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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91화 (1,790/1,794)

템빨 88권 - 18화

네바르탄과 번헬리어의 마력에 침식당한 하늘은 몹시 어두웠다.

달빛마저 차단시켜 한치 앞도 안 보였고 생태계가 실시간으로 영향을 받았다.

마치 바알이 왜곡시킨 지옥을 닮아간다.

그것을,

““도망칠 셈인가?””

대천사 메타트론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눈과 고리에서 쏘아지는 광선의 궤적을 따라 어둠이 갈라지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달빛과 별빛, 그리고 메타트론의 신성을 난반사시키는 온갖 자연과 물질들에 의해서 세계는 다시금 찬란해졌다.

“...강하군.”

비반이 읊조렸다.

감탄에 가깝다.

인간의 신분으로 신이라 불리는 사내.

평생을 연마해온 검술 하나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는 타인의 무재에 섣불리 만족하지 못하는 안목을 지녔으나, 메타트론을 상대로는 인색하게 굴지 못했다.

하야테 또한 마찬가지였다.

18쌍의 날개를 다각도로 운용하며 드래곤의 거체를 몰아붙이는 천사의 무위를 유심히 관찰하던 그가 끝내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대적할 자가 드물 듯하오.”

“동의합니다. 절대자 중에서도 상위의 실력자로 분류되겠지요.”

[날개가 많은 탓인지 움직임이 기묘하고 날랜 건 사실이다만 그게 전부다. 저 날개 많은 놈은 네바르탄 앞에선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 냈던 머저리야. 자신을 구해준 내 은혜를 공포에 사로잡혀 배신했지.]

“리파엘과 비교해도 몇 수 위로 보입니다. 물론 리파엘의 실력을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되겠지요. 생각해 볼수록 아스가르드의 저력은 과연 만만찮군요.”

“태초신 중 으뜸이 다스리는 차원이니 합당하오. 그리드 님께선 진즉부터 예측하셨겠지.”

[너희들의 동료이자 위대한 고룡의 호의를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한 놈이란 말이다. 예의와 도리를 모르는 사악하고 저열한 놈이 저대로 설치도록 놔둘 셈이냐?]

“...”

번헬리어를 무시한 채 대화를 나누던 하야테와 비반이 결국 번헬리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야테는 동정심을, 비반은 혐오감을 표출하면서다.

“한데 귀하는 어찌하여 네바르탄에게 싸움을 걸었소?”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하야테 공께선 네바르탄과 싸운 이유를 여쭤보셨다.”

[내가 이길 줄 알았다고 설명하지 않았느냐?]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그럼 또 무슨 이유가 있어야하지? 내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날개 많은 놈이 나를 돕고 너희의 지원이 조금만 빨랐어도 지금쯤 네바르탄의 심장은 내 위 속에서 소화되고 있었을 터. 그로 인해 그리드의 권위는 훨씬 더 강력해졌을 테고 무신도 두 번 다신 섣불리 그리드를 덮치지 못했을 거다.]

“...”

역시 상종해선 좋을 게 없다.

번헬리어에게 실망하던 비반의 표정이 도중에 바뀌었다.

사악하고 이기적인 눈앞의 악룡은, 어쩌면 ‘그리드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보려던 게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론 도리어 방해가 됐다만... 뭐, 서툰 건 어쩔 수 없겠지.’

대체적으로 드래곤이란.

평생을 홀로 살아가는 생물이다.

게다가 압도적인 능력과 힘을 지닌 까닭에 자신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인식한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배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지금의 번헬리어처럼.

“귀하가 아쉬워하는 이유는 알겠소.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쳤다 한들 네바르탄을 어쩌진 못했을 게요.”

무의미한 아쉬움에 집착해봤자 괜한 손해다.

번헬리어에게 현실을 주지시킨 하야테가 화제를 바꿨다.

그의 시선은 메타트론과 치열한 공방을 나누고 있는 크란벨에게 꽂혀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네바르탄의 브레스를 막아낸 저자의 저력이 놀라울 따름이오. 크란벨 저자는 정녕 굴절룡과 관계되어 있는 거요?”

굴절룡은 실존할 수도 있다...

천년 동안 여러 드래곤을 관찰해온 하야테는 추측해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리드를 통해서 적야의 대도가 무엇을 수집해왔는지 알게 됐고, 굴절룡의 실존을 거의 확신하게 됐다.

급기야 오늘.

상위룡 중에서도 고매한 성품과 힘을 지녔고, 종종 투명해지는 비늘을 몸에 두른 크란벨이 네바르탄의 브레스 수십 발을 무력화시키는 광경을 실제로 목격해버렸다.

