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수도를 탈환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수도에 자리를 잡는 것은 그다지 바라지 않습니다.”
“어째서지?”
“수도에는 아직도 옛 문화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데스티나로서는 데미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가 그런 것을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데스티나의 얼굴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던 데미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하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데미안은 자신의 책상으로 가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종이를 데스티나에게 건네었다.
“이것은.”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던 데스티나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이…… 이건 종전 협약서가 아닌가?”
“맞습니다.”
“진본이 틀림없나?”
“아래쪽에 보시면 이토니아 왕가를 상징하는 옥쇄의 인이 찍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받은 것이기 때문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종전 협약서로 볼 때 이토니아는 종전을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즉, 이 협약서에 대해서 황제가 답신하게 되면 두 나라 간의 지긋지긋한 전쟁이 종식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토니아 역시 좀비 사태로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의도든 군사적인 의도든 종전 협약을 맺지 않을 수가 없죠.”
“그래. 이런 날도 오는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던 결과가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검사가 검을 뽐낼 수 있는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은 아쉬운 일지만, 이것이 시대의 흐름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데미안은 데스티나에게서 종전 협약서를 다시 받아들며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는 이 협약서의 존재를 모르고 계신다는 겁니다.”
* * *
데미안이 빵을 훔쳤다가 데스티나의 도움을 받은 지 며칠 후.
목검을 들고 다리를 건너던 데스티나는 다리 아래쪽에서 철벅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소리지?’
데스티나는 다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다리 아래쪽의 강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둑 쪽으로 몸을 끌어 올리고 있는 데미안이 있었다.
데스티나는 다리의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을 통해서 둑으로 내려갔다.
주룩.
옷에 듬뿍 묻어 있는 물을 짜내고 있던 데미안은 다리 밑으로 내려온 데스티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수영하기에는 꽤 추운 날씨인 것 같아서 물어본 것이다.”
“누가 수영하고 싶어서 했겠어?”
투덜거리는 데미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스티나가 그에게 물었다.
“저 다리 위에서 던져진 건가?”
“그런 거지. 이번에는 안 걸릴 자신이 있었는데. 그나저나.”
데미안은 짜고 있던 옷을 펼쳤다. 옷의 가운데 부분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물에 빠졌을 때 어딘가 걸려서 찢어진 모양이야. 이 옷밖에 없는데 큰일 났네.”
“옷이 없는 건가?”
“그래. 너 같은 애들은 그런 걱정을 할 일이 없겠지만.”
“흠.”
데스티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너를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뭐?”
데스티나의 말에 데미안은 깜짝 놀랐다.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야? 나를 너희 집으로 데려가서 조롱이라도 할 생각이야?”
“그럴 생각은 없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당연하잖아.”
이어지는 데미안의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섞여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의 눈에는 나 같이 가난한 사람의 삶이 신기한 구경거리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개 같은 인생이라고.”
“거절하는 건가?”
“그래. 너도 나랑 자꾸 아는 체하면 이 도시에서 나쁜 소문이 날걸?”
데미안은 데스티나를 뒤로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불자 물에 젖은 데미안은 몸이 으슬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엣취!”
그때 데미안은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데스티나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자신에게 덮어 준 것을 깨달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추워 보여서.”
“동정하지 말라니까.”
데미안은 당장 그 옷을 벗어 버리려고 했지만, 몸이 너무나 추웠기에 오히려 덮고 있는 외투를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으윽. 짜증 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앞장서서 걷던 데미안은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의 뒤를 따라서 올라오고 있던 데스티나에게 말했다.
“아까 네가 말했던 초대, 아직도 유효한 거야?”
* * *
데미안은 데스티나의 뒤를 따라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데미안이 마음을 돌린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데스티나의 집으로 가서 그녀의 집에 있는 귀한 물건을 훔쳐 오는 것.
그는 애초에 데스티나의 호의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마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너희같이 고생을 모르는 애들이 별 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에 장단 맞춰 주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어. 너 같은 아가씨한테 세상의 무서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싶을 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데스티나의 뒤를 따라가던 데미안은 데스티나의 집에 좀처럼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야. 그런데 너희 집 왜 이렇게 먼 거야?”
“아. 내가 다니고 있는 기사 학교와 우리 집은 거리가 좀 있는 편이다. 조금 걸을 수밖에 없지.”
“조금 걷는 수준이 아닌데? 그 정도로 멀면 인력거 같은 걸 타고 다니지 않아?”
