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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6: 주석 (2)
Episode 16: 주석 (2)
오크 사원을 무너뜨리는 미션.
처음에 화면에 나온 설명은 대단히 불친절했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니 스텝 바이 스텝으로 대단히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다음 단계는··· 저쪽 경비병을 잡는 거네요.”
“그렇네. 세 명이니 스킬 낭비하지 말고 그냥 무기만으로도 되겠는데?”
“제가 회오리로 하나 날릴까요?”
“아냐, 괜찮을 것 같아. 스킬 아끼자.”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모든 기술을 쏟아붓듯이 해서 간신히 물리쳤던 엘리트 오크 경비병.
이젠 스텝 밟으면서 등 뒤를 쫓아 몇 바퀴 돌다 보면 쓰러진다.
이 몬스터를 처음 잡았던 때 이준기는 3레벨이었지만, 지금은 21레벨.
그때는 보급품 무기, 지금은 에픽 무기 두 개를 들고 싸운다.
문아린 역시 23레벨을 도박으로 따 모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준기가 기대한 수준 이상이었다.
대개의 다른 구원자들과 마찬가지로, 문아린도 지금까지는 탱힐딜을 갖춘 파티로 몬스터를 사냥하기만 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책임을 오직 자신만이 진 적은 지금이 처음일 터.
경비병 셋을 모두 눕히고 나서, 숨을 몰아쉬는 문아린을 향해 이준기가 말했다.
“솔로잉, 이전에도 해본 거야?”
“아뇨. 이게 솔로잉이에요?”
“뭐, 둘이니까 솔로잉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 우리 파티는 완전 이레귤러잖아. 탱딜힐, 정규 편성이 아니고.”
“그래서 힘들어요. 헥헥.”
“처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하는걸. 고마워.”
“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준기 오빠보다 레벨이 두 개나 높은데.”
“하하.”
이준기는 인벤토리에 퀘템이 제대로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균형석 두 개를 다 모았으니, 이제 기계실로 가야지?”
“미션 설명에 따르면, 그렇네요. 기계실 평형추에 균형석 두 개를 넣고 스위치를 돌려버리면.”
“기계실로 통하는 골목에, 여기에서 두 번째로 센 몬스터가 나올 거야, 아마.”
“헤헤, 또 이준기 표 예언이네요.”
“뭐, 그런 거지.”
기계실 계단으로 이어지는 골목에서 경비 두 마리를 가볍게 처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골목이 꺾이는 곳에서 벽에 몸을 숨기고 이준기는 기계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몬스터, 스톤 골렘.
이준기야 상관없지만, 저걸 처음 보는 문아린은 놀랄 수도 있다.
“아린아, 혹시 골렘이라고 알아?”
“골룸이요? 마이 프레셔스?”
“음. 그 녀석처럼 나름 귀여운 놈은 절대 아니고.”
“엑. 혹시 뭐 징그러운 거예요?”
“아니. 그냥 돌로 만든 로봇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 처음 봐서 놀랄까 봐 가르쳐 주시는 거?”
“움직이는 돌덩어리니까, 도끼에 타격 안 받는다고 놀라지 말라고.”
“에? 정말요? 도끼에 타격을 안 받는다고요?”
“두 번에 한 번은 타격이 아예 안 들어갈 거야. 그건 알고 덤벼야지.”
오빠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으려다가, 문아린은 멈췄다.
그런 질문에는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이미 아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전략은?”
“음. 잠깐.”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을 발동해서 문아린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23레벨.
- 전문화: 물 5, 바람 9, 흙 9.
- 힘 40. 민첩 40. 체력 50. 정신력 15. 물리 저항 10. 마력 저항 1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공성타, 바크스킨.
- 인벤토리: 척추파쇄자, 다마스커스, 오크 분쇄자의 검, 강화 국궁, 일반화살 20개, 체인메일+1, 토끼 사냥꾼 장갑, 중급 힐링 포션 7개, 기본 식량 팩 6개.
‘공성타, 바크스킨이라니, 꽤 훌륭한 희귀 스킬을 가지고 있군.’
읽어낸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준기는 연극을 시작했다.
“아린이 스킬 트리가 어떻게 되더라?”
“물, 바람, 흙요.”
“획득 스킬은 뭐 가지고 있어?”
“공성타랑 바크스킨 있어요.”
