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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2화 (1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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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 고블린 광산 (2)

Episode 5: 고블린 광산 (2)

자세를 낮추고 조금 걷다 보니 다음 표적이 눈에 들어왔다.

오크 약탈자.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양손에 단검을 든 모양새가 누가 봐도 노상강도다.

주택가나 길가에 있어야 어울릴 만한 비주얼.

숲속에서 뭘 약탈하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피잉!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서 오크의 팔뚝에 박혔다.

- 화살로 오크 약탈자에게 4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오크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고 포효했다.

“크아아!”

달려드는 오크를 향해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꺼내 들었다.

이쪽에 닿지도 않는데, 다짜고짜 양손에 든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적.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휘둘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반원을 그었다.

- 20!

휘두르던 왼팔을 거두면서 오크가 비명을 질렀다.

뒷걸음질 치는 이준기를 향해 오크 약탈자가 오른손을 뻗어 단검을 앞세우고 돌진했다.

검을 수직으로 세워 한 차례 막아내기 성공.

다음에 이어지는 오크 약탈자의 왼손 공격은 몸을 뒤로 빼면서 피했다.

왼손을 앞으로 쭉 내민 오크의 왼쪽 옆구리가 비었다.

그곳을 파고드는 패시파이어.

“크억!”

- 치명타! 39!

‘럭키!’

치명타가 터지는 바람에 계산이 간단해졌다.

옆구리를 베이고 뒤로 몸을 빼려는 오크 약탈자를 향해 이준기는 달려 들었다.

펑!

폭발음과 함께 엷은 파스텔톤의 불꽃놀이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 마나 폭발로 오크 약탈자에게 63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오크 약탈자가 죽었습니다.

곧바로, 휘황찬란한 빛이 그를 감쌌다.

- ‘오크 학살자’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보상: ‘오크 학살자의 반지’

이준기는 공중에서 인벤토리 화면 안으로 날아들어 오는 오크 학살자의 반지를 손으로 낚아챘다.

그리고 왼손에 꼈다.

던전 안에 얼마 남지 않은 오크들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

이상철은 땅에 침을 뱉었다.

주변에 사람도 없는데, 자기 자신에게라도 자신이 터프한 구원자라는 걸 보여주려고 하는 듯이.

그러나 그것도 서툴렀는지, 뱉은 침은 입은 재킷의 왼팔 자락에 묻었다.

“에이, 젠장.”

이상철은 들고 있던 검을 땅에 꽂아 놓고 오른손으로 재킷 왼팔의 침을 닦았다.

“이게 뭐냐고. 7,900달러짜리 재킷인데. 100% 양가죽, 이탈리아제, 구찌란 말야. 이런 썅.”

힐링 포션을 네 개나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이상철은 그 돈으로 이탈리아제 고급 가죽 재킷을 샀다.

힐링 포션을 굳이 챙길 이유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힐러에게 힐을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힐에 소모되는 책은 어차피 매일 재생된다.

힐링 포션 값이 너무 비싼 것도 문제다.

구원자들끼리의 장터에서 현금으로 바꾸면 밤새 클럽에서 놀 수 있는 돈이 생기는데, 왜 골드를 힐링 포션 따위에 낭비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갑옷 윗도리가 안 나오네요. 그래서 이거라도 입으려고 샀어요. 어차피 던전 입구에 있는 보급품이나 이거나, 다 가죽조끼잖아요.”

한 달 전에 던전에 왔을 때도, 파티원의 물음에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165센티미터, 85킬로그램.

키는 작고, 벌써부터 아저씨처럼 배가 나온 그가 클럽에 갈 수 있는 건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자라고 말해봐야 믿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강남 한복판에서 화염구를 날릴 수도 없는 법.

결국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 그의 지위를 증명해 준다.

프로그래머로 노예 생활을 하던 일 년 전과는 천지 차이의 삶.

대형 길드 중 하나인 ‘충무공’에 입단한 덕분에, 목숨 걸고 던전에 자주 드나들지 않아도 윤택한 삶이 가능하다.

차원문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모를까, 이제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그런 그를 깔보고 멸시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 구원자들뿐이다.

