏 쓴 가면이 무색하게도 초조함이 드러나.”

“...하하, 저를 전혀 못 알아보는 눈치라 흥분하게 되네요.”

“천사로 종족을 바꾸고 가면까지 뒤집어썼는데 쉽게 알아보면 그게 도리어 문제 아닌가?”

“그렇겠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

방금 전 산산 조각났던 살점들이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었다.

암벽과 암벽 사이를 지나 비반이 깔고 앉은 아수라에게 다가갔다.

기척은 없었다.

생물이 아니니까.

끼긱.

오직 아수라만이 살점에 반응했다.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꺾인 채 제 몸통을 묶은 팔을 필사적으로 움직인 놈이 손가락 하나를 간신히 펼쳤다.

“잠자코 있어라.”

소란을 느낀 비반이 둔부에 힘을 싣는 순간이었다.

슥.

간신히 펼쳐진 아수라의 손가락이 살점과 맞닿았다.

동시에.

콰아아아아앙!!

강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기의 폭발이다.

비반이 깔고 앉은 아수라가 발원지였다.

폭발에 휩쓸린 비반과 은색 가면의 천사가 멀찍이 밀려났다.

“쿨럭, 쿨럭!!”

황급히 고개를 든 천사가 상황을 살폈다.

자욱하게 번진 연기 너머로 천천히 일어서는 인영이 보였다.

머리 없는 인영이다.

“이런...!”

조각나 있던 아수라의 팔과 몸통, 하반신이 하나로 붙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한 가면의 천사가 기수식을 취함과 동시에 입에서 피를 뿜었다.

아수라의 손이 그의 몸통을 꿰뚫고 나와 있었다.

“흡!”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진 천사의 귓가에서 비반의 기합이 울렸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비반이 부러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작!

부러진 검이 아수라의 손에 붙잡혀 멈췄다.

소용없었다.

검이 부피를 키운 순간 아수라는 그것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베이며 상공으로 솟구쳤다.

천사를 부축한 비반이 지하의 입구로 되돌아가서 섰다.

“결합해버렸나...? 그래서 뭐 어쩔 텐가?”

절대자.

국가, 시대 따위의 개념을 넘어 한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위계다.

신(神)을 마주했다고 해서 위축 될 이유가 하등 없었다.

“...”

붉은 살덩이를 섭취하고 형상을 갖춘 악신 아수라는 조용했다.

머리가 없으니 당연하다.

주둥이는커녕 콧구멍도 없어 숨소리조차 못 낸다.

그저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점차로 커지는 심장의 고동 소리만을 울릴 뿐.

“...즐거워하는 건가?”

바알의 염원과 노력에서 비롯된 악신.

놈의 광기가 소란을 듣고 달려온 이벨린 일행을 질리게 만들었다.

생김새부터 기괴해서 공포를 빠르게 전염시켰다.

“이 녀석의 위력을 제대로 확인해볼 기회로군.”

비반은 도리어 웃었다.

아수라 이상으로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

무적은 없다.

그리드의 경험이 알리는 진실이다.

뱀파이어 도시의 재앙으로 군림했던 엘핀스톤, 최초로 지상을 침략했던 대악마 벨리알, 동대륙의 양반들과 제국의 공작들, 대천사와 무신 제라툴, 그리고 드래곤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결코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적’을 수십 차례 만나왔다.

그들 모두 지금은 어떤가?

죽어 없어졌거나 그리드와 대적하지 않는다.

그리드는 바알 또한 같은 운명이 될 거라고 믿었다.

지옥의 정점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농락해온 놈.

필시 강적이었으나 그리드 본인도 꿀리는 부분이 없다.

그리드 개인의 무력은 바알의 무력을 넘어섰고, 그리드가 이끌고 온 원정대의 화력 또한 바알이 소집하는 악마 대군의 화력을 압도한다.

대량으로 생산하고 강화해온 드래곤 웨폰과 아머 덕분이었다.

‘내가 이겨.’

막연한 자신감 따위가 아닌 철저한 분석을 토대로 내린 결론.

그리드의 이번 원정은 반드시 성공해야 옳다.

애초에 확신이 있어서 실행에 옮겼다.

바알이 생각 이상으로 강해진 것은 계산 밖의 일이었지만 변수조차 못 되었다.

그리드 역시 실시간으로 강해지며 무마시켰기에.

[죽어라...!]

반쯤 주저앉은 바알이 위협적으로 외쳤다.

아니, 단순히 위협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적인 위험이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마력 광선을 쏴댔으니까.

