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데스티나는 순간 다시 한번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땅과 그녀의 사이에 있는 엄청난 거리가 그녀에게 아찔한 감각을 전해 주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바로 그겁니다. 하염없는 추락이죠. 꿈에서도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더 커진다고 하지요. 그건 바로 성장의 증명입니다.”
“무, 무리일세.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
데스티나는 자신이 떠 있는 높이와 땅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살짝만 보아도 보통의 인간을 절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는 수준의 높이였다.
“이 높이라면 반드시 죽을 거다.”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툴레오의 갑옷이라면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성공만 한다면 단숨에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거죠.”
“강력한 힘?”
“맞습니다.”
타마두크의 목소리는 마치 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꿀처럼 데스티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당신은 강력한 힘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제가 잘못 보았나요?”
“아픈 곳을 찌르는군. 역시 마족인 건가?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라도 한 건가?”
“설마요. 아무리 마족이라도 그 정도의 재주는 없습니다. 사실 힘이라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기에 가볍게 짚어 본 것일 뿐이죠.”
“나도 힘을 원한다. 재능에 구애받지 않는 강한 힘을.”
데스티나는 계속 아래쪽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노력했다.
데스티나는 마족인 타마두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렇지만 이곳까지 데려다준 타마두크의 행동을 봤을 때 그녀를 해코지할 생각이 있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아마 나를 해하고 싶었다면 기절했을 때 이미 했겠지.’
“좋아. 한번 믿어 보겠다.”
데스티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진심입니까?”
“그렇다. 강해질 수 있다면 이 정도 시련쯤을 아무것도 아니다.”
“굉장히 떨고 있는 것 같은데요.”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다! 기사는 맘만 먹으면 용의 등에도 올라탈 수가 있다!”
“그렇군요. 믿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타마두크는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놓겠습니다.”
“잠깐. 잠깐!”
“왜 그러시죠?”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게 해주게.”
“그러시죠. 하지만 너무 시간이 걸리면 빨리 날아온 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타마두크의 은근한 말에 데스티나는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이런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쉽게 놓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게 제발 의미 없는 자살이 아니기를!’
“지금…… 지금 놔주게.”
마음을 굳힌 데스티나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하강이 되기를 빕니다.”
타마두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망설임 없이 양손을 놓았다.
데스티나는 온몸에 중력이 와 닿으면서 몸이 하염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참. 이것을 깜빡했군요.”
타마두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는 데스티나를 쫓아갔다.
떨어지던 데스티나가 의아한 눈으로 타마두크를 바라보자 그는 품 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더니 데스티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텔레포트용 손거울이었다.
“주환 님에게 잘 건네주도록 부탁합니다. 이번에는 주환 님이 꼭 찾아오셨으면 좋겠네요.”
“알겠다!”
데스티나가 손거울을 품속에 넣자 타마두크는 순식간에 그녀의 옆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공에서 혼자가 되자 데스티나는 갑자기 엄청난 공포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대지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속도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추락하는 짧은 시간 동안 데스티나는 함부로 허공에 몸을 맡긴 것을 후회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강해진다!”
데스티나는 그렇게 외쳤다.
그사이에도 그녀의 몸은 멈추지 않고 추락을 계속했다.
“데미안! 반드시 너를 뛰어넘는다!”
데미안의 얼굴이 떠오르자 데스티나는 온몸에서 열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데스티나는 갑옷을 두르고 있던 푸른색의 에너지가 점점 증폭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푸른색의 에너지는 점점 커져서 데스티나의 온몸을 완전히 덮어 버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생각하기 직전.
데스티나의 몸은 바닥과 충돌했다.
쾅!
귀를 찢는 듯한 엄청난 폭발음과 동시에 바닥이 패면서 만들어진 많은 양의 흙먼지가 구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푸른빛의 에너지가 하늘로 쏘아졌다.
* * *
“이상한 게 떨어지고 있어!”
루카는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보면서 그렇게 외쳤다.
“저건 대체…….”
주환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포위망을 좁혀 오는 좀비 오크들을 피해서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크르르…….”
그때, 좀비 오크들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는지 으르렁거리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건 사람이다. 사람이야!”
주환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존재는 하얀색의 옷을 입고 있는 듯했는데 점점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선명한 푸른빛을 띠어 갔다.
“정확히 우리 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루카가 그렇게 말하자 주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받아 줘야 하나?”
“저 정도 속도로 떨어지는 사람을 받아 주면 같이 죽을 거야!”
두 사람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추락하는 장본인은 그들이 서 있는 대지와 충돌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
주환은 순간 푸른빛에 휩싸인 추락자가 금발을 휘날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쾅!
“으악!”
추락자가 바닥과 충돌했을 때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주환은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지만, 그 충격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환은 떠밀리듯이 넘어져서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폭풍 같은 바람이 주변을 휩싸고 있었다.
루카는 충격에 날아가지 않도록 천막의 벽을 붙잡은 다음 굴러가는 주환의 팔을 잡았다.
