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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2: 성흔 (3)
Episode 12: 성흔 (3)
이도협은 아직 원래의 자기 방, 즉 부회장실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권영호가 쓰던 방은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탑픽과의 합병이 예정되어 있지만, 이도협은 자신이 통합 길드 수장이 된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당연하잖아. 우리 길드 머릿수가 탑픽 두 배는 되는데.’
문제는 역시 파벌이다.
회장 권영호가 반협회장 파벌이었기 때문에, 길드 멤버들 중에도 명시적으로 반협회장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길드 내 레벨 3위인 한택수, 그리고 넓게 봐서 한택수 라인으로 볼 수 있는 탱커 윤동직.
이제 윤동직도 레벨 20을 달았으므로 그냥 무시할 상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갑자기 레벨 20이 된 이준기는 더더욱 주의할 상대.
이도협으로서는 ‘미궁’ 던전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일이 있어서 더욱 껄끄럽다.
‘느낌이 오잖아. FFA. 프리포올.’
이도협은 빨간 글씨로 ‘주목’이라고 쓰인 야구공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돌렸다.
‘차원문이라는 걸 누가 만들어서 보내는 건지 몰라도, 우호적인 신은 아니겠지. 장난이 심한 절대자 정도 되려나? ‘해운대’ 던전에서 공격대원들 사이에 드잡이가 있었다는데. 장난기가 있는 신이라면, 구원자들 사이에 치고받는 걸 보고 싶어서 저런 차원문을 만들었을지도.’
이도협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길드 멤버 명단을 훑어보았다.
‘이준기, 이거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아. B급 던전이라면 나도 좀 꺼려지는데, 그걸 가겠다고?’
이도협은 컴퓨터 화면에 길드 회원 명단을 띄웠다.
- 길드 회원 명단. 2021년 9월 20일 현재.
- 이도협. 레벨 27. 딜러.
- 한택수. 레벨 25. 탱커.
- 남경철. 레벨 24. 힐러.
- 변희영. 레벨 24. 딜러.
- 고창혁. 레벨 23. 딜러.
- 정하은. 레벨 22. 탱커.
- 김한동. 레벨 21. 힐러.
- 유채리. 레벨 20. 딜러.
- 윤동직. 레벨 20. 탱커.
- 이준기. 레벨 20. 딜러.
- (총 3쪽 중 1쪽)
‘뭐, 나쁘지 않군. 20레벨 이상만 10명이라. 여기서 두 명 정도 빠져도 길드는 잘 돌아가겠지. 문제는, 한택수 이 자식이 순순히 던전에 들어갈까?’
*****
9월 22일, 수요일.
저녁 뉴스에 길드합병 소식이 톱뉴스로 다루어졌다.
“오늘 첫 소식입니다. 오늘 오전 11시. 서울 소재 길드 ‘충무공’과 ‘탑픽’이 합병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길드 명칭은 당분간 ‘충무공-탑픽’으로 하고, 아이디어 공모와 설문조사를 통해 정식 명칭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오전에 새롭게 출범한 통합 길드 회원들은 인터콘티넨털 하모니 볼룸에서 축하 파티를 진행하고 있었다.
탑픽의 전 회장 오대영이 임시회장, 충무공 전 부회장 겸 회장 대행 이도협이 임시 부회장을 맡고, 한 달 내에 회장단 선거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오대영도 이도협도 기자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 축하 파티는 구원자들만 참석하고 있었다.
한참 부어라 마셔라가 진행된 다음, 이도협이 자리에서 일어나 꽐라 초기 단계의 혓바닥을 굴리며 말을 했다.
“이렇게 즐거운 자리에서, 이, 일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하, 한 가지만 공지하겠습니다.”
충무공 길드 회원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이도협을 연호했다.
“이도협! 이도협!”
“아, 네. 캄사합니다. 다름 아니라, 오늘 오후 3시부로, 정부 측에서 종각 차원문을 우리 길드로 인계했습니다. 협회에서도 찬성했고요. 다, 당연하잖습니꽈? 우리 빌딩 바로 앞에 생겼으니.”
좌중에서 손을 번쩍 든 한 회원이 말을 했다.
“파티 모집하시는 겁니까?”
“네, 네. 그, 그겁니다. B급 던전, 무섭죠. 하지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법. 정찰하고 퇴각해도 좋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위주로 탐색조를 꾸릴까 합니다.”