조금 전에 탱커 윤동직이 그랬듯이.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제가 나가면 되는 거잖아요. 됐죠?”

“그래. 오늘 일은 네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네가 수습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나가서 최 대리에게 잘 얘기하고.”

안상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탱커를 벼슬이라고 생각하는 윤동직,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정이채에 비하면 그래도 안상혁은 말이라도 통하다고 생각했다.

“나가기는 하지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뭔데?”

윤동직이 고깝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물었다.

“윤동직 씨,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보다 레벨이 낮을 거라고 생각 마쇼.”

“뭐가 어째? 이 자식이 정말 여기에서 죽고 싶냐?”

날뛰는 윤동직을 안상혁이 간신히 붙잡아 말렸다.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싸움이 날 분위기였다.

레벨도 무기도 윤동직이 우세한 지금은 싸움을 해봐야 좋을 게 없다.

키가 180센티미터나 되는 건장한 남자에게 시비를 건 자신을 생각하니,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이상철도 예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시비를 걸지 못하던 평화주의자였다.

‘그건 손가락 끝에서 불덩어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던 시절 이야기다. 이제 그런 시절은 없지.’

종로를 걷다가 불량배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다.

몸집이 왜소한 이상철이 길을 비키지 않자, 불량배가 그의 어깨를 치면서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예전 같으면 10미터 전방에서 길을 비켰을 이상철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상철은 불의 책을 날려 불량배에게 2도 화상을 입혔다.

울고불고 난리 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불량배를 보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마침 근처에 경찰이 지나가지 않았다면, 이상철은 그놈을 정말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큰길이 아니고 뒷골목이었다면, 그 자식을 반쯤 죽여놓는 건데.’

정부로서도, 차원문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상황에 구원자에게 금고나 징역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천만 원 정도 벌금을 물고, 불량배의 치료비와 위자료를 챙겨주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윤동직. 절대 잊지 않겠다. 몇 달 뒤가 되든, 내년이 되든, 네놈을 반드시 죽여주마.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을 밖에서 어떻게 알겠어?’

파티와 헤어지고 처음에는 던전 입구 방향으로 걷다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상철은 걷던 걸음을 멈췄다.

혼자 사냥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퇴각 페널티를 감수하고 던전을 나가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이상철은 상태창을 열었다.

- 13레벨.

- 전문화: 빛 3, 불 7, 마나 3.

- 힘 25. 민첩 22. 체력 25. 정신력 20. 물리 저항 4. 마력 저항 4.

- 무기: 귀족의 롱소드(레어).

- 방어구: 소형 방패(보급품), 가죽바지(보급품).

- 인벤토리: 오크 분쇄자의 검, 일반 화살 40개, 숏보우, 하급 힐링 포션 2개, 기본 식량 팩 6개.

들고나왔던 폭약과 광산 지도를 안상혁에게 넘긴 덕분에 인벤토리는 여유가 있었다.

현재 장착하고 있는 아이템 중 하나가 50%의 확률로 사라지는 것이 퇴각 페널티다.

장착템 중 보급품이 아닌 것은 ‘귀족의 롱소드’ 단 하나.

10레벨이 넘어 개나 소나 같은 무기, ‘오크 분쇄자의 검’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니 짜증 나서 거금을 주고 마련했다.

클럽에서 한 달 동안 먹고자는 생활을 해도 남을 정도의 돈을 들인 무기다.

그게 사라져버리면 아마 잠도 못 잘 것이다.

이상철은 다른 파티원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기로 했다.

48시간 내에 깨는 것을 목표로 들어왔다.

한 명이 빠진 상태에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직의 레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니 던전을 못 깨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 다니는 몬스터나 사냥하면서 적당히 숨어 있으면 된다.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안내문이 나오면, 그때 조금 먼저 움직여서 빠져나가면 된다.

밤에 파티원들이 오두막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그때 눈에 띄지 않으려면 노숙을 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노숙, 하면 되지. 내가 이래 봬도 보이 스카우트 출신이다. 노숙쯤이야.’

*****

윤동직 파티는 정석대로, 느리고 신중하게 숲을 정찰했다.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 광산 입구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돌발 변수를 미리 파악하고 진입해야 한다고 윤동직이 말했다.

