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8권 - 2화
템빨제국은 사하란과 다르다.
제국의 뜻을 굳이 타국에 강요하지 않았다.
다른 국가 입장에선 거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애초에 거역해서도 안 됐다.
대륙의 모든 국가가 경제적으로 제국에 의존하고 있었으니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렇게 됐다.
라우엘이 만든 결과다.
라우엘은 무력이 아닌 돈과 권력으로 타국에 목줄을 채워왔다.
은밀하고 집요하게.
하늘이 무너져도 제국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설계했다.
누군가의 원한을 샀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타국의 왕족들은 라우엘을 곱게 보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세상 모든 왕족이 그리드를 섬겼다.
스스로의 의지로 조공을 바쳤다.
제국에 거역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무조건적인 호의와 지지를 보냈다.
오죽하면 라우엘에게 감사를 느낄 정도였다.
“라우엘 재상. 나의 왕국을 제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줘서 고맙소. 덕분에 그 누구의 반발도 사지 않고 마음껏 제국을 섬길 수 있어 기쁘오.”
실제로 은밀하게 인사를 건네는 왕들이 많았다.
“...”
성대한 결혼식이 끝난 이후의 연회장.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아 자신의 호위를 강화했던 라우엘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내가 원성이 아닌 감사를 받는 시대가 올 줄이야.
그리드의 영향력이 실감 됐다.
모든 인류가 그리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음이 크게 와닿았다.
‘기쁘고 뿌듯하긴 한데 어색하군.’
정확히 말하면 민망했다.
사람들의 호의가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적국의 포로 수만 명을 생매장시켰을 때조차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술잔을 기울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라우엘을 곁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바사라가 조심스레 말했다.
“앞으로는 조금 느긋해지셔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너그러워져라.
감히 그런 표현은 쓰지 못했다.
자칫 라우엘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으니까.
바사라는 라우엘과 정 반대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엘을 존중했다.
라우엘 덕분에 지금의 제국이 있음을 여실히 느껴왔으니까.
“...”
라우엘은 영리한 인물이다.
바사라의 말에 어떤 뜻과 배려가 담겼는지 즉시 파악했다.
제국과 그리드의 발전을 위해 타인을 당연하게 억압하고 이용해왔던 삶.
앞으로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연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면면을 지켜보며 고민해봤다.
한참 후.
술잔을 몇 번이나 더 비운 뒤에야 라우엘은 대답했다.
“그렇군요. 휴가를 좀 다녀와도 좋겠어요.”
제국과 그리드는 한층 더 견고해졌다.
다소 무리하게 느껴졌던 그리드의 지옥 원정이 성공적으로 완료 된 시점부터 ‘불멸’, ‘영원’ 등의 수식어를 붙여도 좋게 됐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흐르던.
그리드의 위업은 폄훼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기억되고 칭송되리라.
즉, 앞으로 템빨단이 주의해야할 점은 하나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막는 것.
‘레베카.’
미소 짓는 바사라에게 건배로 화답한 라우엘이 고개를 들었다.
높이 솟은 천장.
그 너머로 존재할 하늘과 아스가르드를 떠올렸다.
아스가르드를 지배하는 절대자가 여태껏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키고 재창조시킨 역사를 되새겼다.
그렇다.
템빨단이 경계해야할 대상은 이제 아스가르드 하나뿐이다.
“...?”
진지한 얼굴로 고찰하던 라우엘이 문득 귀를 쫑긋거렸다.
템빨단이 모인 자리에서 흥미로운 대화가 들려온 까닭이다.
“무한의 탑?”
“약해.”
“그럼...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탑?”
탑?
무한히 강해져?
곁에 앉은 귀빈들을 뒤로하고 자리를 비우기 힘들었던 라우엘이 폰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 거죠?
-포식이족발이 새로운 궁극기를 배웠다네. 끝없이 등반 가능한 탑을 건설할 수 있게 됐다나.
-...?
쉽게 이해가 안 됐다.
이럴 땐 당사자에게 묻는 게 상책이다.
라우엘의 귓속말을 받은 포식이불족발이 설명했다.
-맞네. 탑을 세울 수 있게 됐어. 심지어 인스턴스 던전 형식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던전 건설은 면적을 크게 잡아먹는 탓에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는데, 그 제약들을 극복하게 된 거지.
-좋은 소식이군요. 그런데 무한히 강해진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아... 이게 좀 골 때리는 게, 등반할 수 있는 층수에 제한이 없더군. 각 층마다 존재하는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할 수만 있다면 입장자는 이론상 수천 층, 수만 층의 탑을 등반할 수도 있어.
-보스 몬스터가 보상을 주고요?
-당연하지. 내가 여태껏 만든 수련용 던전 모두 합당한 보상을 주지 않았나? 그것과 같아. 단 차이점이 있다면, 10층 단위의 보스만 ‘외부로 반출 가능한’ 보상을 주고, 그 외의 보스들은 ‘탑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버프’를 보상으로 준다네.
-버프... 그래서 무한히 강해진다?
-그렇지.
-등반 실패 시 페널티는요?
-사망하거나 스스로의 의지로 퇴장할 경우 48시간 동안 재입장 불가. 그게 전부일세. 사망해도 경험치나 아이템을 손실하진 않는다고 해.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인스턴스 던전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었다.
아직은 포식이불족발 본인조차 보상의 수위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페널티는 없는데 보상을 준다는 것 자체가 무조건 이득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템빨단원들과 제국의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 전부 탑을 등반시키는 게 좋아보였다.
마침 극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라가면 강해지는 탑. 이건 어때?”
“오... 좋은데? 어그로 제대로 끌릴 듯?”
“극검 뭐냐? 작명 센스 왜 이렇게 좋아?”
‘역시 대박 작가.’
