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덜컥.
가스파르가 잠시 기다리고 있는 사이 다락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해서 주환과 엘레나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역시 안에 있었군.”
가스파르는 고개만을 슬쩍 움직여 내려온 주환과 엘레나를 확인할 따름이었다.
주환은 그의 얼굴에서 여유를 느낄 수가 있었다.
두건 안쪽에 보이는 붉은색의 머리칼과 양쪽 눈 밑에 검은색으로 그려진 덩굴 모양의 문신.
주환은 자신의 앞에 있는 가스파르라는 청년이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주환은 언제라도 가스파르를 제압할 수 있도록 그를 향해서 총을 겨누었다.
“너희는 데미안의 부하들인가? 이미 데미안이 이 정착지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군.”
“우리는 데미안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포기하는 게 좋아. 이미 데미안이 이끄는 성전 기사단이 근처에 도착해 있으니까 말이야.”
엘레나는 가스파르의 기를 꺾기 위해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였다.
“그것참 무섭군.”
가스파르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데미안이 나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로 생각하는 건가? 데미안이 한때 날리던 검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라도 우리의 상대는 되지 못해. 조금 귀찮아질 뿐이지.”
“그래? 나도 사실 데미안이 오든 말든 별 상관없어. 너 정도는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교육을 해줄 수 있거든.”
엘레나와 가스파르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주환은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는 가스파르에게 물었다.
“너희가 정착지들을 습격하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납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네놈들이 원하는 게 뭐지?”
“그러는 너희야말로 원하는 게 뭐지?”
“당연히 너희를 막으려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군. 굳이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너희는 우리처럼 좀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하는 일은 별것이 아니야. 미래를 그리는 거지.”
“너희들이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는 몰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습격해서 약탈하는 그런 짓거리에 무슨 미래가 있다는 거야?”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거든.”
“재미있는 이야기긴 하지만 별로 시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언제든지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그녀의 양팔에서는 바람의 정령들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면서 그 주변을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싸우자는 거군?”
“너희같이 멍청하지만, 욕심만 많은 마법사가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두들겨 패줘야 좀 화가 풀리지 않겠어? 잘못했으면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반성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까 내가 아무리 평화를 사랑하는 엘프라지만 참을 수가 없거든.”
“인간 마법사에게 원한이 있는 모양이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우리에게 화풀이할 필요가 있을까?”
“너희들이 죽인 사람들한테 그렇게 말해 보는 건 어때?”
그때, 가스파르와 엘레나가 움직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먼저 움직인 이는 가스파르였다.
가스파르의 로브가 펄럭이는 순간 엘레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가스파르를 향해서 손을 뻗었으며 그녀의 손에서 강력한 진공 칼날이 발사되었다.
그러자 그 칼날은 가스파르의 로브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으며 그가 앉아 있던 의자까지 박살을 내버렸다.
“으악!”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촌장은 재빨리 자신의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찢어진 로브가 하늘거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정작 가스파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어디 갔지?”
당황한 주환이 그렇게 외쳤을 때 그는 마치 수백 마리의 벌이 동시에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주환은 그 소리를 따라서 천장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수도 없이 많은 벌레가 서로 뭉쳐 커다란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벌레들은 대부분 날벌레 종류로, 그들이 뭉쳐 있는 덩어리의 그 크기는 상당히 컸으며, 점차 성인 남성과 흡사한 모습을 이루어 갔다.
벌레로 이루어진 몸체의 얼굴에 세 군데의 움푹 들어간 작은 구덩이가 생겼는데, 그 위치는 바로 두 눈과 입이 위치한 곳이었다.
벌레로 이루어진 그 입술이 움직였다.
“놀랬나?”
그는 바로 신체를 벌레의 군체로 변형시킨 가스파르였다.
타다당!
주환은 천장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렇지만 가스파르의 몸이 미끄러지듯 이동했기 때문에 주환이 발사한 탄환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엘레나 역시 2차 공격을 가했지만, 그 역시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슉!
가스파르는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본 엘레나는 주환에게 소리쳤다.
“놓치면 안 돼!”
“알았어!”
주환은 황급히 가스파르가 빠져나간 창문을 향해서 달렸다.
주환은 가볍게 창문을 뛰어넘은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건물들의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는 가스파르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그의 몸뚱이는 여전히 날벌레들의 군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 서!”
주환은 몸을 날려 건물의 처마를 잡은 다음 몸을 당겨 한 번에 날렵하게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주환은 가스파르를 따라 지금 있는 건물의 지붕에서 건너편 건물의 지붕으로 단숨에 건너뛰었다.
주환은 가스파르를 향해서 총을 발사하였다.
퍽퍽!
가스파르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날벌레들이었기 때문에 주환이 쏜 탄환은 가스파르의 몸을 부드럽게 관통했다.
그렇기에 가스파르는 그다지 큰 대미지를 입지 않았지만 그 탄환의 회전에 휘말린 벌레들은 그야말로 가루처럼 분쇄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주환의 무기에 놀랐는지 가스파르는 걸음을 멈추고 주환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무기로군. 지금의 신체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신체라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겠어.”
