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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엘리트 학살자 (1)
Episode 2: 엘리트 학살자 (1)
새벽녘에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두막 지붕에 통통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이준기는 잠을 깼다.
눈을 뜨고 상태창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 2021년 8월 30일. 월요일. 오전 4시 59분.
‘어제 일찍 잠들었으니 이제 일어나볼까.’
이준기는 양팔을 크게 벌려 기지개를 켜고 나서 목을 양쪽으로 한 바퀴씩 돌렸다.
정부 측이 이틀 이상 차원문 관리를 하려고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21년 8월이라면, 경찰이나 국방부 소속으로 활동하는 구원자는 다 합쳐서 열 명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이 던전에 대한 관리 권한은 정부에서 협회로, 협회에서 ‘드래곤볼’ 길드로 넘어갈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까지는 그렇게 될 것이고, 길드 소속 공략 파티가 진입해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꾸준히 레벨업을 하면서 이 던전을 깰 자신이 있다. 하지만 다른 파티가 들어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차원문 너머의 세계, 던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당연히 그곳에 있던 사람들밖에 알 수 없다.
살인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이 있어도 살인은 일어난다.
목격자도 확보할 수 없는 던전에서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길드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전에도, 던전에서 살인 사건은 꾸준히 일어났다는 것이 구원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몬스터에게 당한 동료를 위해 슬퍼하는 모습쯤이야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다.
자신들에게 할당되기도 전에 던전을 스틸한 이준기를, 오늘이나 내일 들어올 파티 멤버들이 달갑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몬스터들보다 더 큰 위협이다.
‘만약 오늘 공략 파티가 진입한다고 하면, 오늘 밤부터는 오두막에서 잘 수도 없다.’
이준기는 오두막을 나가기 전에 무기를 점검했다.
숏소드와 방패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부족한 화살을 보충해서 채워 넣었다.
사냥이 끝날 때마다, 이준기는 재활용이 가능한 화살을 시체에서 수거해 화살통에 넣었다.
그러나 촉이 갈라지거나 대가 부러진 화살이 생각보다 많았다.
던전 입구 무기 거치대에서 구한 공짜 화살이다.
그 정도 품질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총알받이조차 필요하지 않은 가장 평온한 시기에 각성한 무소속 1레벨 구원자들이나 그런 공짜 무기를 쓴다.
몇 달 후였다면, 길드 전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몇 달 뒤의 세계였다면, 갓 각성한 1레벨 구원자들에게도 여러 개의 길드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다.
그랬다면 길드 입구에 비치된 공짜 무기를 쓸 일도, 쓰러진 고블린에게서 노획한 정체불명의 고기를 먹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후한 대접은 잡아먹기 전에 돼지의 살을 찌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각성하자마자 그런 후한 대접을 받고 의기양양해진 신규 구원자들은 길드 전쟁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산화했다.
2레벨을 달기도 전에 죽은 자의 수가 수천을 헤아린다.
“인류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고귀한 구원자의 99%가, 쓸데없는 전쟁으로 사망해버렸습니다.”
2022년 5월, 조슈아 테일러가 길드 ‘오버시어’ 창립 선언 연설 당시 했던 말이다.
사망자의 절대다수가 10레벨도 되지 못한, 새내기 구원자들이었다.
역사가 기억하는 길드 전쟁의 시작은 미국에서 벌어진 동부 연합 대 서부 연합의 세력다툼.
그러나 그 뿌리는 차원문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존재했던 구원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이다.
권력과 부를 더 많이 가질수록 구원자들은 불행해졌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더 많이 가진 자들을 저주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한 전쟁, 그것이 길드 전쟁의 본질이다.
‘한 시간만 지나면 아침 해가 떠오른다. 몬스터 놈들이 야간 시야의 비교 우위를 상실하면, 그때 오늘 사냥을 시작한다. 오늘 목표는 빠르게 4레벨까지 가는 것. 하지만 일단 길드가 진입해 들어오면, 몬스터보다는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준기는 활과 활시위, 그리고 화살촉을 점검하면서 해가 뜨기까지의 한 시간을 보냈다.
철저한 준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법이다.
*****
잠시 거세지던 비는 해가 뜨면서 완전히 그쳤다.
던전 안에는 커피가 없다.
아침을 커피로 대신하는 이준기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카페인을 섭취할 수 있다면 집중력이 증가할까?’
이준기는 코볼트 한 무리를 발견하고 활시위를 당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는 피해 다니던 코볼트 무리지만, 경험치 바가 거의 다 찬 지금이라면 괜찮다.
밤새 재생된 스킬 책을 모두 쏟아붓고, 레벨업으로 재생된 스킬 책을 또 사용할 수 있는 타이밍이다.