안 그래도 그 비늘의 특성 탓에 굴절룡의 후손이 아닐까 싶었던 크란벨의 활약은 하야테에게 합리적인 의심을 안겼다.

정녕 굴절룡의 후손이란 말인가.

크란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하야테에게 번헬리어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당연히 관계가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란벨이라는 개체가 아닌 실버 드래곤이라는 종(種)이 신의 의지를 계승했다고 본다.]

번헬리어 또한.

네바르탄처럼 굴절룡을 신이라 칭했다.

굴절룡의 존재를 몹시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굴절룡이 정녕 실존하는 거였나...”

비반의 표정이 묘했다.

인류가 멸망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나타나 돕는다는 신이 하필 용들의 신이라는 점에 심경이 복잡해진 것이다.

멸망의 끝자락에서야 출몰하는 탓에 기록으로 남지 않고,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사람은 알 도리가 없는 최후의 구원자는, 어떤 심경으로 인간들을 도와온 걸까.

‘그러고 보니 드래곤은 의외로 인간을 함부로 해치지 않지. 그러한 습성은 굴절룡의 태도에서 기인한 건가.’

아니, 드래곤들이 인간을 돕고자 염원한 까닭에 굴절룡이 탄생했다고 봐야 옳지 않은가?

드래곤들이 인간을 돕고자 염원한다?

그럴 리가?

온갖 의문에 휩싸이는 비반의 심상을 엿본 번헬리어가 설명을 덧붙였다.

[용신을 탄생시킨 건 드래곤의 염원이 아니라 인간의 염원이라고 생각한다. 종말을 앞둔 인간들의 눈에는 위대하고 완전한 드래곤이야말로 최후의 희망으로 비쳤을 테고 마지막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합했을 테니까. 뭐,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귀하 또한 굴절룡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적은 것이오?”

[너희들 인간은 레베카에 의해 창조되고도 레베카를 모르는데 내가 무슨 수로 신을 헤아릴까. 다른 고룡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는... 신을 그저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세계의 멸망조차 고룡에겐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다.

야탄이 세계를 멸망시킨다 한들 그들은 건재한 까닭이다.

고룡의 위계다.

인간의 관점에선 그들이 간혹 부족해 보인다 한들 훼손되지 않는 위계였다.

번헬리어가 여전히 콧대 높은 이유다.

[아무튼 기회다. 날개 많은 놈의 날개를 모조리 찢어 죽이고 크란벨의 심장을 집어삼키도록 하지.]

“...염치가 없나?”

번헬리어를 바라보는 비반의 눈빛이 재차 변했다.

제 목숨을 구해준 크란벨을 사냥하겠노라 선언하는 그를 곱게 보지 못했다.

[인간식 유머인가? 방금 그 말투, 그리드를 닮았는데.]

“지금의 널 보면 누구라도 비슷하게 말했을 것 같다만.”

[설마 도리를 따지는 거라면 관둬라. 크란벨이 네바르탄의 브레스를 막은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니까.]

단언한 번헬리어가 사냥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광활한 하늘을 전장으로 삼은 천사와 드래곤이 세상을 휘황찬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은색의 브레스와 금색의 섬광이 쉬지 않고 교차했다.

“이대로 좌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지상이 입는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당장은 크란벨과 메타트론 둘 모두 브레스와 빔의 각도를 조절하여 민간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었지만, 그건 아직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곧 수세에 몰릴 크란벨이 민간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게 될 경우 그의 브레스는 망설임을 버릴 터였다.

애초에 드래곤과 천사다.

둘 모두 구제 대상이다.

하야테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크란벨을 돕도록 하겠소.”

[뭐라? 진심이냐? 드래곤을 주적으로 삼는 탑의 결사가, 심지어 용살자가 드래곤을 돕겠다고?]

“...”

자신 또한 드래곤이란 사실을 잊은 건가?

비반이 번헬리어를 황당하게 쳐다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어째선지 미소를 머금은 하야테는 침착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크란벨이 그리드 님께 호의를 품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오.”

더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

비반이 즉시 검을 뽑았다.

부러진 검.

아직 아무런 전조도 드러내지 않았건만, 메타트론과 크란벨이 잠시 전투를 멈추고 비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 신의 기척...””

[심상에서 단련한 드래곤 웨폰인가.]

염룡 트라우카의 기운, 검신 비반의 심상, 유일신 그리드의 기술과 신성.

부러진 검의 얼개다.

존재감이 무지막지했다.

메타트론의 의념이 비반과 하야테에게 쏟아졌다.

-나는 그리드 신이 나와 닮았음을 안다. 그대들이 그리드 신의 종인 이상 내게도 존경과 호의를 보여야 옳을 터다.

그리드에게 품은 호감을 잘못 표현했다.

