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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회귀자 (1)
Episode 1: 회귀자 (1)
“허억!”
가위에 눌려 있던 숨을 간신히 내쉬면서, 이준기가 눈을 떴다.
익숙한, 아니, 익숙했던 천장이다.
신림동 고시원의 1.5평짜리 작은 방, 모기를 잡은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낮은 천장.
이준기는 일어나서 책상 위의 휴대폰을 집었다.
2021년 8월 29일 오전 8시 14분
바로 그날.
3년째 계속되던 경찰 공무원 공시족 생활을 청산한 바로 그날이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 이준기가 앉아 있는 침대 위로 떨어졌다.
8월 말.
다른 사람들에게 열대야는 이미 일주일도 전에 끝났지만, 고시원 입주자들에게 그것은 아직 진행형이다.
이준기는 창문을 열었다.
신림동 고시촌의 서늘한 아침 공기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이준기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산발이 된 더벅머리에서 땀방울 하나가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살아 돌아온 것이 맞다.’
*****
이준기는 고시원 총무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주 세차게.
“아이, 정말. 아침부터. 뭐예요? 변기 막혔어요?”
총무가 게슴츠레한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총무님, 저 오늘 방 빼려고요. 보증금 돌려주세요.”
이준기는 그를 내려다보며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보증금? 아, 열쇠 보증금요? 짐 다 빼셨어요?”
“네. 짐이라 봐야 지금 이 가방 안에 든 게 다예요.”
“열쇠 주시고요, 계좌번호 불러주세요. 오늘 오전 중으로 쏴드릴게요. 5만 원.”
이준기는 가방을 들고 고시원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신림역에 내렸다.
지하철역 락커에 가방을 보관하고 밖으로 나왔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신림사거리도 비교적 한산했다.
아침 커피 생각이 간절한 그는 습관적으로 근처 편의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 이게 아니지. 가난뱅이 근성이란.’
스타벅스에 들어가 벤티 사이즈로 카페 라테를 주문했다.
커피를 받아 그는 바깥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차원문이 세상에 나타난 지 2년이 넘었다.
몬스터들의 습격에 혼비백산했던 처음의 적응기가 지나고, 구원자들에게 차원문 처리를 맡긴 세상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구원자들끼리의 전쟁으로 인해 세상은 더 어두운 나락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아직 몇 개월은 더 기다려야 했다.
보통 사람들을 전부 노예로 삼겠다는 조슈아 테일러의 선언도 그리 멀지는 않았다.
그 격렬한 역사의 소용돌이로 세상이 굽이쳐 밀려들어 가기 전, 태풍 직전의 고요와 같은 평온함이 세계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여유로운 늦여름 일요일이라는 것을 즐기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구원자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까지도.
2021년 8월 29일 일요일.
그가 구원자로서 각성한 날이다.
오전 11시 45분 정도였을 것이다.
평소처럼, 점심을 먹기 위해 고시생 식당 앞에 줄을 서 있었다.
12시가 되면 줄이 길어지니, 조금 일찍 나오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을 보고 놀라, 혹시 더위 먹은 것 아닌가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이거, 이거 안 보이세요? 여기 컴퓨터 화면 같은 게 떠 있잖아요!”
어쩔 줄 몰라서,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하루를 허비했다.
검색 결과는 명확했다.
그러나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구원자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틀이나 지나서 경찰 쪽에서 연락을 해왔다.
구원자 특채라는 걸 제안했다.
3년을 쏟아부어도 되지 않던 일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쉽게 되다니.
경찰에 특채되고 나서야 차원문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국가 기관 소속으로는 앞날이 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일주일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경험도 일천한 초짜 구원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길드도 많지 않아, 작은 길드에 가입했다.
처음에 그렇게 시간을 낭비했으니, 나중에 조슈아 테일러 무리에게 일방적으로 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그는 휴대폰으로 빠르게 검색을 시작했다.
세상이 다시 일상의 평온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차원문에 관한 소식은 여전히 뉴스 페이지의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 어제 오후 9시경,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정문에 차원문 등장.
- 국회에 나타난 차원문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차원문은 총 37개로 늘어나.
- 한국 구원자 길드협회, 차원문 관리 소홀에 대한 입장 발표. 별다른 내용은 없어.
- 사설. 현실을 게임이라 생각하는 구원자 길드협회, 국가적 이익 우선시해야.