도대체 진짜로 술이 취한 건지, 연기를 한 건지는 모르지만, 정찰만 하고 퇴각해도 좋다는 이도협의 설명이 먹혔는지 공격대 자리가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충무공-탑픽 연합 길드에서 총 4명.
- 마상욱. 26레벨. 전 탑픽 길드. 딜러.
- 한택수. 25레벨. 전 충무공 길드. 탱커.
- 하민서. 25레벨. 전 탑픽 길드. 딜러.
- 이준기. 20레벨. 전 충무공 길드. 딜러.
그리고 협회 차원에서 모은 다른 길드 소속 4명.
- 소현배. 26레벨. 문경새재 길드. 딜러.
- 주석. 25레벨. 브릴리언트 길드. 딜러.
- 김형채. 25레벨. 코리아 길드. 딜러.
- 문아린. 23레벨. 신선자 길드. 딜러.
다들 1레벨 강등이라는 퇴각 페널티를 감수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아이템을 빼앗기는 것보다 레벨 강등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구원자들은 대개 레벨보다 아이템을 회복하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소현배, 김형채, 문아린. 모두 ‘해운대’ 공격대 멤버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찰이라 생각하고 지원한 모양이지만, 이준기는 당연히 던전을 깰 생각이다.
이번 던전의 포맷을 생각하면, 아는 사람들이 포함된 건 아주 좋지 않다.
‘프리포올, 위키피디어를 찾아봐라. 데스매치라는 항목으로 연결된다.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던전에 지원한 걸까.’
*****
“와! 준기 오빠, 반가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문아린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준기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준기 오빠, 사무실이 여기니까, 아침에 뭔가 준비하실 것 같아서 왔는데. 딱 계시네요. 역시, 제가 촉이 좋죠?”
“반갑다. 아린아. 커피 마실래? 2천···”
“2천만 원짜리 커피 머신입니다.”
최정윤이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왔다.
“뭐 드실래요? 아메리카노, 라테, 에스프레소. 다 됩니다.”
“라테 주세요! 감사합니다.”
둘 다 웃고 있기는 한데, 왠지 공기 중에 스파크가 튀기는 것 같았다.
최정윤이 커피 머신 쪽으로 가자, 문아린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건너왔다.
“일하시는 거예요? 랩탑으로?”
“응. 늘 정리하는 습관이 있어서.”
“뭘 정리해요?”
“뭐든지. 던전 특성이라든가, 몬스터 공격 패턴···”
“우아! 그런 게 기억이 나요?”
“공시족 오래 해서 그런가 봐.”
최정윤이 커피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놓았다.
아까 문아린이 앉아 있던 맞은 편에.
“고맙습니다, 언니!”
그렇게 말하고 문아린은 커피 머그를 집어 지금 앉은 자리로 가져왔다.
이준기 바로 옆자리로.
“이준기 구원자님, 다른 자료 필요하신 것 있나요?”
“아뇨. 이제 준비하고 들어가야죠. 감사합니다, 최 대리님.”
“네. 수고하셨어요, 최 대리님!”
문아린이 마치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감사 인사를 했다.
“다른 분들은요? 여기가 연합 길드 사무실 맞죠?”
“응. 여기가 맞지. 아마, 차원문으로 직접 오시겠지?”
“그게 편한가? 나 같으면, 사무실 잠깐 들르겠네.”
“근데, 여기는 왜 왔어?”
“준기 오빠 보고 싶어서 왔죠.”
“농담은. B급 던전인데, 긴장도 안 돼?”
“사실, 그래서 온 거예요. 준기 오빠가 공부한 거 있음, 좀 들어보려고요. 정보 좀 주세요.”
이준기는 잠깐 고민했다.
공격대 명단에 문아린의 이름을 본 순간부터 한 고민이다.
한 명이나 두 명을 포섭해서 팀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그냥 원래 생각대로 솔로잉을 할 것인가.
“아린아.”
*****
구원자들이 차원문 입장 시각으로 가장 선호하는 오전 11시.
문아린과 함께 이준기는 10시 55분에 사무실을 나와 길을 건넜다.
종각역 사거리 한복판에 문아린의 빨간색 머시디즈를 중심으로 고급 차 다섯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각생은 두 명.
“안녕하세요, 이준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상욱입니다. 26레벨입니다.”
“하민서고요, 25레벨 딜러입니다.”
“코리아 길드 김형챕니다. 준기 씨, 구면이죠? 반가워요.”
