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뭐라고?”
주환의 물음에 여기사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냐고 물었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느냐니, 무슨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
여기사의 다그침을 들으며 주환은 서로 대화를 할 때마다 시계의 파형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내 쪽의 말도 확실하게 번역해서 들려주는 것 같네.’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한 주환은 여기사를 진정시키려 했다.
“좀 전정해 봐.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지?”
“만약 내가 당신의 적이라면 좀비들에게서 당신을 구해 주었을 리 없잖아?”
“나를 구해 줬다고?”
여기사의 목소리가 살짝 수그러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부러진 검을 주환에게 겨눈 채였다.
주환은 언덕의 아래쪽에 널브러져 있는 좀비들을 가리켰다.
“달려오던 좀비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넘어졌을 리는 없잖아. 대부분 다 내가 쏴서 죽인 거야.”
주환의 설명에 여기사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주환의 설명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이상한 복장의 남자가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물건이 불을 뿜자 굉음과 함께 갑자기 좀비들이 우르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과 죽은 좀비들 사이의 인과 관계가 분명했기에 여기사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녀는 적어도 주환이 적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저 좀비들을 당신이 쓰러뜨린 건가?”
“맞아.”
“어떤 방법을 쓴 거지?”
여기사의 물음에 주환은 자신의 돌격 소총을 보여 주었다.
“이걸로 쏴서 맞힌 거지.”
“쐈다?”
여기사는 주환이 들고 있는 돌격 소총을 눈여겨보았다.
“쐈다면 발사형 무기인데 활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군. 쇠뇌와는 비슷한 것 같은데.”
여기사의 말을 들으며 주환은 지금 자신이 매우 다른 문화권으로 와버린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나는 공간 이동을 한 게 아니라 아예 차원 이동을 해버린 건가?’
“아무튼 정말로 당신이 나를 구해준 거라면.”
여기사는 건틀릿을 낀 주먹을 흉갑에 대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그 친절과 용기에 감사를 표한다.”
“그럴 필요 없어.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주환의 대답에 여기사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기사인가?”
“뭐? 난 기사가 아니야.”
주환의 대답에 여기사는 그의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기사처럼 명예를 아는 이로군. 우선 당신이 내 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렇지만 당신의 정체는 확실히 알아야겠어.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그 무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들이니까.”
달리 방법이 없었던 주환은 자신의 이름부터 밝혔다.
“내 이름은 김주환이야. 나는…….”
이어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 그리고 그곳이 갑자기 좀비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좀비들에게서 도망치다가 갑자기 나타난 빛을 통과했더니 이곳으로 와버렸다는 사실.
여기사는 주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흥미롭군.”
그녀의 반응은 단순했다.
“못 믿는 거야?”
“아니.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최소한 당신은 허언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기본적으로 당신이 내가 접한 적이 없는 신기한 기술을 가진 것도 사실이니.”
“믿어 주니 다행이네.”
“우선 당신이 말한 그 세계는 나로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주환, 당신이 통과했다는 그 빛은 차원문의 일종이라고 봐야겠지.”
“차원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말이다.”
“나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 여기서는 그런 차원문이란 게 흔한 거야?”
주환의 물음에 여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흔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가끔 차원 이동자들이 이 세계 저 세계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법사들이 다른 세상에서 이것저것 이상한 것들을 소환하기도 하고.”
‘마법사, 소환…….’
여기사가 입에 담는 단어들을 통해서 주환은 서서히 이곳의 문화를 파악해 나갔다.
“당신의 소개를 들었으니 이제는 내 소개를 해야겠지. 나는 데스티나. 플로네시아 국왕군에 소속된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다.”
자신을 데스티나라고 소개한 여기사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이라고 정정하도록 하지.”
“데스티나라고 부르면 되는 거야?”
“원한다면.”
“플로네시아 국왕군이라면 이곳은 플로네시아라는 나라인 거고?”
“그렇다. 좀비들이 창궐하여 나라가 사분오열되었지만 가장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지.”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곳도 내가 살던 곳과 비슷한 처지에 있나 보네.”
“안타깝지만 그렇다.”
데스티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주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주환,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녀의 물음에 주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우선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는 해야겠는데.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
주환의 대답을 듣던 데스티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우선 같이 움직이는 것은 어떠한가?”
“너랑?”
“그렇다. 당신이 위험한 이라면 나는 벌써 죽었겠지. 하지만 주환, 당신은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아까와 같은 위험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듯한데.”
데스티나의 제안을 들은 주환은 잠시 고민했다.
고민을 거듭해도 주환으로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녀의 제안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나로서도 이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결정된 것 같군. 그럼 움직이도록 하지.”
두 사람이 합의에 이르자 그들은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언덕을 내려온 두 사람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오솔길을 찾은 뒤 그곳을 통해 이동했다.
가는 길에 좀비들을 만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동했기에 두 사람의 이동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데스티나의 뒤를 따르고 있던 주환은 그녀에게 물었다.
“가고 있는 목적지는 있는 거야?”
“이 근처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거다. 휴식을 위해서 마을을 찾아가다가 아까 좀비들을 마주쳤던 거고.”