대천사라는 종의 한계다.

그들은 인간을 당연히 아래로 여기기에.

“누가 누굴 닮았다고? 건방진 놈이군.”

혀를 찬 비반이 부러진 검을 조준했다. 잘린 검날의 끝이 메타트론을 겨냥하도록 만들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한다.’

1대1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대.

18쌍의 날개를 지닌 천사는 상위룡을 웃도는 전투력을 지녔다.

하야테와 함께일지언정 대적함에 있어서 여유를 부려선 안 됐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세계를 양분하는 거대한 칼날이 솟구쳤다.

부피가 즉 속도이고 위력이다.

곧바로 메타트론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큭...””

회피하기엔 면적이 너무 컸다.

하여 막았건만 방어가 무용했다.

이전 세계들과는 전혀 다른 지상의 전력.

이 모든 게 그리드의 영향력이다.

새삼 전율한 메타트론이 힐을 사용했다.

그러자 반으로 잘린 몸이 즉시 온전한 형태를 되찾았다.

회복, 수복, 재생 등의 ‘되돌리는’ 개념이 아니다.

메타트론은 둘이 됐다.

반으로 갈라진 몸이 각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결과다.

[천사 따위가 가장 까다로운 권능을 지녔군.]

번헬리어가 침음했다.

증식이라는 결과를 만든 메타트론의 회복은 완전을 추구하는 삼위일체의 섭리에 따른 것.

완전함으로 완성 된 기적이다.

아스가르드의 신들 중에서도 레베카, 쥬다르, 도미니언쯤이나 보여줄 법한 수준의 기적 말이다.

[저걸 죽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숨 쉴 틈 없이 반복해서 소멸시키는 것.

즉, 실현 불가다.

네바르탄마냥 브레스를 수십 개 중첩시키지 않는 이상 저것을 죽일 도리가 없다. 어중간하게 공격해봐야 더 큰 힘을 실어주는 꼴밖에 안 된다.

실제로.

콰르르릉!!

둘이 된 메타트론은 각자 비반과 크란벨을 덮치고 있었다.

둘이 됐으니 당연하게 둘의 역할을 수행하는 거였다.

2배로 늘어난 빛의 고리들이 폭격 범위를 엄청나게 확장시켜서 신성의 폭우가 쏟아졌다.

비반과 크란벨 뿐만 아니라 번헬리어와 하야테를 동시에 견제했다.

아스가르드의 비밀병기쯤 되는가.

번헬리어가 메타트론을 잘못 건드렸다고 뒤늦게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차라라라랑...

번헬리어의 거대한 눈동자에 검기의 산란이 포착됐다.

하나의 근원에서 피어난 날카로운 기와 기가 맞부딪치길 반복하며 범위와 궤도를 불규칙하게 확산시키는 광경이 몹시 위협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저것에 베이면 죽는다...

고룡에게 죽음을 상기시키는 힘.

그러나 아름다워서 시선을 사로잡는 그것의 정체, 용살의 기운이다.

쿠화하하하하하하하하학!!

인류 최초의 절대자.

그리드에게 감명을 받아 두려움을 극복한 용살자의 검에선 망설임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언젠가 제라툴을 베었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고 날카로웠다.

하물며 비반과 마찬가지로 그리드가 만든 드래곤 웨폰을 무장한 상태다.

[그렇...군... 그대가... 치우의 염원을 부추긴... 원흉 중 하나...]

두 명이 된 메타트론의 몸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메아리처럼 맴도는 의념만을 남기고 두 줄기 빛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 광경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던 번헬리어가 천천히 나섰다.

압도적인 고룡의 자태를 만천하에 뽐냈다.

[다음은 크란벨 네놈 차례다.]

“관둬.”

“그래.”

고룡의 자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장에 나타난 그리드를 발견한 번헬리어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까닭이다.

그리드의 표정은 편치 못했다.

조금 전 일격의 대가로 양팔이 넝마가 된 하야테를 걱정했다.

인간 신체의 한계.

그리드가 장담컨대 하야테가 전력을 낸다는 건 자결한다는 뜻과 같았다.

“연달아 강적들과 겨룬 상태에서 비반 공의 검에 베여 크게 약해진 상태였소. 덕분에 쉽게 물리쳤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메타트론이 순순히 물러난 이유는 그리드의 기척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니었고 현장의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걱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동료도 얻었으니까.

무려 제라툴 말이다.

“크란벨, 상황은 대충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큰 신세를 졌군요. 감사합니다.”

사건이 일단락 됐다.

마무리를 잘 짓는 일만 남았다.

그리드는 우선 크란벨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하야테를 섬길 때처럼 진정어린 존경을 담았다.

번헬리어의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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