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주환은 자신이 잡은 천을 옆으로 젖혔다.
천을 젖히며 주환은 반대쪽 손으로 들고 있는 권총을 앞으로 겨누었다.
“뭐야?”
주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이 겨누고 있던 권총을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렸다.
천의 뒤쪽에 있던 것은 바로 시체였다.
좀비화가 되지 않은 순수한 시체.
건조한 황야의 날씨 때문인지 시체는 바짝 말라 미라화가 진행 중이었다.
주환은 권총을 홀스터에 넣은 뒤 시체를 살폈다.
그가 시체를 살피는 동안 그가 있는 움집에 데스티나와 루카가 들어왔다.
그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도 주환이 발견한 시체를 바라보았다.
“시체가 있네?”
“좀비화가 되지 않은 시체로군.”
데스티나는 주환의 옆쪽으로 다가와 시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시체는 좀비한테 당한 게 아니다. 좀비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당한 거지.”
데스티나는 시체의 팔을 들었다.
팔에는 뭔가에 찔린 것 같은 상처가 크게 나 있었다.
“송곳 같은 걸로 찌른 것 같은데.”
주환의 말에 루카도 상처를 잘 살펴보았다.
“송곳보다는 말뚝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인은 과다 출혈이었던 건가?”
주환의 말에 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독에 당한 것 같기도 해.”
“독에 중독되어서 죽었다?”
“나는 약초도 다루지만, 독초도 다루거든. 약이나 독이나 한 끗 차이니까. 그래서 독에 당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어.”
루카와 주환의 대화를 듣던 데스티나는 상황을 추리해 보았다.
“내가 생각했을 땐 아마 이런 일이었던 것 같다.”
데스티나는 손으로 흙집의 입구를 가리켰다.
“아마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공동체를 습격해 온 듯하다. 이 사람은 밖에 있다가 그 존재에게 당했겠지. 그 존재는 독이 있는 말뚝을 팔에 박아 넣었고 이 사람은 도망치기 위해서 이 집 안으로 숨었을 거다. 들어온 이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았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작은 흙집에서 숨을 곳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천 뒤에 숨었고 독 때문에 서서히 숨을 거두었을 거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좀비와는 아주 다른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너희가 들어갔던 집들에는 뭐가 없었어?”
“특별한 건 없었다.”
“내가 들어갔던 집에는 그림이 하나 있던데.”
루카가 그렇게 말했다.
“그림이 있었다고? 무슨 그림인데?”
“들고 왔으니까 여기서 보여 줄게.”
루카는 허리춤에 끼워져 있던 둘둘 말린 물건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주환은 그것이 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종이와는 상당히 다른 재질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데스티나가 그것을 펴자 주환은 그 끝 쪽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물었다.
“이건 종이가 아닌 것 같은데?”
“양피지라는 거야.”
이번에 대답을 해 준 이는 루카였다.
“양의 가죽을 다듬어서 종이처럼 쓰는 거지.”
주환은 고개를 내밀어서 데스티나가 보고 있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림은 단순했다.
쓰인 색은 오로지 검은색뿐이었으며, 목탄을 가지고 거칠게 문지른 느낌이 더 강했다.
하늘에는 구름으로 보이는 형태가 떠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작대기처럼 그려진 여러 명의 사람이 그 구름을 쫓아가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림의 아래쪽에는 그림을 설명하는 듯한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
[비를 쫓는 자들]
“이게 무슨 그림일까?”
“나도 알 수가 없다. 그냥 별 의미 없이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데스티나와 주환의 시선이 루카에게 쏠렸다.
“이 황야에 사는 유목민들은 물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면서? 그러면 비구름을 좋아하고 쫓아다니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쉽게 풀리기는 하네.”
“나도 그런 의미일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석연치 않은 그림이라는 느낌이 드는군.”
“어째서?”
“왠지 모르게 이 그림은 자신들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비를 쫓는 자들’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생각을 거듭하던 데스티나는 더는 풀리는 것이 없는 듯 양피지 그림을 다시 둘둘 말았다.
“혹시 모르니까 이 그림의 보관을 부탁하도록 하지.”
“알겠어.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챙겼던 거니까.”
루카는 그 그림을 받아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휘이잉.
그때, 주환 일행은 움집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를 감지했다.
그들은 서둘러 움집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온 사방이 뿌옇게 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곧 사방에서 엄청난 폭풍이 불어 닥쳐 세 사람을 강하게 휘감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맑았잖아?”
주환은 얼굴을 때리는 모래들을 손으로 막으며 그렇게 소리쳤다.
“황야에는 자주 강한 모래 폭풍이 불어 닥친다. 한 번쯤은 만나게 될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이로군.”
“얼마나 지속될 것 같아?”
“짧으면 몇 시간이지만 길면 온종일 불기도 한다. 폭풍이 지금 시작되었으니 이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좋겠군.”
“그럼 어쩔 수가 없네. 여기서 쉬는 수밖에. 그래도 바람을 막아 줄 벽이랑 천장이 있는 게 다행이야.”
루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금 나왔던 움집의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바람이 점점 더 심해졌기에 주환과 데스티나 역시 움집의 안으로 들어가 모래 폭풍을 피했다.
* * *
“바람이 그칠 생각을 안 하네.”
세 사람은 집 안에 옹기종기 앉아서 모래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발견했던 시체는 집의 한쪽에 잘 눕혀 놓은 상태였다.
“이대로 해가 져버리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야 할 수도 있겠군.”
“그나저나.”
루카는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를 힐끔 바라보았다.
“대체 저 시체는 누구한테 당한 걸까?”