- 매직 미사일. 마나 책 2권 소요. 사정거리 50미터. 마나 에너지를 응축한 발사체 다섯 개를 연쇄적으로 발사합니다. 채널링이 필요하며, 5초 동안 매초 1개의 발사체가 발사됩니다. 적중할 때마다 피해가 증가합니다.
정상적인 파티라면, 탱커가 적을 도발한 상태에서 마법사가 쓰는 스킬이다.
큰 한방 대미지보다 자잘한 대미지가 연쇄적으로 박히는 것이 몬스터를 더 자극한다.
따라서 매직 미사일은 훌륭한 대미지에도 불구하고, 적을 크게 도발하는 단점 때문에 잘 쓰이지 않는 기술이다.
탱커의 도발 스킬도 책을 소모한다.
마법사가 파티에서 매직 미사일을 난사한다는 것은, 탱커에게 스킬 사용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술이니 이런 기술이 환영받을 리 만무하다.
길드 전쟁 때 시시때때로 일어나던 난전 상황에서나 쓸 만한 기술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 코볼트 보병 중 한 놈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준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볼트 궁수를 향해 매직 미사일을 시전했다.
코볼트 무리와의 거리는 60미터 정도.
뽈뽈 거리며 빨리도 돌아다니는 코볼트지만, 다리가 짧아 5초 내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거리다.
투명한 표지의 마나 책 두 권이 이준기의 주위를 반 바퀴 돌고 그의 손끝에서 모였다.
1초에 한 개씩, 빛으로 만들어진 짧고 굵은 막대 모양의 에너지 덩어리 다섯 개가 빠른 속도로 숲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 3.
- 4.
- 6! 치명타!
- 8.
- 9.
불화살을 장전하려던 엘리트 코볼트 궁수는 1초에 하나씩 날아와서 박히는 매직 미사일에 맞으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졌다.
일반 코볼트에 비해 체력이 두 배나 되는 엘리트다.
하지만, 치명타 한 차례가 포함된 매직 미사일 다섯 개를 모두 맞으니 어쩔 수가 없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상태창이 떠올랐다.
- ‘엘리트는 처음이야’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보상: 스탯 포인트 5.
‘엘리트 첫 킬에 대한 보상이군. 사냥이 끝난 다음에 처리하자.’
투명한 상태창 너머로, 코볼트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상태창을 닫고, 허리춤의 숏소드와 등 뒤의 방패를 꺼낼 시간도 충분했다.
처음 날아간 화살에 다리를 맞은 코볼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마리가 도착했다.
애드가 되지 않도록, 안전한 공간으로 적을 유도하는 무빙탱은 이준기의 장기.
그건 스킬 책을 소요하는 그런 스킬이 아니라 그의 몸이 기억하는 스킬, 말하자면 ‘요령’이다.
무빙탱을 하면서 여유있게 코볼트 두 마리를 정리했지만, 다리에 화살을 맞은 녀석은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탱킹을 한 결과다.
쩔뚝거리며 다가오는 애처로운 코볼트 한 마리를 바라보며 이준기는 생각했다.
‘너무 쉬운데.’
이렇게 쉬웠나 다시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딱히 비교할 만한 경험은 없었다.
과거의 그는 길드 파티로 별 볼 일 없는 던전을 다니면서 레벨업을 했었다.
파티를 두 개도 만들 수 없는 작은 길드였다.
탱킹을 하게 된 계기도 돌발상황 때문이었다.
사냥 중에 탱커가 죽었는데, 이준기를 제외하고는 탱커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파티에서 가장 낮은 레벨이 탱킹을 하는 상황이었지.’
네 번째 코볼트가 쓰러지자, 빛이 그를 감쌌다.
- 3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 스탯 포인트 5점이 지급됩니다.
엘리트 킬 업적과 3레벨 달성, 합쳐서 새로 얻은 스탯 포인트는 10점.
이준기는 또다시 민첩으로 몰아넣었다.
- 힘 10. 민첩 40. 체력 20. 정신력 10. 물리 저항 0. 마력 저항 0.
민첩 40이라니, 과거의 이준기는 레벨 10이 넘어서야 달성한 수준이다.
어디에서 어떤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스탯 포인트를 배분하고 나서, 이준기는 스킬창을 열었다.
일곱 색깔의 책들이 화면 안에서 빙빙 돌면서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바람.”
초록색 표지, ‘바람의 책’이 강강술래를 돌던 원을 이탈해서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스킬창에 새로운 스킬이 추가되었다.
- 점멸. 바람 책 1권, 마나 책 2권 소요. 즉시 시전자를 10미터 전방으로 순간 이동시킵니다.