충격파 다음에 두 사람을 덮친 것은 엄청난 양의 흙먼지였다.
주환과 루카는 입으로 들어오는 흙들을 다시 뱉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충격파는 두 사람만을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충격은 주변에 있던 좀비 오크들까지도 덮쳐서 그들을 사방으로 밀어내 버렸다.
힘이 강한 좀비 오크들이었지만 그들도 바닥에 쓰러져서 버둥거렸다.
점차 충격파가 사그라지자 자욱했던 흙먼지도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주환과 루카는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좀비 오크들이 바닥에 누워 있었으며 그들 사이에 누군가가 고고하게 서 있었다.
“데스티나?”
주환은 믿을 수가 없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주환은 자신의 앞에 등을 보이면서 서 있는 데스티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입고 있는 갑옷은 바뀌었지만, 그녀의 머리 스타일은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데스티나가 맞는 거지?”
루카는 주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두 사람이 보고 있는 데스티나는 완벽할 정도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데스티나의 온몸에서 일렁이는 푸른색의 에너지를 볼 수 있었다.
“돌아왔다.”
데스티나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눈빛과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환과 루카는 데스티나 쪽으로 다가갔다.
데스티나에게 다가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데스티나가 딛고 있는 바닥에 마치 아주 작은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크레이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데스티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지금 검은 탑에 있어야 하는 거잖아?”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어질 수가 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닐 것 같군.”
데스티나는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툴레오의 검을 쓰러져 있는 좀비 오크들을 향해서 겨누었다.
“이 녀석들을 다 쓰러뜨리고 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와 동시에 쓰러져 있던 좀비 오크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충격파는 좀비 오크들을 바닥에 쓰러뜨렸지만 큰 대미지를 주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도와줄게.”
주환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데스티나가 손을 들어서 저지했다.
“우선 거기에서 보고 있어 주면 좋을 것 같군.”
“어째서?”
“우선 지금 얻은 힘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다. 나로서도 어디까지 힘이 미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데스티나는 그 말만을 남기곤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일어선 좀비 오크들은 곧장 자신들을 향해서 걸어오는 데스티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데스티나는 검을 옆구리 아래쪽으로 집어넣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화륵!
순간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툴레오의 검에서 푸른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푸른색의 불꽃은 검신을 타고 오르더니 검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간다!”
데스티나는 단숨에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궤적을 따라서 푸른색의 잔상이 만들어졌다.
스윽.
피부가 베이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러자 가장 앞에서 달려들던 좀비 오크 두 마리의 몸이 갈라지면서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루카는 휘파람을 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야 정말로 성전 기사단의 단장처럼 보이는걸?”
지금의 싸움에 두 사람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데스티나가 검을 휘두르자 좀비 오크가 입고 있는 갑옷이 갈라지며 그 안에 보호를 받고 있던 육체까지 한 번에 잘려 나갔다.
“이게 툴레오의 갑옷이 가진 힘이라는 것인가?”
데스티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몸에서는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는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소드마스터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찌 보면 소드마스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데스티나는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일이 지금 너무나도 쉽게 일어나는 것에 경탄했다.
온몸에서 마나가 끓어올랐고 그녀가 유도한 대로 시각화가 되어 검신으로 스며들어 갔다.
“크앙!”
좀비 오크 중 한 마리가 커다란 참마도를 휘두르면서 데스티나에게 달려들었다.
데스티나는 검으로 그 좀비 오크의 복부를 찔렀다.
데스티나는 검이 관통하자 힘으로 밀어붙여서 뒤에 있는 좀비 오크까지 한꺼번에 찔러 버렸다.
그녀가 가벼운 몸짓으로 검을 뽑아내자 두 마리의 좀비 오크는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몸이 가볍군. 지금이라면 누구와 싸우더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잠재력이 개방된 데스티나에겐 좀비 오크들은 더 이상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몽둥이를 든 좀비 오크가 달려들었다. 데스티나는 이번엔 검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몽둥이를 향해서 팔을 들었을 뿐이었다.
콰직!
몽둥이는 데스티나의 팔에 부딪히자마자 산산조각이 나면서 부서져 버렸다.
강력한 마나 에너지로 보호받는 데스티나의 팔은 단단한 방패를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퍽!
이번에 데스티나는 자신이 맨손으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 듯 주먹으로 몽둥이를 들고 있던 좀비 오크를 가격했다.
그러자 좀비 오크는 마치 철퇴로 얻어맞은 듯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진 것은 덤이었다.
“하아. 하아.”
바닥에 떨어져서 꿈틀대고 있는 좀비 오크를 바라보고 있던 데스티나는 어느 순간 자신의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데스티나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갑자기 왜 이러지?’
데스티나는 갑자기 일어난 신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잠재 능력이 개방되기 이전에도 이 정도 움직임에 지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나?’
이제는 손에 감각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아직도 몇 마리의 좀비 오크들이 남아 있었다.
알 수 없는 몸의 변화를 느끼면서 데스티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툴레오의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