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예기치 못한 휴식시간이 생기자 싱클레어는 데스티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렇게 승산 없는 대련을 계속하시려는 겁니까?”
“어차피 단 한 판밖에 남지 않았다.”
데스티나는 땀을 닦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제가 봐도 이건 단지 실력을 겨루기 위한 대련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지금 두 분 사이에 뭔가 갈등이 생기신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대련에서 내가 이기면 단장 자리를 데미안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고.”
“저희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그때, 단원이 다른 목검을 가지고 데스티나에게 다가왔다.
데스티나는 목검을 받아들고는 다시 데미안을 상대하기 위해서 싱클레어를 뒤로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도 이길 생각이십니까?”
“그래. 이제야 눈에 익기 시작했거든.”
데스티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데미안과 마주 섰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데미안은 데스티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후회 없이 겨뤄 보도록 하지.”
10회 대련의 마지막 회자.
데미안은 대련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목검을 휘둘렀다.
구경꾼들의 눈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스피드.
그렇지만 데스티나는 그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목검으로 데미안의 공격을 간신히 받아 내고는 역으로 반격을 감행했다.
딱!
데미안과 데스티나의 목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데미안은 데스티나의 움직임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여전히 대련에서 데미안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지금 데스티나는 분명 데미안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데미안의 목검이 언제라도 데스티나에게 닿을 수 있었지만 데스티나는 간신히 그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막아 내거나 피해 냈다.
데미안으로서는 데스티나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 대련을 마무리 짓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더욱더 데스티나를 압박해 들어갔다.
지금은 데스티나가 잘 막아 내고 있었지만, 방어적인 자세를 고수한다면 언젠간 데미안의 목검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목검을 가로로 휘둘렀을 때, 데스티나는 몸을 낮추면서 그 공격을 피했다.
데미안의 목검이 데스티나의 머리 윗부분을 스치고 지나갔다.
데스티나는 곧바로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데미안이 더 빨랐다.
공격이 빗나가자 데미안이 손안에서 목검을 회전시켜서 바로 데스티나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데스티나는 자신의 오른팔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오른팔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맞추었다.
데스티나는 몸을 낮춘 상태에서 몸을 돌렸다.
그것은 일부러 등을 보이는 것과 같은 자세.
데스티나는 그 자세에서 마치 목검으로 배를 찌르듯 그 목검을 자신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르게 밀어 넣었다.
툭!
데미안의 허를 찌른 그 목검의 끝은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서 달려든 데미안의 복부에 닿았다.
그리고 데미안이 휘둘렀던 목검은 데스티나의 머리 위에서 멈춘 채였다.
승리.
그것은 마지막의 대련에서 데미안에게 일격을 맞힌 데스티나의 승리였다.
데미안의 자신의 패배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의 검은 데스티나에게 닿지 않았지만 데스티나의 목검의 끝은 분명 데미안의 복부에 닿은 채였다.
“승부가 났군.”
데스티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목검을 거두었다.
데스티나가 싱클레어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싱클레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데스티나의 승리를 선언했다.
“사전에 합의된 룰에 의하여 이번 대련의 승리는 데스티나 님의 승리입니다.”
“이제는 더는 단장이 아니다.”
데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에 물었다.
“데미안. 주환과 루카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응? 방금 주인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나?’
군중에 섞여서 지금까지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이온은 데스티나의 입에서 주환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데미안은 데스티나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데미안의 대답이 없자 데스티나는 싱클레어에게 자신의 목검을 건네었다.
싱클레어는 그 목검을 받아들자 데스티나는 대련이 벌어졌던 그 장소를 떠나려 했다.
그러자 모여 있던 군중은 데스티나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미안은 그 역시 싱클레어에게 목검을 건네고는 데스티나의 뒤를 따랐다.
데미안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데스티나를 뒤쫓았다.
“이대로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곳에는 내가 더 이상 있을 자리가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단장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성전 기사단을 재건한 것도, 사람들을 모은 것도 단장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울 밑바탕으로 삼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것을 바란 적이 없어.”
“그럴지도 모르죠!”
데미안은 언성을 높이며 데스티나의 어깨를 잡았다.
“데스티나 님.”
데미안을 데스티나를 단장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당신의 부하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서 묻도록 하겠습니다.”
데미안은 자신의 양손으로 데스티나의 양어깨를 잡았다.
