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마지막 글까지 읽은 주환과 데스티나는 서로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이는 데스티나였다.
“이 루카라는 아이. 아직 살아 있을 것 같은가?”
“이 글에 의하면 꽤 똑똑한 아이인 데다가 잘 숨어 있는 것 같으니 살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만약에 살아 있다면…….”
“살아 있다면 구조해야 한다. 아이 혼자서 아까 같은 괴물이 어슬렁거리는 마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은 위험하니까.”
자신이 원하던 무기를 챙긴 데스티나는 대장장이의 집을 나섰다.
더는 챙길 것은 없었기에 주환 역시 미련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대장장이의 집에서 점점 멀어져서 큰길가로 접어들었다.
주환은 데스티나의 뒤를 따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는 어쩔 생각이야?”
“우선 쉴 곳을 찾아야 한다. 아까의 집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으니 다른 집을 찾아야겠지.”
“그럼 이곳에서 쉰 다음은?”
“쉰 다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전혀 모르는 세계에 떨어져 버린 입장에서는 우선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군. 그렇다면 너에게 내 계획을 공유하는 게 필요한 일이지.”
주환의 물음을 이해한 데스티나는 자신의 목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들?”
“가족은 아니다.”
“그럼?”
“황제 폐하와 그 가족분들이 최후의 결사대를 조직해서 좀비들과 싸우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는 좀 되었지만, 주군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신하 된 도리로서 이 세상의 끝까지라도 찾아서 보필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아직 살아남아서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네.”
“그렇다.”
“최근에 살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데?”
그 물음에 데스티나가 주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 옆에 있지.”
그 말에 깜짝 놀란 주환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수 초 후 그것이 자신을 의미한단 것을 깨달은 주환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나?”
“그래. 근래에 살아 있는 사람을 본 건 네가 마지막이다.”
“흐음. 그래? 그럼 전에 만났던 생존자들과는 왜 헤어진 거야?”
“대부분 베어 버렸다.”
“뭐?”
데스티나의 대답에 주환은 갑자기 등줄기에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주환은 긴장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멈추자 데스티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데스티나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오해를 하는 건가?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베고 다니는 그런 후안무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말 그대로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데.”
“하아. 그래. 내가 한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 설명해 주지.
이렇게 되어 버린 세상에선 생존자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같은 편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성전기사단 같은 귀족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면 더더욱 그렇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에게 보복하려는 심리가 있으니까.”
주환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 인간은 서로 협동하는 휴머니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예도 얼마든지 많다.
데스티나는 지금까지 그런 생존자들을 만났고 인간과 좀비 모두와 싸우면서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오해가 풀리자 주환은 긴장을 풀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순간적으로 오해를 해버렸네.”
“괜찮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주환. 너는 악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곳에 처음 와서 만난 사람이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해가 저물어 가면서 길게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산등성이에 얇은 손톱처럼 걸려 있는 노을을 보면서 데스티나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어디든지 빨리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군.”
“왜?”
“좀비들은 밤이 되면 더 활발해지는 경향이 있다. 낮에 상대했던 좀비들을 생각한다면 큰코다칠지도 모른다.”
주환은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밤거리에서 상대했던 난폭한 좀비들을 떠올렸다.
“그럼 빨리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자.”
큰길가를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던 두 사람은 이윽고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단층집이 대부분이었으며 간혹 이층으로 된 집도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둘러보았지만, 굴뚝에 연기가 올라오거나 창밖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집들 중에 루카라는 아이의 집이 있을까?”
“만약에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활동한 흔적이 있는 집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이 주변의 분위기들을 봤을 때 그런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이 들지 않는군.”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집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두 사람을 향해서 쏟아져 나오는 어둠과 눅눅한 향기.
주환은 라이트를 켜서 그 어둠들을 몰아냈다.
“여러 가지 편리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군. 아까 그 폭발하는 이상한 물건도 그렇고.”
데스티나가 감탄하자 주환은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바로 지포 라이터였다.
“잘 봐.”
주환은 지포 라이터를 켜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불이 켜진 지포 라이터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너는 이걸 사용해서 어두운 곳을 밝히면 돼.”
“신기하군. 이렇게 쉽게 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마법사들의 특권이었지.”
데스티나는 지포 라이터를 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살던 세상은 마법 같은 건 없었지만, 그 대신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한 곳이었거든.”
“드워프들이 지배하는 세상인가?”
“아니. 오로지 인간만이 살고 있을 뿐이야.”
