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신 가요, 주환 씨?”
그렇게 묻는 이브를 보면서 엘레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나다.”
상대가 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패닉 상태에 빠진 듯했다.
눈만을 깜빡이면서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이브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스…… 스승님!”
“얼굴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다, 당연하죠. 스승님은 늙지를 않으시니까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스승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는 게 도리겠지?
“무…… 물론 그렇지만요.”
엘레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저 정도로 저자세로 나오는 이브를 본 적이 없었기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영계를 통해서 보낸 메시지는 잘 받았다. 그래서 오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까 영 괘씸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네? 어째서요?”
이브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엘레나는 주환 일행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남에게 일을 맡겨 놓고 보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 결과물을 뜬금없이 나보고 책임지라는 상황이라니.”
“스승님.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이브는 엘레나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래? 그럼 무슨 의도였지?”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그때, 엘레나의 표정이 갑자기 인자하게 변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까지도 걸려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더 좋지 않겠니?”
“제 탑으로 오신다고요……? 스승님께서 오신다면야 상관은 없는데요.”
“아니야. 나만 가는 게 아니지.”
그리고 엘레나는 너무나도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갈 거거든.”
“안 돼요!”
이브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절대 안 돼요! 아시잖아요! 저 손님 싫어하는 거요! 그래서 이 탑에만 항상 박혀 있는 건데!”
“아무튼 손님들을 우르르 끌고 갈 테니까. 맛있는 차나 준비해 놓고 있으렴. 그럼 이만.”
엘레나는 전화를 끊어 버리듯이 이브와의 통신을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그 거울을 아무 곳에나 휙 던져 버리고 주환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까 보이던 사악한 웃음을 그대로 입꼬리에 건 상태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다들 같이 갈 거지?”
* * *
“자, 그럼 출발해볼까?”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즐거워하는 엘레나를 보면서 주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다 같이 간다고 결정한 것이긴 했지만 주환은 이게 잘하는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엘레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현재 별장을 나와서 별장 앞에 있는 뜰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궁금한 게 있군.”
데스티나는 엘레나를 향해서 그렇게 말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방에 들러서 툴레오의 갑옷으로 완전히 풀 무장을 한 상태였다.
“검은 탑까지는 마법이 걸려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지?”
“혹시 텔레포트라도 쓸 생각인 거야?”
루카는 엘레나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툴툴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좀비 오크들이 쓰던 그 참마도가 들려 있었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그 끝이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텔레포트는 쓰지 않을 거야. 검은 탑까지 마법이 걸려 있어서 못 간다고 하는데, 이브에게 그 마법을 가르친 게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엘레나는 앞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치 커튼을 걷어 내듯 그 손을 한쪽으로 쭉 휘둘렀다.
부웅!
마치 거대한 나방이 날갯짓을 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그들이 보고 있는 정면의 풍경이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일렁이던 풍경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는 갈라진 유리창처럼 변하더니 깨지듯 터져 나갔다.
“이게 뭐야!”
엘레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탄성을 내질렀다.
풍경이 유리창처럼 깨져 버린 뒤.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검은색의 탑이 떡하니 서서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탑이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있어!”
루카는 나머지 두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듯 그렇게 소리쳤다.
놀란 것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지내고 있던 별장과 검은 탑과의 거리는 불과 100미터 정도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 마법에 홀려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너희는 이브한테 완전히 속고 있었어. 너희가 있던 이 별장은 처음부터 이 검은 탑의 옆에 있었으니까.”
“뭐라고?”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을 잇지를 못했다.
한때 그토록 도달하려고 했지만 닿을 수 없었던 검은 탑이 실은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세 사람이 느끼는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하는 건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전혀 몰랐다니.”
주환은 검은 탑의 꼭대기 쪽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제 저 탑은 텔레포트를 이용할 필요 없이 그냥 걸어서도 갈 수 있는 탑이 된 거지. 그럼 다들 따라오도록 해.”
어느새 엘레나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을 빼놓고 있던 나머지 세 사람도 허겁지겁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검은 탑에 도착했을 때, 주환은 고개를 쭈욱 올려서 탑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탑은 대략 10층 정도의 높이로 주환이 살던 현실 세계의 아파트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높이를 자랑했다.
“그런데 어디가 문인 거야?”
탑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벽을 살피던 루카가 엘레나에게 물었다.
“아무리 찾아도 문은 보이질 않는데?”