구원자들의 순수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미국 애틀랜타, ‘남부의 힘’을 시작으로 우후죽순처럼 세계 각지에 설립된 구원자들의 이익집단, 소위 ‘길드’는 빠른 속도로 사회의 자원과 부를 빨아들였다.
울산광역시 현대중공업 본사 앞에 나타났던 차원문 사태가 구원자들의 이기심을 잘 보여준다.
길드 ‘문경새재’는 차원문 정리에 대한 대가로 현대중공업에 거액을 요구했다.
차원문 정리에 대한 대가를 정부가 아닌 현대중공업에 요구한 것만 보더라도, 구원자들이 얼마나 자기 이익 관리에 철저해졌는지 잘 알 수 있는 사례였다.
현대중공업 경영진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수십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경찰과 군대가 차원문 주위를 포위하고 경계 근무를 섰지만, ‘물샐 틈 없는 방비’라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
차원문을 빠져나오자마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상가로 도망치는 몬스터를 전부 잡을 수는 없다.
현대중공업 경영진은 차원문 발생 5일째에 결국 백기투항을 했다.
길드가 요구하는 수수료의 일부를 울산광역시가 분담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에 대한 대가로, 현대중공업은 서울로의 사옥 이전을 백지화한다는 약속을 담은 문서를 울산광역시에 전달했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길드 ‘문경새재’는 수수료 계약 즉시 구원자들을 투입해서 차원문을 정리했다.
정리에 걸린 시간은 불과 다섯 시간.
그런 대단치도 않은 차원문을 방치해서 수십 명의 인명피해를 강요할 만큼, 구원자들의 양심은 타락해 있었다.
*****
이준기가 구원자 각성 초기에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던 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각성 직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틀이나 시간을 낭비한 것.
둘째, 얼떨결에, 아니 세상 물정 모르고 경찰 특채를 덥석 승낙해버린 것.
셋째, 소속조직을 경찰에서 길드로 바꾸기는 했지만, 군소 길드에 가입하는 바람에 더 좋은 레벨업 경로를 놓쳐버린 것.
다시 주어진 기회. 이준기는 지난번의 실수를 용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국회의사당에 차원문이 나타났다는 뉴스를 접했으니 일단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준기는 컵에 남은 라테를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양이 너무 많다.
‘습관대로 벤티 사이즈를 시켜서 이게 웬 고생이냐.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남은 커피는 버리고 가자.’
스타벅스를 나와 이준기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계단을 반쯤 내려가던 그는 또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가난뱅이 근성은 뼛속 깊이 박혀 있는 건가. 이것 참.’
지금 그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늦여름 햇살이 아침 공기의 서늘함을 빠른 속도로 몰아내고 있었다.
열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각성까지 한 시간 정도.
이준기는 택시 호출 앱을 이용해서 택시를 호출했다. 그것도 우선 배차로.
국회의사당에 도착했지만, 택시는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어제부터 비상 경계가 발령되어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뉴스 보셨죠? 차원문이 나타났다고요.”
전경 부대의 소대장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서 택시를 제지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갈게요.”
이준기는 택시에서 내렸다.
“어디를 가신다는 겁니까? 차원문이 있어요. 일반인 출입금지입니다.”
전경 부대 소대장이 이준기를 가로막았다.
“구원잡니다.”
이준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간단한 스킬을 보여 구원자 신분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스킬에 사용할 책이 없다.
경찰이나 국가 기관 소속 구원자라면 신분증을 보여주면 된다.
길드 소속 민간 구원자라고 해도, 길드 회원증을 보여주면 대부분의 경우 아무 문제 없이 무사통과다.
외국에서라든가, 신분증 같은 종이 쪼가리가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시청각 효과가 화려하면서도 값싼 스킬을 하나 보여주면 즉각 말귀를 알아듣는다.
그럴 때 이준기가 자주 쓰던 것이 마나 계열 초급 기술, ‘마나 폭발’이었다.
- 마나 폭발. 마나 책 1권 소요. 사정거리 1미터. 마나 책을 폭발시켜, 지금까지 입힌 피해의 100%를 추가로 입힙니다.
지금 이준기의 길을 막아서는 전경 소대장은 지금까지 입은 피해가 없으므로, 마나 폭발을 해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총천연색 불꽃놀이와 같은 시각효과, 그리고 경쾌한 폭발음.