“그런가. 기술이라는 건 드워프들의 전유물 같은 거지. 그들은 마법은 매우 약하지만, 최고의 기술력을 지녔다.
그들이 만드는 갑옷이나 무기는 고위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을 만큼 특별한 물건들이고.”
두 사람이 들어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주환과 데스티나에겐 생존 물품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바로 부엌이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부엌의 안을 뒤져 나갔다.
야채나 채소류는 전부 다 상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걸.”
“찾았다.”
데스티나의 활기 띤 목소리에 주환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길래?”
“마른 육포다. 양은 많지 않지만 아껴서 먹으면 내일까지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전리품을 주환의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여기는 좀비가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쉴까?”
“아니다. 가능하면 이 마을에 있는 집들을 다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최대한 안전을 도모해야 하니까.”
두 사람은 집을 나와서 다른 집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들어가는 어느 집이든 최근까지 사람이 살고 있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좀비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먹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있다면 최대한 모아서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 마을에 있는 괴물은 아까 그놈이 다였나 본데.”
주변에 있는 집들 중 가장 마지막 집을 나서면서 주환은 그렇게 말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로군.”
“안타깝지만 그 루카라는 아이도 없는 것 같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선 식수를 확보한 다음 오늘 밤을 묶을 수 있는 집을 고르도록 하자.”
“물은 어디서 찾지?”
“보통 마을마다 우물이 몇 개씩은 있으니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데스티나의 말대로 우물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물은 로덴 마을의 중앙에 있었는데 우물을 발견한 주환은 곧장 달려 두레박의 줄을 잡았다.
“드디어 시원한 물 한 번 먹을 수 있겠네.”
두레박은 우물의 밖에 나와 있지 않고 우물 안쪽에 빠져 있었다.
두레박을 다시 올리기 위해 줄을 당기던 주환은 두레박이 너무 무거운 것을 느꼈다.
“뭐 하는 건가?”
주환이 끙끙대고 있자 뒤에서 보고 있던 데스티나가 그렇게 물었다.
“이상해. 두레박이 너무 무거워.”
아무리 당겨도 두레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물이 가득 담겨 있어도 이렇게까지 무거운 건 말이 안 돼.”
주환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데스티나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뭔가. 썩는 것 같은 악취가 너무 심하군. 아마 우물 안쪽에서 퍼져 나오는 것 같다.”
“뭐?”
“안쪽에 불을 비추어다오.”
데스티나의 부탁에 주환은 바로 플래시 라이트로 우물 안쪽을 비추었다.
“이럴 거로 생각했다.”
주환도 고개를 내밀어 우물 안쪽을 바라보았다.
우물의 물 위로 사람 모양의 형체가 둥둥 떠 있었는데 그들이 아무리 확인해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두레박이 우물에 떠 있는 시체의 아래쪽으로 걸려 있어서 아무리 당겨도 올라오질 않던 것이다.
“우물에 시체가 빠져서 물이 오염되었을 거다. 지금은 마실 수가 없어.”
“난감하게 되었는데.”
“우선 시체는 건져 내야 할 것 같다. 이대로 시체가 들어가 있어 봐야 계속해서 더 오염되기만 할 뿐이니까.”
이번에는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같이 두레박의 줄을 당겼다.
우물 안의 시체가 두레박에 단단히 걸려 있는 모양인지 마치 낚시를 하는 것처럼 두레박이 시체와 함께 서서히 올라왔다.
두레박이 완전히 올라오자 시체가 우물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 주환이 두레박이 떨어지지 않도록 줄을 잡고 버티는 동안 데스티나가 시체를 우물 밖으로 끌어냈다.
쿵!
두 사람은 시체의 상태를 살폈다.
시체의 상태는 주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끔찍했다.
물에서 퉁퉁 불어 버린 시체를 보는 것은 꽤 끔찍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침착했다.
그때, 두 사람은 시체가 꽉 잡고 있는 물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괭이였다.
“이건.”
데스티나가 그 괭이를 잡으려는 찰나 시체가 스르륵 하고 움직였다.
“데스티나. 위험해!”
그녀 역시 위험을 느꼈는지 롱소드를 뽑으면서 번개처럼 일어섰다.
시체는 들고 있는 괭이를 지팡이 삼아서 비척거리면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그것이 단순히 물에 빠진 시체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좀비라는 걸 깨달았다.
괭이를 든 좀비는 비틀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에 맞추어서 주환과 데스티나는 각각 총과 롱소드를 좀비를 향해서 겨누었다.
좀비는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주환과 데스티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그 좀비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어디론가로 비척거리며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