“걷는 것이 체력 단련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인력거를 타면 돈이 들지 않는가?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인력거를 탄다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일 뿐이지.”
“아. 그래? 그런데 기사 학교라.”
데미안은 데스티나가 들고 있는 목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런 목검을 들고 다니는 거야? 거기서 검술을 연마하느라고?”
“그렇다. 검술뿐만 아니라 말타기와 창술, 궁술도 배우고 있지.”
“그래. 좋겠네.”
데미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데미안의 꿈은 바로 기사였다.
잠들기 전에 어머니에게서 항상 들었던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는 성전 기사단의 기사였고 지금도 이토니아를 상대로 용맹하게 싸우고 계신다는 꿈과 같은 속삭임.
데미안은 어째서 아버지가 그와 어머니를 데리러 오지 않는지를 물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반드시 아버지가 데리러 오실 거다.
데미안은 아버지가 인정해 주실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문.
데미안의 아버지가 성전 기사단의 기사라는 것은 거짓말이며 데미안의 진짜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님 중 한 명이었던 범죄자라는 것.
데미안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그 소문에 젖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성전 기사단의 기사는 고귀한 자.
그런 사람이 몸을 파는 빈민가의 여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을 리가 없다는 사실.
어느덧 데미안은 그 소문을 인정해 버렸으며 열심히 살아가던 그가 도둑질에 손을 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신다는 걸 믿고,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꿈이나 꾸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데미안은 기사가 되기 위해서 수련하고 있는 데스티나가 아니꼽게 느껴졌다.
“그런데 너 날 왜 그렇게 도와주려는 거야? 나 같은 사람 돕는 척하면서 누군가를 도왔다는 기만을 하려는 거 아니냐고.”
데미안의 날이 선 물음에 데스티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뭐?”
“너를 보고 있자니 멋대로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다. 네가 말한 대로 너에게 도움을 주면서 스스로 즐거움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면이 나에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군.”
“뭐야. 그게 대체.”
“미안하군.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 도착했다.”
데스티나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자신의 집을 가리켰다.
데스티나의 집을 확인한 데미안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스티나가 어느 정도 있는 집의 자제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저택은 그 규모가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야. 여기가 정말로 너희 집이야?”
“그렇다.”
“너. 사실 엄청난 직위의 귀족 출신인 거야? 그 정도 집이면 나 같은 꼴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괜찮다. 내가 말을 해두면 되니까.”
그때, 경비병으로 보이는 병사가 정문을 살짝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그러자 데스티나는 경비병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예. 하교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때, 경비병의 시선이 데스티나의 뒤에 서 있는 데미안에게 닿았다.
“이봐. 어째서 네가 아가씨의 옷을 가지고 있는 거지? 이리 내!”
경비원이 손을 뻗어서 데미안에게서 옷을 빼앗으려고 하자 데스티나는 그를 만류했다.
“제 친구입니다. 잠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시종장님을 불러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경비원이 문을 열어 주자 데스티나 문을 지나쳐 정원 쪽으로 들어갔다.
데미안 역시 조심스럽게 그녀를 따랐다.
저택의 정원이 너무나도 넓어 역시나 한참을 걸어야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택에 들어가자 데스티나는 데미안을 어느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안에는 데미안에 생전 보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와 침대, 책상, 테이블과 부드럽고 보들보들한 감촉의 이불까지.
완전히 넋이 나간 데미안은 훔칠 물건을 눈여겨볼 생각조차도 못 한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편하게 앉아라.”
데스티나의 말에 데미안은 비로소 의자를 빼고 앉을 수가 있었다.
“여기는?”
“손님방이다.”
“이렇게 좋은 방에 내가 있어도 되는 거야?”
“너는 내 손님이니까.”
데스티나의 한마디에 데미안은 무언가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데스티나의 말에 손님방의 문이 열리며 인자해 보이는 긴 수염의 시종장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예. 시종장님. 수고로우시겠지만 제 친구를 위해 씻을 준비와 갈아입을 옷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데스티나의 부탁에 시종장은 알겠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목욕물을 덥히는 것은 시간이 조금 걸리니 준비가 끝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종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데미안은 데스티나에게 물었다.
“너는 집의 하인들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거야?”
“버릇이다.”
“버릇?”
데스티나는 창문 쪽으로 가더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정실부인이 아니다. 아버지의 첩일 따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