“그렇구나. 그런데 또 궁금한 게 있는데.”
“뭔가?”
“그런데 이쪽 세계는 좀비들 세상이 돼버린 거야?”
“정확한 건 나도 알지 못한다. 전쟁 때문에 대부분 변방에 나가 있었으니까.”
“최근까지 전쟁 중이었나 보지?”
“그렇다. 안타깝게도 말이지.”
주환이 무언가를 더 질문하려고 하는 순간에 데스티나가 손을 들어서 주환을 제지했다.
“왜?”
주환이 묻자 데스티나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있다. 좀비들일지도 몰라.”
그러면서 데스티나는 풀숲 뒤에 숨은 뒤에 몸을 낮추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 뒤를 따라가는 주환.
어느 정도 움직이자 데스티나는 걸음을 멈춘다.
“저걸 봐.”
주환이 고개를 내밀자 숲의 이곳저곳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고 있는 좀비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그들을 발견하지는 못한 듯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비 척이듯 걷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
주환이 묻자 데스티나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우회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우회해도 또 좀비들을 만날 수도 있는 일이지.”
“더구나 편한 길을 버리고 험한 길로 우회하면 결국 이동이 늦어져서 숲에서 야영해야 할 수도 있고 말이야.”
주환의 의견을 들으며 데스티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숫자가 많지 않으니 확실히 정리하고 가는 것도 좋겠군.”
“우선은 무기가 문제인데.”
주환이 무기를 지적하자 데스티나는 자신의 검집에서 부러진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부러지긴 했지만 몇 번 정도는 더 쓸 수 있다. 그리고.”
데스티나가 주환이 가지고 있는 돌격 소총을 바라보았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무기가 있다면 쉽게 놈들을 돌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남용은 할 수 없어.”
주환의 말대로였다.
주환이 가지고 있는 돌격 소총과 권총은 강력한 무기지만 그가 가진 탄약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쪽 세계에서 효과적으로 탄약을 수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원리는 다르지만, 이 무기는 활과 비슷한 면이 있어. 화살이 다 떨어지면 사용하지 못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데스티나의 물음에 주환은 자신의 허리춤에서 군용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이거 하나면 충분해.”
주환은 나이프로 무장한 뒤 데스티나와 잠시 작전을 의논했다.
짧은 의논이 끝나자 주환은 곧바로 몸을 낮추고 움직였다.
주환이 앞서서 움직이자 데스티나가 그 뒤를 따랐다.
숨을 죽인 채 좀비들의 근처에 도착한 주환은 근처의 나무에 기대며 준비를 한 뒤 가까이 있는 좀비의 뒤로 다가갔다.
좀비는 주환의 존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황.
좀비의 뒤를 잡은 주환은 바로 나이프를 좀비의 목에 찔렀다.
“칵!”
나이프가 목에 박힌 좀비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바로 옆에 있던 다른 좀비가 곧바로 주환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환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좀비의 품으로 뛰어들며 나이프로 좀비의 목을 그어 버렸다.
목에 큰 자상이 생긴 좀비는 목에서 체액을 내뿜으며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주환이 두 마리의 좀비를 순식간에 제압하자 데스티나도 행동을 개시했다.
그녀는 검을 뽑으며 주환을 스쳐 지나가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좀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주환과 데스티나의 존재를 눈치챈 세 마리의 좀비들이 우르르 그녀 쪽으로 돌진했다.
데스티나는 앞쪽에서 달려드는 좀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건틀릿을 끼고 있는 그녀의 주먹은 철퇴나 다름이 없었기에 그 주먹은 달려오던 좀비의 얼굴을 그야말로 뭉개 버렸다.
데스티나는 반대쪽 손으로 들고 있는 부러진 검을 휘둘러 두 번째 좀비의 목을 날려 버렸다.
남은 좀비는 단 한 마리.
데스티나는 쓰러져 가는 두 번째 좀비의 몸을 밀치며 마지막 좀비를 향해서 검을 내리쳤다.
으직.
그녀가 휘두른 검의 날은 좀비의 빗장뼈 쪽을 파고들며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드륵.
그때, 그녀는 검신이 좀비의 뼈에 걸린 것을 느꼈다.
검에 날이 나가고 절반으로 부러진 상태였기에 좀비를 두 동강 낼 만큼 무겁지 않았다.
“카악!”
마지막 좀비는 데스티나를 깨물기 위해서 입을 벌린 채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때.
푹!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던 좀비의 머리가 뒤쪽으로 크게 튕겨 날아갔다.
데스티나는 흔들리고 있는 좀비의 이마 한가운데 박혀 있는 군용 나이프를 발견했다.
이마의 한가운데에 나이프가 박힌 좀비는 비틀거리더니 뒤쪽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데스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이프 투척 자세를 취하고 있는 주환이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데스티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네.”
방금 나이프를 던져 좀비를 죽인 주환은 살짝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 언덕에서 좀비들을 상대할 때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던 그 느낌.
그가 방금 나이프를 던지기 직전 그 감각이 그의 몸에 다시 한번 감돌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에서 이번에도 희미한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또 이게 작동을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