“오, 공성타! 그걸 쓰면 되겠다.”
“이거요?”
- 공성타. 바람 1, 흙 4 소요. 사정거리 5미터. 주변에서 불러 모은 흙 원소 결정체를 모아 바람의 에너지로 날려 강력한 충격 대미지를 가합니다. 물리 저항에는 영향을 받으나, 물리 방어를 무시합니다.
스톤 골렘은 날붙이 공격을 50% 확률로 무시하는데, 충격 대미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공성타 대미지는 그대로 들어간다.
“공성타로 개시해요?”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럼, ‘바람의 가호’ 이거 넣고 공성타 쓸게요.”
“역시, 아린이 최고.”
문아린은 ‘바람의 가호’를 썼다.
다음 1회 공격에 한해 힘과 민첩을 10 증가시키는 기술.
공성타 대미지 역시 상당히 증가한다.
초록색 책 1권과 갈색 책 4권이 떠올라 문아린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3초간 정신집중을 하고, 문아린은 벽 바깥으로 한 걸음을 내밀면서 스킬을 날렸다.
“공성타!”
스톤 골렘이 기척을 감지하고 이쪽을 바라보더니, 공성타의 충격을 받고 뒤로 쓰러졌다.
빠르게 달려온 이준기가 패시파이어를 들어 쓰러진 골렘에게 내리쳤다.
- 스톤 골렘이 공격을 완전히 무효화했습니다.
“흠, 역시.”
이준기가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공성타를 날리고 뛰어온 문아린이 일어서는 스톤 골렘을 향해 척추파쇄자를 휘둘렀다.
- 스톤 골렘의 단단한 외피가 당신의 공격을 무력화했습니다.
“와아, 진짜 단단하네요!”
문아린이 옆으로 비키면서 외쳤다.
이어지는 이준기의 패시파이어. 찌르기 공격.
- 스톤 골렘에게 14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스톤 골렘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아싸!”
문아린이 외쳤다.
스톤 골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이준기와 문아린이 복도의 양쪽에 서서 앞뒤로 스텝을 밟으며 양손검과 양손 도끼를 휘둘렀다.
*****
섬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쌕쌕거리며 자던 주석이 눈을 떴다.
“으자자자!”
기지개를 켜고 나서, 주석은 사뿐히 점프하며 일어섰다.
“아침, 먹어야지. 아니, 브런친가?”
주석은 인벤토리에서 기본 식량 팩을 꺼냈다.
분명히 몸에 좋을 것 같은, 대단히 맛이 없는 커다랗고 딱딱한 빵.
하지만, 허기를 없애주기는 한다.
“흠···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겠지. 뭘 먹을까? 치킨? 피자? 초밥? 어휴 배고파.”
3라운드가 시작되자, 이 나무 아래에 숨어있다가 하민서를 잡았다.
그리고 나서 조금 기다리니, 두 명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두 명을 한꺼번에 사냥하는 건 조금 무리일 것 같아 기다렸더니, 문아린이 먼저 사라졌다.
그래서 멋지게 도발하며 이준기 앞에 나타났던 주석.
그러나 이준기는 산뜻하게 줄행랑을 쳤다.
그 후에, 도대체 누가 다섯 번째 생존자인지 몰라서 두 개의 ‘게스 후’를 소비하고 나서야 김형채의 위치를 파악했다.
서둘러 표시된 위치로 가봤더니 마치 거미줄에 걸리기라도 한 듯 달리는 자세로 얼어 있었다.
우스운 꼴을 마음껏 조롱해 주면서 간단히 정리.
그게 어제 네 시경.
문아린과 이준기를 쫓아 곧바로 사원으로 올라가면 매복에 당하려고 자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
신중한 이준기라면, 밤중에 급습하는 걸 걱정하고 밤을 새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주석은 나무 그늘 아래서 신나게 잠을 잤다.
그리고 지금, 토요일 아침 늦게까지 충분히 잤고, 이제 허기도 해결했다.
‘시간제한은 24시간. 그게 오늘 두시 반까지. 그렇다면 네시간 반 정도 남았네? 서둘러야 하나?’
주석은 느긋하게 상태창을 열었다.
- 오크 사원으로 진입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
“후우! 시간 많이 잡아먹네요.”
“수고했어, 아린아.”