그래서 광산 입구를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이내를 샅샅이 더 조사했다.

“어디를 가도 몬스터 시체뿐이군요. 먼저 들어온 레벨 식스의 소행인가요?”

“정말 이상한데. 6레벨이 아니고 16레벨 정도 되는 건가? 우리가 잘못 들은 거?”

“아뇨. 제가 듣기로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요. 6레벨이라고.”

“힐러님, 받으셨다는 문자 내용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세요?”

“글자 하나하나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기억은 하죠. 안녕하세요. 이준기라고 합니다. 이번에 배화여고 차원문에 함께 들어가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사정이 있어서 조금 일찍 도착하려고 합니다. 먼저 들어가서 정찰 좀 하고 있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다른 분들께도 전해주시고요. 감사합니다. 뭐 이 정도요?”

“정찰이 아니고 정말 정리를 하고 다녔네요.”

“정말 6레벨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게임의 천재라든가, 전직 프로게이머 같은 경우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나요?”

“상혁 씨는 게임을 별로 해보지 않았나 보군. 난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많이 해봤거든. 내가 판단하기에는 말야. 10레벨 중반이 적정 레벨이라고 해놓고 6레벨이 쓸어버릴 수 있게 디자인을 하면, 그건 게임 디자이너가 회사에서 쫓겨나야 되는 거지.”

“6레벨 파티도 아니고, 6레벨 혼자서 말이죠.”

“그렇지. 파티도 아니고 혼자서. 게임을 해킹하거나 무슨 치트키 같은 걸 쓰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탱커님,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해 보세요, 힐러님.”

“던전에서 죽으면, 정말 죽는다는 거죠? 혹시 보신 적 있으세요?”

“그럼요. 18레벨이 될 때까지 던전에서 동료가 한 번도 안 죽었다면, 그것도 대단하네요. 그래봤자 6레벨이 D 등급 던전을 혼자서 쓸어버리는 것보다는 덜 대단하지만.”

“게임하고 비교해서 말씀하시니까, 자꾸 헷갈려서요. 저는 아직 죽는 걸 못 봤거든요. 동료가 죽으면 트라우마에 걸릴 것 같아요.”

“힐러분들 중에 그런 분 많죠. 탱커들 중에도 좀 있고.”

“이상철, 그분 제대로 나가셨는지 궁금해지네요.”

“힐러님 마음씨도 착하시네. 거기서 입구까지 뭐 몇 걸음이나 된다고. 벌써 나가서 어디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죠.”

광산 근처 숲을 뒤져봐도 살아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그들은 광산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전략을 짰다.

광산 지도를 보면서, 폭약 설치가 필요한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윤동직은 검과 방패, 안상혁은 도끼, 그리고 정이채는 마법 막대를 들고 일어섰다.

광산 입구로 내려오자, 고블린 시체들이 즐비했다.

“광산 입구에 고블린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다고요?”

정이채가 놀랍다는 듯이 얘기했다.

“아뇨. 이건 너무 많은데요. 아무리 핵심 시설이라고 해도, 경비 병력이 이렇게 많이 있었을 리는 없죠. 광산 안쪽의 몬스터들을, 한 무리씩 끌고 나와서 잡은 모양입니다.”

“대단하네요. 시간도 많이 걸렸을 텐데.”

“아무래도 탱킹을 좀 아는 사람 같아요. 예사 솜씨가 아니군요.”

광산 안쪽으로 들어서자, 윤동직의 말이 맞다는 것이 눈앞에서 증명되었다.

10미터가 넘는 갱도에 몬스터는 물론 몬스터의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안상혁이 지도를 보면서 말했다.

“여기에서 길이 갈라집니다.”

고개를 돌려 광산 안쪽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윤동직이 그의 말을 막았다.

“쉿! 잠깐만요!”

“끼이익!”

고블린 한 무리가 오른쪽 갈림길 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전투 준비하세요!”

윤동직이 오른손의 롱소드를 휘둘러 달려오는 고블린들의 시선을 끌면서 외쳤다.

“광산을 전부 다 정리한 건 아닌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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