“탑의 위치도 마법으로 철저하게 숨기려고 한 아이인데 문이 그렇게 쉽게 발견되도록 내버려 두었을 리는 없잖아? 조금은 머리를 쓰라구.”
“지금 내 머리 갖고 놀리는 거야?”
엘레나의 말에 루카가 발끈하자 주환은 은근슬쩍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것은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한다는 건 넌 알고 있다는 말이겠지?”
“당연하지.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엘레나는 곧바로 일렁이는 불꽃의 덩어리를 손안에 만들어 냈다.
이어서 엘레나는 손에 들고 있던 화염구를 검은 탑의 벽에 던졌다.
화염구가 벽에 직격하자 벽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는데, 그와 동시에 벽의 뒤쪽에서 숨겨져 있던 나무 문이 그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문을 숨겨 놓았다고 하더라도 나한테는 어림도 없지.”
벽이 다 타고 나자 그 불꽃들은 나무 문에 옮겨붙었다.
문은 타오르다가 곧 조각조각 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럼.”
탑의 안으로 들어가려던 엘레나는 뭔가 생각이 난 듯 뒤를 돌아서 나머지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몰라서 말해 두는 건데 지금 우리가 올라가려는 이 탑에는 꽤 많은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거야.”
“함정?”
“그래. 이브는 기계 장치나 인형, 건축, 발명 등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으니까. 자신의 솜씨를 이용해서 이 탑의 이곳저곳에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을 거야. 그리고 그 녀석의 옆에는 사악한 집사가 버티고 있기도 하고.”
엘레나가 사악한 집사라는 말을 했을 때 주환은 그것에 타마두크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올라가다가 함정에 걸리는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탑의 함정 때문에 죽는 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을 테니까.”
엘레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검은 탑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깥에 남은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엉겁결에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주환은 두 사람을 둘러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를 그 이브라는 마법사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탑을 오를 생각이다.”
데스티나는 그렇게 말하곤 자신이 입고 있는 툴레오의 갑옷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이 갑옷에 대한 해명을 직접 듣고 싶은 생각도 있고.”
“하긴, 넌 이브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이 있긴 하지. 루카는?”
“나?”
루카는 참마도를 빙빙 돌리다가 어깨에 걸쳤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잖아?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까지 알아서 흘러와 버린 건 사실이잖아? 이걸 핑계 삼아서 저 고고한 탑의 마법사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거지.”
“뭐, 너는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솔직히 이브라는 마법사, 무책임한 것도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알 수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가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억지로 따라서 올라갈 필요는 없다.”
데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럼 우리는 들어가도록 하지.”
데스티나와 루카는 주환을 남겨 놓고 탑의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주환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놀라 중얼거렸다.
“아, 맞아. 그게 있었지?”
주환은 황급히 이브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별장의 안으로 들어가서 거실에 도달한 주환은 별장에서 나서기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아까 엘레나가 거울을 보다가 어디로 던졌었지?’
주환은 기억을 따라서 거실의 바닥을 살펴보았다.
이제 겨우 해가 뜨려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두운 집 안에서 작은 손거울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찾았다.”
바닥을 열심히 훑어보던 주환은 비로소 엘레나가 던져 버렸던 그 손거울을 찾을 수가 있었다. 손거울은 다행히 깨지거나 손상된 흔적이 없었다.
손거울을 찾은 주환은 밖으로 나왔다.
주환의 시선은 세 사람이 들어갔던 검은 탑의 문으로 향했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탑의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엘레나의 기분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환은 결심을 한 듯 손에 들고 있는 손거울을 꽉 쥐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서 괴롭히는 건 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주환은 권총의 손잡이로 거울을 깨 버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환한 빛에 몸을 맡겼다.
주환은 감았던 눈을 뜨면 익숙한 장소로 텔레포트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주환이 눈을 떴을 때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었다.
‘뭐지?’
놀란 주환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앞에는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누워 있는 아래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들려왔다.
“주인님. 갑자기 거울이 무거워졌는걸요?”
“그, 그러게. 갑자기 왜 이러지?”
그제야 주환은 자신이 텔레포트용 전신 거울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몸을 돌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타마두크와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정체 모를 이가 주환이 누워 있는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주환이 위에 누워 있는 거울을 탑의 옥상에서 아래쪽으로 던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잠깐!”
놀란 주환이 뭔가 말하는 동시에.
두 사람은 들고 있던 거울을 아래쪽으로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