“저는 데스티나 님을 만난 이후로 당신에게 헌신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위해서 일했고 서로 진정으로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끝까지 저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자네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떠나려는 게 아니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자네와 나는 이제 뜻이 달라졌기에 다른 길을 가려는 것뿐이다. 이제 자네는 나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어. 자네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자네가 그들을 이끌어야 해.”
그리고 데스티나는 데미안의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이제는 자네만을 의지하는 사람도 생긴 것 같고 말이야.”
데스티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르테어가 서서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테어는 데스티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주환 님과 루카 님은 지금 칼데브 마을에 있을 겁니다.”
“칼데브 마을?”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곳에 괴물 퇴치를 하러 가셨죠.”
“그렇군. 그럼 나도 두 사람을 도우러 가야 하겠지.”
데스티나가 그렇게 말하자 데스티나의 양어깨를 잡고 있던 데미안의 손아귀 힘이 약해졌다.
그러자 데스티나는 몸을 돌려 데미안에게서 멀어져 갔다.
데미안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두 사람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아르테어는 데스티나가 데미안을 떠나가자 발걸음을 옮겨서 데미안에게 다가왔다.
“결국, 떠나시려는가 보군요.”
아르테어의 말에 데미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함께한 전우의 곁을 떠날 정도로 황제에 대한 충성이 중요하단 말입니까?”
“데스티나 님의 말씀대로 이제 데스티나 님과 데미안 님은 서로 다른 길을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데미안 님은 황제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염원을 가지고 계시죠.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 기회는 황제의 힘이 가장 약해졌을 때밖에 없는 것이고요. 저의 소견일 뿐이지만 데미안 님이 그 길을 계속 걸으신다면 황제를 섬기는 데스티나 님과는 언젠가 분명 부딪칠 수밖에 없겠죠.”
“황제 따위는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데스티나 님은 황제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에 얽매어 계신 거죠.”
“만약 황제가 없었다면 데스티나 님이 혼란스러워하시는 일도 없었겠죠.”
아르테어가 데미안에게 넌지시 그렇게 말을 던졌다.
“만약 우리가 황제와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없앤다면.”
데미안은 무엇인가 홀린 사람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데스티나 님은 저에게 돌아오실 겁니다. 데스티나 님을 홀리고 있는 허상을 지워 버리면 데스티니 님은 진짜 해야 하실 일에 눈을 뜨실 테죠.”
데미안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데스티나는 로즈버드 빌리지로 넘어가 그곳에서 촌장을 만난 뒤 사정을 설명하고 잠시 방 하나를 빌렸다.
그곳에서 데스티나는 주환과 루카를 만나기 위해 떠날 짐을 꾸렸다.
이곳에서 머물면서 주환과 루카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어떠한 위험에 빠져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데스티나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서 빨리 움직일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데스티나가 꾸리고 있는 짐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방에서 데스티나가 갈아입은 옷은 성전 기사단의 단장일 때 입던 화려한 갑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입은 것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복장일 뿐이었다.
성전 기사단에 요구한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더 좋은 장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스티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는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그들의 친절에 의지할 수 없었다.
로즈버드 빌리지의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서 성전 기사단이 보여 준 활약상만으로도 그녀는 매우 많은 것을 받은 셈이었다.
데스티나는 자신의 가방에 여분의 옷가지를 넣은 뒤 촌장에게서 얻은 조금의 식량과 물을 같이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데스티나는 자신의 가방을 짊어지고는 방의 한구석에 놓여 있는 롱소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촌장이 데스티나에게 자신들을 구해 준 것에 대한 답례로 선물한 것이었다.
데스티나는 롱소드를 집어 들고 검집에서 빼 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비록 명검은 아니었지만 잘 손질된 것이 느껴지는 괜찮은 검이었다.
데스티나는 그 검을 등에 메고는 마지막으로 촌장과 인사를 나눈 뒤 로즈버드 빌리지를 나섰다.
* * *
로즈버드 빌리지를 떠나 칼데브 마을로 향하던 데스티나는 문득 누군가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렇기에 한참을 걷던 데스티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적한 산길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데스티나는 분명 근처에 누군가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데스티나는 산길의 한쪽에 서 있는 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데스티나는 나무를 향해서 소리쳤다.
“숨어 있을 필요 없으니 나오도록.”
데스티나의 말에 나무의 뒤쪽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온 이는 바로 이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