저레벨 스킬 중에도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스킬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리 저항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스톤 스킨’, 정신력을 증폭시켜 체력 회복 속도를 빠르게 하는 ‘생명수’, 그리고 즉각 체력을 회복시키는 ‘레서 힐’ 등 기술이 존재한다.
‘그러나 ‘점멸’ 만한 스킬은 없지.’
전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즉 해당 분야의 책을 더 많이 모을수록 스킬은 강해진다.
지금은 10미터 전방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이지만, 바람 책과 마나 책을 많이 모을수록 점멸 스킬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진다.
더 멀리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수준을 지나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7시 28분.
‘출발이 좋다.’
*****
이준기는 어제 와보지 않았던 던전의 북쪽 부분을 정찰했다.
적들의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한 뒤, 그는 한 무리의 코볼트를 향해 활을 조준했다.
피유우!
엘리트 코볼트 궁수에게 노획한 불화살이 공기를 태우며 날아갔다.
코볼트 궁수가 불화살을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이준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리 물색해둔 방향으로 냅다 달렸다.
불화살을 맞은 코볼트 궁수는 화염 대미지로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나머지 녀석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잡으면 된다.
그를 향해 몰려오고는 있지만, 쓰러졌던 코볼트 궁수와 나머지 코볼트 보병들 사이에는 거리가 벌어졌다.
이준기는 던전 오두막표 보통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엘리트 궁수에게 노획한 불화살은 겨우 세 개.
아껴 써야 한다.
화살을 다리에 맞은 코볼트 보병 하나가 고꾸라졌다.
침착하게, 이준기는 화살을 하나 더 날렸다.
불화살을 맞고 다 죽어가던 코볼트 궁수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일반 화살을 맞고 고꾸라졌다.
이제 상황은 아까와 마찬가지.
코볼트 보병 두 마리를 상대하고, 나중에 도착하는 부상병을 상대하면 된다.
‘불화살이 두 개 남았다. 코볼트 사냥에 다 소모해도 될까?’
이준기는 쓰러진 코볼트들의 시체를 룻하면서 생각했다.
‘불화살의 위력이 생각보다 세다. 이 정도라면 보스전에서도 변수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아직 보스의 오두막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던전 전체를 한 바퀴 돌았는데도 찾지 못했다.
‘역시 D급 던전. 쉽지는 않다 이거지. 보스 오두막은 마법으로 은폐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열쇳돌을 찾아 마법을 해제해야 한다. 열쇳돌은 술법사의 정예 부하인 엘리트 코볼트 중 한 녀석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활과 불화살을 손에 들고 이준기는 시계 방향으로 던전을 돌았다.
주변이 산으로 막혀 있고, 가운데는 호수가 위치한 엽전 모양의 던전이다.
호수는 지름은 500미터도 되지 않아 가운데에 섬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저게 호수가 아닐 수도 있다. 호수 한가운데서 술법사의 오두막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은신자의 오두막’ 스타일의 던전은 과거에 많이 경험했다.
은신자가 그냥 숲속의 작은 집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E급 던전이다.
D급 던전쯤 되면 은신처 자체가 은폐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열쇳돌은 던전 보스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오크 술법사라면 엘리트 코볼트나 오크 경비병 정도다.
최악은 역시 랜덤 드랍인 경우인데, 운이 나쁘면 던전 안의 몬스터를 모두 잡고 나서야 열쇳돌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은신처가 드러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가장 흔한 경우는 호수나 산, 거대한 나무와 같이 눈에 띄는 지형물이 은신처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최악은 그냥 숲속 어딘가 별다른 특징도 없는 곳에 오두막이 드러나는 경우다.
열쇳돌을 찾은 다음에도 한참 동안 던전 전체를 다시 수색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준기는 마음이 편했다.
최악의 경우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나쁠 게 없기 때문이다.
‘경험치 모은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이템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오크 경비병이 쓰는 무기라도 내가 지금 들고 있는 공짜 무기보다는 나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며 지도의 서쪽을 헤쳐가고 있는데, 먼 곳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어제 정찰했을 때는 듣지 못했던 소리인데.’
이준기는 몸을 한층 더 낮추고 수풀 사이를 이동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까부터 들리는 소리는 커다란 나무에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몸집이 큰 근육질의 오크가 곰의 머리를 붙잡고 나무 기둥에 후려치고 있었다.
보통 오크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커 보였다.
‘이렇게 재수가 좋을 수가.’
엘리트 레벨 오크 경비병이다.
소위 ‘희귀몹’이다.
백 개가 넘는 던전을 돌아다니며 단 세 번밖에 마주치지 못했던 희귀몹.
세 번 다, 에픽급 아이템을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