“저 시체도 시체지만 궁금한 건 또 있어.”
주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간 걸까?”
“습격을 받아서 다 도망쳤다든가?”
“그렇다면 더욱더 걱정이로군.”
“어째서?”
“황야 유목민들은 수는 적지만 떠돌아다니면서 약탈자들과 싸울 일이 많아서 상당한 전투력을 지닌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자들이 다 당해 버렸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심지어 독을 지닌 상대란 말이지.”
무료해진 주환은 움집의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그가 밟았던 움집의 바닥 부분이 움푹 꺼지면서 하체가 그 안쪽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뭐야!”
버둥거리면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마치 개미지옥에 끌려 들어가는 개미처럼 주환의 몸은 구덩이 안으로 쏙 하고 들어가 버렸다.
“이봐! 주환!”
데스티나와 루카가 재빨리 움직여서 구덩이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는 흙투성이가 된 주환이 누워 있었다.
“난 괜찮아.”
주환은 입에 들어간 흙들을 뱉어 냈다.
“밑에 땅굴이 있을 줄이야.”
그가 빠진 땅굴의 깊이는 혼자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수준.
움집의 밑에는 서로 교차하는 수많은 작은 땅굴들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탓에 약해진 바닥이 주환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일어서려던 주환은 바닥에 닿은 손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일어서. 꺼내 줄 테니까.”
“잠깐만. 잠깐만 조용히 해봐.”
주환이 다급히 말하자 데스티나와 루카는 입을 다물었다.
주환은 작지만, 일정한 박자의 진동이 손을 통해 전해져 옴을 느꼈다.
그 진동을 느끼는 순간, 그는 지금 이 땅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뭔가 움직이는 게 있어.”
주환은 누운 채로 플래시 라이트를 꺼내서 땅굴의 안쪽을 비추었다.
땅굴은 그의 예상보다 깊고 길었다.
그리고 주환은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존재를 보았다.
단단해 보이는 겉껍질과 당구공만 한 검은색의 눈알. 쉭쉭 거리는 소리.
그것은 바로 거대한 전갈이었다.
주환은 빠르게 권총으로 전갈을 겨누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 전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전갈의 집게는 단 한 번에 주환의 팔다리를 자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탕!
주환이 방아쇠를 당기자 발사된 탄환이 전갈의 외피를 관통했다.
키이익!
전갈은 위험을 느꼈는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물러났다.
상황을 파악한 루카와 데스티나는 아래쪽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우리 손을 잡아!”
손이 내밀어지자 주환은 곧바로 위쪽으로 점프하며 손을 뻗었다.
루카와 데스티나가 손을 뻗고 있었지만 주환의 손은 닿지 않았다.
그때.
우르릉!
갑자기 삽시간에 움집의 나머지 바닥들까지 전부 무너져 버렸다.
그러면서 바닥의 위에 있던 데스티나와 루카까지 땅굴의 안으로 추락했다.
“젠장!”
땅굴의 안쪽으로 추락한 두 사람은 땅굴의 바닥에 굴렀다.
주환은 재빨리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주환은 바닥에 추락한 충격 때문에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는 데스티나와 루카를 부축했다.
“조심해. 거대 전갈이 땅 밑에 숨어 있어.”
주환이 그렇게 말한 순간 다시금 땅굴의 한쪽에서 거대 전갈이 튀어나왔다.
주환은 반사적으로 전갈을 향해서 권총을 갈겼다.
그와 동시에 루카와 데스티나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죽어라!”
루카가 괭이로 전갈의 머리 부분을 내리찍었다.
데스티나는 검을 휘둘러서 전갈의 꼬리를 쳤다.
챙!
금속들끼리 부딪친 같은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무기는 튕겨 나갔다.
무기가 직격했던 부분들은 금이 가서 갈라져 있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나마 주환이 쏜 총의 총알이 전갈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 속살에 박혔다.
쉭쉭.
전갈은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굴속으로 들어갔다.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하아. 하아.”
탄창을 다 비운 주환은 숨을 몰아쉬면서 새 탄창으로 갈아 끼웠다.
“엄청 단단한 녀석이다.”
데스티나는 자신의 검을 확인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무딘 칼로는 저 괴물의 껍질을 뚫을 수가 없다.”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들이 나온 거지?”
주환 일행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사방에서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는 땅굴 안에 있던 주환만이 간신히 느낄 정도로 작은 진동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곳에 연결된 모든 땅굴에서 거대 전갈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다다!
이어서 세 사람을 향해 수많은 거대 전갈이 다가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땅굴의 안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데스티나는 우선 가장 무너지지 않을 만한 위치로 이동하여 몸을 살짝 숙였다.
“너희 두 사람은 우선 나를 밟고 올라가도록 해라. 내가 마지막으로 올라가겠다.”
“잠깐만, 데스티나!”
“어서!”
데스티나가 강한 의지를 보이자 루카는 우선 그녀의 어깨를 밟으며 위쪽으로 몸을 솟구쳤다.
턱!
그녀는 몸이 가볍고 날렵했기에 무너진 움집 바닥의 한쪽을 잡고는 위쪽으로 올라갔다.
“다음!”
데스티나는 양손에 깍지를 끼고 자세를 취했다.
주환은 그녀의 깍지 낀 손바닥을 밟으며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데스티나는 온 힘을 다해 깍지 낀 손을 위로 올려 주환을 높이 올려 주었다.
덥석.
이어서 위에서 손을 뻗고 있던 루카가 그를 끌어당겼다.
이제는 데스티나만 남은 상황.
그러나 거대 전갈들은 그녀가 있는 곳에 거의 도달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