“소현배라고 합니다. 26레벨. 문경새재 길드 소속입니다. 형채 씨, 아린 씨, 준기 씨,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문아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통성명이 끝날 때쯤, 페라리 한 대가 광화문 쪽에서 질주를 해왔다.
차 창문을 열고 신분증을 보여 2중으로 쳐진 전경들의 벽을 열게 한 그 차는,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종각역 사거리 한복판까지 들어와서야 멈춰 섰다.
“준기 씨 일찍 오셨군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택수라고 합니다. 25레벨이고요. 탱커입니다. 오늘은 어차피 정찰대라 탱힐딜 이런 거 필요 없긴 하겠지만요. 제가 제일 늦었나요?”
“아뇨. 아직 한 분이 안 오셨는데.”
그때, 종로2가쪽에서 자전거가 나타났다.
그것도 초록색 따릉이.
누가 보면 경륜 선수라고 생각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페달을 밟고 있었다.
자전거를 거치대에 허겁지겁 반납하고 뛰어오는 대학생 스타일의 남자.
“으아, 이거 헬멧을 안 벗고 왔네. 잠깐만요.”
헬멧을 벗자, 불타오르는 빨강색으로 염색한 섀기컷 머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종각역이 폐쇄된 걸 모르고 지하철로 왔다가 종로 3가에서 내려서 자전거 타고 오느라 늦었어요. 죽을죄를 졌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게 해놓고 오히려 이쪽이 미안해지는 상황.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땀 좀 닦으시고.”
“헬멧도 두고 오셔야죠.”
“와앗, 원빈이닷.”
“종각역이 폐쇄돼서 그런 거니까, 이해합니다.”
고개를 든 그 남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릴리언트 길드, 주석입니다!”
*****
섬이다.
해안가의 하얀 모래 위로 풀썩 엎어지면서 던전 안으로 던져진 이준기.
재빨리 일어서서 근처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양쪽으로 시야가 터진 해안가에는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다.
FFA 포맷이라면 몬스터는 매우 성기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조심하는 것이 언제나 최선이다.
FFA 포맷도 자주 경험했고, 섬도 자주 경험한 이준기였지만, FFA 포맷과 섬이 겹친 경우는 처음이다.
섬 맵은 일반적인 던전보다 큰 것이 보통이므로, 생각보다 장기전이 될 상황.
한 시간 전, 사무실에서 문아린에게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린아.”
“네, 준기 오빠.”
“FFA는 ‘프리포올’일거야 아마.”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고.”
“이 던전은 구원자들끼리 서로 공격을 하도록 유도할 거야.”
“네? 정말요?”
“그냥 추측이기는 한데, 지금까지 내가 추측한 게 거의 다 맞아서 말이지. 나름대로 공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추측한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네가 나를 믿는다면, 맵의 북쪽 끝에서 만나자.”
“북쪽 끝요?”
“맵 중앙에서 최북단, 그러니까 맵 화면을 세로로 삼등분 했을 때, 가운데 토막에서 가장 북쪽을 찾아. 거기에서 보자.”
이준기는 바위 뒤에서 나와 해안가 둔덕을 넘어갔다.
키 작은 나무와 무성한 풀이 섞인 지대에서 몸을 적당히 숨긴 뒤, 맵이 밝혀진 정도를 확인했다.
‘역시. 섬 맵답게 상당히 넓다. 평균적인 맵의 4배는 될 거 같은데.’
맵에 따르면 이준기의 현재 위치는 북서쪽 해안.
북쪽 끝이 정확히 어디쯤 될지는 지도를 밝혀야 알 수 있겠지만, 문아린과 약속한 장소까지 멀지는 않다.
변수는 두 가지.
문아린, 그리고 다른 멤버들의 위치다.
FFA 포맷에서 시작 위치는 그야말로 랜덤이다.
8명 전원이 이 근처에 떨궈졌을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다.
샤캉!
‘올 것이 왔군.’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 첫 번째 미션입니다. 공격대 멤버 한 사람을 죽여주세요.
- 미션 클리어 조건: 공격대 멤버 1인 이상 사망.
- 보상: 레벨업, 에픽 보상 상자.
장혁수 같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눈이 돌아갈 보상이다.
겨우 한 명을 죽이면 레벨도 올리고 에픽 아이템을 먹을 수 있다.
샤킹!
또 다시 알림 메시지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