구원자의 표식으로 부족할 것이 없다.
효과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구원자 확인 수단이다.
그러나 지금 막 각성한 이준기에게는 책이 단 한 권밖에 없다.
그걸 겨우 신분 확인 수단으로 날려버릴 수는 없다.
스킬 사용으로 소모된 책이 복원되는 데는 24시간, 정확하게는 자정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 소요된다.
매일 그 지역 시각 0시에 모든 책이 리셋된다.
“시, 실례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신분증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경 소대장은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구원자들이 사회의 특권층으로 군림한 지 오래됐다는 증거다.
이준기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전방을 주시하면서 말하는 품새가, 상관 앞에서 바짝 쫀 이등병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전에 각성했습니다. 그래서 보여드릴 게 없어요. 제가 차원문으로 들어가는 걸 눈으로 확인하시면 됩니다.”
이준기는 아쉬운 대로 우선 그렇게 말했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젯밤에 나타난 차원문이므로, 아직 정부 관리하에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어물쩍 몰래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협회가 차원문에 길드를 배정해 버리거나, 길드 한두 군데가 막무가내로 차원문 앞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해버리면, 무소속 구원자 따위는 차원문 근처에 얼쩡거릴 수도 없게 된다.
‘1레벨 구원자 따위. 일반인보다 체력과 운동 능력이 조금 뛰어날 뿐, 별다를 것도 없는 존재다. 지금 내가 여기서부터 뛰기 시작해서 경찰과 군인들을 따돌리고 차원문 안으로 점프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휴대폰으로 살펴보니 국회의사당 정문에서 의원회관까지는 약 200미터.
현재 육상 200미터 세계 기록은 우사인 볼트. 약 19초 남짓.
1레벨 구원자라면 그 정도까지는 못해도 아마 24초면 주파 가능할 것이다.
그 정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경찰과 군인들을 따돌리고 의원회관 앞마당의 차원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과 군인들이 그의 길을 가로막거나 무기로 위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구원자라고 해서 칼이나 총 같은 일반적인 무기에 면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레벨업과 경험치가 중요해도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죄, 죄송하지만, 신분증 확인 없이는 곤란합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도 명령받은 대로 해야 해서요.”
그렇게 구구절절이 변명하는 것으로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전경 소대장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구원자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만, 저, 저도 한 가정의 가장이라서요. 직장에서 쫓겨나면 어떡합니까.”
‘이 정도로 착하고 겁도 많은 사내라면 설마 날 쏘지는 않겠지. 문제는 안에 들어갔을 때다. 밖이야 전경 부대 정도로 막고 있지만, 차원문 근처에는 중무장한 군대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탱크도 있을 것이고. 국회의사당 안이니 평소보다 오히려 병력이 더 많을 것이다.’
목숨을 걸 수는 없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시간을 허비하며 겨우 레벨 3이 되었던 예전의 역사를 재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이준기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전 세계가 조슈아 테일러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
“소대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준기는 소대장에게 물었다.
그의 가슴에 이름표가 달려 있었지만, 이준기는 그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통성명이라도 해서, 이 사람의 호의를 사고 싶었다.
“저, 저는 김한표라고 합니다.”
“김한표 소대장님, 지금 들여보내 주시면 제가 잊지 않고 은혜를 갚겠습니다.”
김한표 소대장의 얼굴에 고민하는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구원자들에 의해 세상의 모든 권력이 탈취당했을 때, 그 곁에서 기생하며 살아가려고 했던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저, 저도 구원자님 성함을 여,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 이름은 이준기입니다, 김한표 소대장님.”
“이준기 구원자님. 부디 세상을 구해주십시오.”
김한표 소대장은 옆으로 물러나며 이준기에게 길을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김한표 소대장님. 제 전화번호는 010-####-####입니다.”
이준기는 국회의사당 정문을 통과해서 걸어 들어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통 수준 구원자의 거만함을 연기하며 그는 걸었다.
국회 중앙 잔디밭을 통과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군인이 길을 막으며 이준기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구원자인 게 당연하잖아요. 그걸 확인받고 정문을 통과해서 들어온 겁니다.”
“죄송하지만, 검문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준기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척하다가, 갑자기 군인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서라는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별다른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구원자에게 총을 겨눌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구원자 사칭 사기가 그렇게 많은 것이다.
차원문이 보이자, 이준기는 마치 다이빙이라도 하듯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