“준기 오빠 따라다니면, 두 명이서 던전 다 깨고 다닐 거 같은데요.”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잠깐 정말 그래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문아린은 기대 이상으로 자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쓰러진 골렘에서 전리품을 줍고 난 다음, 둘은 기계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계실은 생각보다 좁았다.
평형추가 어디 있는지는 그냥 봐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실린더같이 생긴 거대한 통 안에, 색이 다른 두 가지 액체가 섞여 있었다.
그 두 가지 액체가 서로 층이 나뉘어 실린더 내의 공간을 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균형석을, 여기 두 군데에 맞춰 넣고, 스위치를 올리면···”
평형추 실린더가 잠깐 흔들리더니, 들어 있던 액체의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아래쪽 액체가 거의 사라지자, 실린더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심하게 흔들렸다.
“이제 나가자!”
기계실 전체가 흔들리는데도 흥미롭다는 듯이 실린더를 쳐다보던 문아린.
이준기가 자리를 뜨자 그를 따라 기계실을 나왔다.
닫은 문 안쪽에서 점점 더 크게 삐걱거리고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 된 거예요?”
“그렇지.”
“그런데 왜 미션 클리어 메시지가 안 나와요?”
“그건 아마···”
히든 몬스터가 있다는 말이다.
즉, 사원 2층에 있는 신관실에 가봐야 한다는 얘기.
기계실 평형추를 파괴하면 원래 미션은 끝나게 되어 있다.
미션 종료 메시지가 안 나온다는 것은 신관실에 있는 오크 대사제가 마법을 동원해서 사원의 붕괴를 막고 있다는 말이다.
딱히 나쁜 일은 아니고,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는 것.
히든 몬스터는 레어급 이상의 아이템을 반드시 드랍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잡을 이유가 없었던 오크 대사제를 잡아야 하니 조금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하지만.
“2층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에? 왜요? 미션 설명에도 그런 건 안 나오네요.”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도, 사원이 안 무너진다. 그렇다면 몬스터를 싹쓸이해 보기라도 해야지.”
“정말요?”
“적어도 여기 총책임자는 잡으라는 얘기겠지?”
이준기를 따라, 문아린은 복도를 지나 1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들어섰다.
*****
차원문을 통과하여 던전에 진입할 때처럼, 오크 사원으로의 텔레포트도 빛의 터널을 통과했다.
2초 정도, 그런 현란한 빛에 시각이 방해를 받고 나니, 어두침침하게 조명이 밝혀진 구닥다리 건축물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2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
주석은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어차피 이준기와 문아린이 몬스터들을 정리해 놓았을 것이다.
주석으로서는 자신이 미션을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준기와 문아린 파티가 오크 사원을 정리해준다면, 자신도 던전에서 해방된다.
데스매치 쪽이 더 재미있기는 하지만, 밤잠까지 설쳐가며 할 정도는 아니다.
이준기 쪽이 오크 사원을 정리해 준다면, 그것도 좋다.
던전 바깥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을 왜 죽였냐고 누가 물어도 할 말은 있다.
미션 내용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먼저 덤볐다고, 자신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박할 증거는 없으니까.
최악의 경우는 24시간이 지나도록 이준기와 문아린이 어디 숨어서 질질 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 미션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살아남은 세 명이 전원 사망하는 배드 엔딩이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이미 살인을 한 이준기가 그럴 리가 없다.
따라서, 주석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문아린과 이준기, 누구라도 주석 앞에 나타나 준다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처리하면 된다.
그럴 경우, 주석의 미션, ‘멋진 신세계’가 완료되어 던전이 클리어된다.
그들 중 하나, 또는 둘 다가 오크들과 싸우다가 죽으면?
더 간단하게 미션이 해결된다.
역시 ‘멋진 신세계’, 즉 남은 인원의 50% 이상이 사망하는 것으로 미션이 완결된다.
만약 그 둘이 주석을 사냥하려고 한다면?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인지 보여주면 된다.
주석은 자신감으로 꽉 차 있었다.
“음, 흠, 큼!”
목을 가다듬기 위한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 주석은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다.
“이준기! 문아린!”
1층 신전의 방대한 공간에 주석의 목소리가 난반사로 메아리쳐 돌아다녔다.
“분명히 여기에 있잖아? 사람이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주석은 낼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이준기! 문아린!”
거대한 홀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