덩달아 감탄하던 라우엘이 얼굴을 확 구겼다.
저딴 작명이 좋게 느껴지다니?
이거 설마 그리드 님의 영향인가?
그리드 님의 작명 센스에 시달려온 여파로 덩달아 수준이 낮아진 건가?
라우엘이 회의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포식이불족발과 템빨단원들은 전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라우엘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외부인도 탑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하실 셈인 겁니까?
-아무래도 돈 벌이가 기가 막힐 테니까... 물론 자네와 그리드에게 먼저 허락을 받을 생각이었네. 안 된다면 안 할 거야.
-아뇨. 뜻대로 하시죠.
천상은 지옥과 다르다.
완전한 하나의 집단이었다.
만약 충돌할 경우 대규모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인마대전이라는 선례에서 배웠듯이, 템빨단만 강해져선 안 됐다.
시대가 그렇다.
-단, 탑을 세울 위치는 제가 지정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결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우엘은 탑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하물며 층수가 끝없이 올라가는 탑.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아스가르드까지 닿지 않을까?
물론 아스가르드는 지상과 별개의 차원이다.
물리적으로 도달하는 게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단 생각은 안 들었다.
그리드가 드래곤을 타고 천상까지 오른 전력이 있으니까.
‘고룡의 조언을 들을 수만 있다면... 탑의 위치에 따라서 아스가르드에 닿지 않을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탑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져야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즉, 누군가가 탑을 충분히 등반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보통 이런 구조의 탑은 난이도 또한 무한정 올라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막말로 기대를 건다고 해서 손해를 볼 건 없었기에.
게다가 조언을 구할 고룡도 있었다.
악룡 번헬리어.
인류의 대적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가장 먼저 인류의 편에 서준 고룡.
물론 번헬리어는 인류에게 별 관심이 없다.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드와 협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계기일 뿐이고, 최근에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심지어 오늘 그리드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고 정체를 숨겨 소란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반용족과도 교류하는 듯했다.
정작 반용족 왕은 기뻐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지만.
‘뭐가 됐든 좋아.’
템빨단은 축복이다.
그리드를 보고 모인 인재들의 면면이 하나 같이 대단해서 한 번씩 크게 대박을 터뜨려 준다.
덕분에 한동안 또 바빠지겠군...
흑염룡을 피어 올리며 웃는 라우엘이 바사라 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밤.
마리로즈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영생을 사는 그녀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은 무용한 것이기에.
애초에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관 속에서 지냈다.
낮과 밤을 딱히 구분하지 않았고 의식한 적이 없다.
오늘은 달랐다.
낮의 결혼식에서 그리드의 손길을 느낀 순간 직감했다.
오늘 밤은 몹시 고달플 거라고.
그간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온갖 것들을 한꺼번에 체험하고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것임을 알았다.
긴장감, 기대감, 두려움.
상상해본 적 없는 감정들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하나 같이 절대자의 명경지수를 흐트러뜨리는 감정이었다.
덕분에 마리로즈는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실감했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존재.
그는 늘 이런 감정들에 시달려왔을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데 지금에 이르렀다.
미약한 한 명의 인간으로 시작해, 종국에는 나를 지배하려 든다...
펑. 펑펑펑펑펑...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지는 밤하늘을 등지고 선 마리로즈가 천천히 옷을 벗었다.
여태껏 그 누구도 감히 침범하지 못했던 영역들이 그리드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를까 두렵구나.”
마리로즈는 타인을 모른다.
자신이 남들과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새삼 걱정됐다.
내가 남들과 달라 그리드의 혐오를 살까 두려웠다.
넋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던 그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릅니다.”
“...”
마리로즈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속으론 동요했다.
아주 희미하게 떨리는 그녀의 짙은 속눈썹을 일일이 세어본 그리드가 미소 지었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마리로즈의 나신은 이하 생략.
그리드의 다짐이 흔들렸다.
앞으로 ‘정기’가 모일 때까지 대사를 치르지 않겠다던 다짐 말이다.
‘하지만 무조건 참아야 돼.’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낮의 사건을 떠올렸다.
자신의 손길에 당황했던 마리로즈의 반응을 되새겼다.
절대자에게도 통하는 자신의 손재주를 믿었다.
대사를 치르지 않고 만족시키겠다...
결단을 내린 그가 상황에 집중했다.
손끝의 감각을 살려 마리로즈를 위한 봉사를 시작했다.
“아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사로잡힌 마리로즈가 그리드를 끌어안았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열기를 내뿜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리드의 피부에 닿은 여파로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리드는 불안해졌다.
마리로즈가 이대로 녹아 사라져버릴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강하게 움켜쥐어 붉은 흔적을 남겼다. 겨드랑이 사이로 두 팔을 집어넣고 강하게 속박했다. 뱀처럼 얽 이하생략.
“...이 정도론 부족하단다.”
어지럽다.
정기고 나발이고 모든 걸 쏟아 붓고 싶다.
마리로즈를 만족시킬수록 오히려 자신이 현혹되어가던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마리로즈가 자신의 배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어느새?
절대자의 감각이 상황을 읽지 못했다.
몹시 당황한 덕분에 도리어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마리로즈의 이하 생략.
‘참아야 돼. 참아야 된다.’
그렇게.
이하 생략하면서 그리드의 노력은 밤새 이어졌다.
마치 여러 명의 바알과 싸우는 느낌.
체력과 정신력이 무지막지하게 소모됐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어졌다.
급기야 땀에 흠뻑 젖은 몸을 마리로즈의 등에 밀착시켰을 때.
[<태초부터 존재해온 핵>이 당신의 강력한 염원을 감지합니다.]
[소망을 이루시겠습니까?]
세상을 구원한 대가로 얻은 아이템이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