“으익...!”

선회해서 아슬아슬하게 광선을 피한 네펠리나가 비명을 삼켰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만약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였다면 반쯤 우는 얼굴이었을 거다.

“미안해, 네펠리나!”

그리드가 네펠리나의 뿔을 꺾어 그녀의 비행경로를 유도했다.

막 새로 쏘아진 광선을 향해 직진시켰다.

“히익!”

네펠리나의 날갯짓이 잠시 멈췄다.

잠시뿐이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날개를 다시 펄럭였다.

넝마가 되는 걸 감수하고 돌진했다.

그리드가 그걸 바랐으니까.

오해다.

그리드가 바라는 건 네펠리나를 다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바알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광선과 닿는 순간 회(回)로 쳐내며 네펠리나의 안전을 책임졌다.

‘20초 남았다.’

네펠리나는 헤츨링이다.

일시적으로 한계를 초월했을 뿐, 본래 그녀에겐 드래곤 나이트를 활성화시킬 자격 자체가 없다.

그리고 한계를 초월하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뽕을 뽑아야했다.

[크아아아악...!]

그리드의 접근을 허용한 바알이 재차 비명을 질렀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고통.

바알은 그리드가 휘둘러대는 저 검이 몹시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죄 없는 피해자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것인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렇다.

미식룡 레이더스와 염룡 트라우카,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와 적야의 대도, 그리고 그리드와 칸.

다수의 절대자와 초월자가 협력해서 탄생시킨 역천의 위력은 바알에게 약자의 입장을 이해시켰다.

그간 바알이 저질러온 패악질이 얼마나 잔혹했던 것인지 깨닫게 만들었다.

바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나보다 강하다.’

드래곤.

레베카조차 통제하지 못한 생물을 저딴 식으로 이용해서 힘으로 삼는 괴물이 탄생할 줄이야.

[드래곤...! 나이트!!]

바알의 분노 깃든 외침이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드래곤 피어와 닮았다.

단순히 큰 소리와 마력의 결합으로 만든 강력한 술법이었다.

네펠리나의 작은 몸이 추락할 듯 흔들리다가 급기야 핑그르르 돌았고 그리드는 표적을 놓치고 말았다.

바알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까지다...!]

그리드와 네펠리나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가까워진 바알의 손이 만든 그림자 탓이었다.

붙잡히는 순간 으스러진다.

직감한 네펠리나가 이를 악 물고 속도를 올렸지만 느렸다.

균형을 잃은 짧은 시간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마력으로 달궈진 바알의 뜨거운 손이 그녀의 비늘에 닿았다.

끝났다...

생각하는 네펠리나가 보는 풍경이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바알이 걸을 때마다 무너진 지면 탓에 형성 된 협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광야가 펼쳐졌다.

제법 먼 거리에 바알의 뒷모습이 보였다.

딱딱.

이빨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템빨골이다.

그리드가 소환한 템빨골이 네펠리나의 위치를 바꿨다.

공간 왜곡.

이동 마법과는 다르다.

이동 마법을 차단하는 결계에 어느 정도 저항이 가능했다.

그나마 바알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 덕분이었다.

바알이 망자로부터 빼앗아 체득한 기술들 대부분이 무력화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멀리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브 공이 요구한 마력이 많았던 탓에...””

“아니, 오히려 잘 했어.”

촤르르르르르륵!!

각자 무기를 쥔 수백 자루의 갓 핸드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창칼의 날개다.

동시에 그리드는 원덕구를 사용했다.

사람들의 염원을 모았다.

어느덧 3번이나 사용한 또 하나의 무덤 또한 활성화시켰다.

끝으로 6융합 검무를 전개했다.

지옥의 제약 탓에 재기능을 못하는 신장이었지만, 차원이 주는 제약 효과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돌아오는 쿨타임까지 막진 못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용의 등에 올라 창칼의 날개를 펼친 신.

무구와 마법의 비를 내리며 춤사위를 펼친다.

메마르지 않는 마력을 분출하며 저항하는 거악의 손목을 베어 떨어뜨리고, 심장까지 도달해 역천을 꽂아 넣었다.

지옥의 하늘을 끌어내리는 일격이다.

[아... 흐으으으...]

바알이 신음했다.

죽음을 극복해온 존재가.

황망한 표정으로 뒷걸음쳤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쿠우우우우웅...

급기야 쓰러진 바알이 연신 피를 토했다.

피는 금세 호수를, 강물을 이루고 황량한 대지를 적셔갔다.

무수한 잿빛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