가스파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엘레나가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서 높이 솟아올랐다.
“지금이야. 살라만더!”
엘레나의 외침과 함께 불꽃 덩어리가 가스파르에게 폭사되었다.
가스파르는 위험을 느꼈는지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고 불꽃이 지붕에 옮겨붙으면서 지붕 위를 태우기 시작하였다.
“엘레나! 지붕에 불이 붙었어!”
그러자 엘레나는 다시금 살라만더에게 명령을 내렸다.
“살라만더! 다른 곳에 피해를 주지 마!”
그러자 지붕에 붙었던 불꽃들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물론, 이미 타버린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집 전체가 홀라당 타버리는 것은 막을 수가 있었다.
살라만더의 불꽃 공격은 가스파르에게도 위험한 듯 그는 엘레나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계속해서 지붕을 타고 넘으면서 도망 다녔다.
주환 역시 계속 도망치는 가스파르에게 사격을 하면서 그의 뒤를 쫓았다.
틱!
탄창에 있던 탄환을 다 소비하자 주환은 돌격 소총에서 탄창을 분리하고 새로운 탄창으로 갈아 끼웠다.
그 순간, 도망치던 가스파르가 방향을 바꾸더니 단숨에 주환에게 돌진했다.
“뭐야!”
탄창을 다 교체한 주환이 다시 반격하려고 했지만 가스파르의 행동이 더 빨랐다.
벌레로 된 가스파르의 몸은 마치 검은색의 안개처럼 주환을 감쌌다.
“젠장!”
주환은 양팔을 휘둘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벌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옷 속은 물론이고 심지어 귓구멍까지 벌레들이 침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때, 엘레나는 주환의 옆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주환을 향해서 손을 내뻗었다.
“살라만더!”
엘레나의 손에서 발사된 화염의 장벽이 주환을 감쌌다.
그러자 주환을 공격하고 있던 벌레들에게 불꽃이 옮겨붙으면서 수도 없이 많은, 타 죽은 벌레들의 사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문제는 그 불꽃이 주환에게도 옮겨붙었다는 사실이었다.
“뜨겁잖아!”
몸에 붙을 불을 끄기 위해 손을 움직이던 주환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건물의 아래쪽에 놓여 있던 아주 거대한 나무 대야였다.
그 대야는 바로 빗물받이로, 빗물을 모아서 식수 등의 생활용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 저장소의 일종이었다.
그것을 본 주환은 자신의 몸에 붙은 벌레들과 함께 망설임 없이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빗물받이 안으로 몸을 던졌다.
풍덩!
주환은 빗물받이 안에 있는 물로 몸을 적셔 옷을 태우고 있던 불꽃을 꺼트렸다.
모든 불이 다 꺼진 것을 확인한 주환은 빗물받이에서 빠져나왔다.
빗물받이에서 나온 주환은 바닥으로 내려온 엘레나를 발견했다.
“적이 아니라 동료 때문에 죽을 것 같은데?”
주환의 말에 엘레나는 킥킥대며 웃음 지었다.
“나를 동료라고 보면 곤란하지. 엄연히 너희의 의뢰주라고?”
“나 참.”
그때 갑자기 빗물받이의 안쪽에서 가스파르가 솟아올랐다.
아까 살라만더의 불꽃을 뒤집어썼을 때에는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구성하질 못했지만, 불꽃이 사라진 지금은 어느 정도 다시금 벌레의 군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꽃에 타서 없어진 부분이 꽤 많은 듯 몸을 구성하고 있는 벌레들이 군데군데 사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
가스파르가 주환을 보면서 으르렁거릴 때 주환은 가스파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벌레 중 유독 색이 다른 벌레들이 몇 마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벌레들은 색이 다를 뿐만 아니라 크기가 장수풍뎅이 이상으로 컸다.
불꽃에 타버리기 전에는 벌레들이 많았기에 그러한 벌레들이 주환의 눈에 띄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벌레들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기에 주환은 쉽게 다른 색의 벌레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저건 설마?’
“운디네!”
엘레나가 명령하자 빗물받이에 있던 물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면서 위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방금 빗물받이를 빠져나왔던 가스파르의 몸을 완전히 감싸 버렸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빗물을 조종하고 있는 운디네는 가스파르의 몸을 마치 자신의 안에 품듯이 물로 완전히 가두어 버렸다.
가스파르는 안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으며 운디네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버티고 있었다.
그 힘의 대결은 가스파르의 승리로 끝났다.
가스파르는 그 물의 감옥을 뿌리쳐 내며 물속을 빠져나왔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 힘을 너무나 많이 쓴 듯 벌레로 된 그의 육체는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환은 바로 총을 겨누고는 초집중 모드로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다.
‘저 색이 다른 벌레들을 조준해야 해!’
주환은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탄환을 발사하자 그 탄환들은 정확히 색이 다른 벌레들을 관통했다.
벌레로 된 육체의 가장 안쪽에 있던 커다란 벌레들이 죽자 가스파르의 몸을 이루던 나머지 날벌레들은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벌레들은 나머지 벌레들을 조종하는 중추로서 그 중추가 사라지자 모든 벌레가 구심점을 잃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