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27: 용병 계약 (1)
Episode 27: 용병 계약 (1)
협회장실 안의 고급 소파에 이준기와 이상덕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휴대폰은 꺼진 상태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신학길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상덕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이준기 구원자님은 용병이라고 들었습니다. 소속 길드 없는 프리랜서시라고요. 맞습니까?”
오사카에서 기자 회견 당시, 기자단을 앞에 놓고 입씨름을 했던 사이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웬 격식을 차리는 것인가.
저절로 지어지는 쓴웃음을 얼굴에 띄운 채, 이준기가 말했다.
“재미있군요. 지금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굳이 가식이 필요할까요?”
“가식이 아니고, 예절이란 것이지.”
“제 입장에서 보면, 여긴 적진 한복판이잖아요? 그런데도 왔습니다. 인사치레만 하다가 갈 수는 없어요.”
“그래서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내용만 말하려고 한 거야.”
“계속 반말하실 겁니까? 예절이 중요하다면서요?”
“나는 대 유학자 율곡 선생의 17대손이다. 무릇 예절이란 상하가 있는 법이다.”
대놓고 꼰대질을 하겠다는 이상덕을 이준기는 잠시 쳐다보았다.
이준기가 적대하는 것은 이상덕이 아니다.
구원자라는 지위를 이용하는 기회주의적인 행태, 그걸 고착화하려는 협회라는 시스템이다.
이상덕이 박충기로 바뀐다고 해도 아마 많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협회 자체를 없애지 못할 바에야, 이상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뜻이 좌절된 이상덕.
모종의 타협안을 준비했을 거라고 믿고, 이준기는 이 자리에 왔다.
“좋아요. 큰형님뻘 되시는 분이니 존대는 해드리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좋아. 이제 좀 얘기가 되는군. 내 얘기는 간단해. 준기 씨와 나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요?”
“준기 씨가 프리랜서 선언을 했으니, 내가 고용하려고 하는 거야.”
“그래요?”
“6PM 길드 마스터로서가 아니라, 협회장으로서야. 길드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협회 직속 프리랜서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제가 얻는 것은 뭐죠?”
“매달 1억 원의 활동비를 제공하겠어. 연봉 12억 원이야. 탑랭커 한상태도 그 정도로 벌지는 못할걸.”
“나쁘지 않군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네요.”
이준기가 대놓고 비아냥거리는데도, 이상덕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대신 한 달에 두 번, 협회에서 지정하는 던전에 공격대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 조건일세.”
“겨우 그게 다란 말입니까? 한 달에 두 번, 협회 공격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라는 말입니까?”
“그래. 남는 시간에는 뭘 해도 좋아. 파격적인 조건 아닌가? 단지, 한 가지 제안이 있네.”
“그걸 듣고 싶었습니다.”
“뭘 하든 자유지만, 나에 대한 적대 행위는 이제 그만해주게.”
“적대행위요?”
“그래. 오사카 기자회견장에서 했던 그런 돌출발언 같은 거 말야.”
“그 조건은 상호적인 거겠죠? 협회장님도 저에 대해서 적대행위를 그만두시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이상덕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적대행위라니?”
“다케다 시게히데 씨가 실토했습니다. 지금 우리 둘뿐이에요. 평화협상을 하려면 솔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케다 상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그자의 추측일 뿐이야. 한국 사람인 내가 다케다 상에게 무슨 명령이라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협회장님,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이군요. 도톤보리에서 살아나온 건 저와 다케다 씨뿐만이 아닙니다. 전용택, 그리고 김나리 구원자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제가 상기해 드려야 하나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는 이상덕이었지만, 침을 삼키는 모습이 왠지 조금 부자연스러워졌다.
이준기는 말을 이었다.
“저처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아는 사실을, 협회장님이 모른다고 하시려는 겁니까? 신선자 전용택 회장과 문경새재 박충기 회장은, 협회장님의 정적이라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정적이라니, 내가 정치인인가? 난 그냥 협회장일 뿐이야. 협회는 구원자들 이익단체일 뿐이고.”
“그냥 협회장이라는 자리에 그렇게 매달리시는 이유는 뭡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협회장을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협회장님은 지금까지 세 번 선거를 전부 이겼습니다. 그런데도 박충기를 제거하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거라니, 제거라니!”
이상덕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이준기는 바깥에 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뒤돌아 문을 쳐다보았다.
이상덕이 그걸 보고 말했다.
“그 정도 소리는 바깥에서 들리지 않아. 이 방은 방음처리가 되어 있지.”
“방음처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준기는 가방에서 기계장치를 꺼냈다.
“도청과 녹취를 방지하는 장치입니다. 귀에 안 들리는 특수 음파를 쏴서, 녹음을 방해한다고 하네요. 돈도 없는데 이걸 사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이상덕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말했다.
“이거이거, 우린 마음이 맞는 것 같군. 지금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사실 그 장치는 이미 작동 중이라네.”
이상덕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닥에서 기계를 들어 올려 이준기에게 보여주었다.
“처음부터 작동하고 있었네.”
“그렇다면, 저도 제 것을 작동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준기는 기계장치를 켰다.
갑자기 높은 진동수의 전자음이 울리자, 두 사람은 귀를 막았다.
간섭음이다.
이준기는 서둘러 기계장치를 껐다.
“같은 기계인가 보군요.”
“그래. 그런 것 같군. 이제 믿겠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 여기는 적진입니다. 둘 중 하나를 사용해야 한다면, 제 걸 사용해 주십시오.”
“좋아. 알겠네.”
이상덕이 자기 자리에 있던 기계장치를 끄자, 이준기가 자신의 기계에 달린 스위치를 올렸다.
이준기는 기계를 소파 테이블 위에 올리면서 말했다.
“이제,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도톤보리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상상이 안 되시나요? 그 이후로 구라모토 협회장과 분명히 대책 회의를 했을 텐데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도청도, 녹음도 안 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잖습니까?”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다케다 상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다케다 상이 설마 내 부하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도톤보리 던전에서 살아나온 건 다케다 씨와 우리측 세 명, 그게 전부입니다. 여섯 명이나 되는 고레벨 구원자들이 오크 따위에게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오크들이 몰렸다고, 다케다 상이 증언했잖은가.”
이준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정치인답게, 발뺌하는 실력이 출중한 이상덕이지만, 오늘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준기의 입장이다.
“고성하 회장이, 은신 상태에서 전용택 회장을 기습했습니다.”
“그래? 증거 있나?”
“전용택 회장과 김나리 구원자가 증인이죠. 저도 그렇고요.”
“던전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법원의 관할권이 없다는 미연방대법원 판결도 모르나?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던전 바깥에서 증언을 해봤자,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어.”
2020년 9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법원이 관할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에반스 대 텍사스 사건.
던전 안에서 사망한 구원자의 가족이 관리 소홀을 이유로 텍사스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사건이다.
살인 혐의를 받은 구원자와 사망한 구원자는 원래부터 원한 관계였는데, 텍사스 주 경찰이 그걸 고려하지 않고 같은 공격대에 편성했으므로, 주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피해자 유족의 주장이었다.
물론, 피해자 가족은 가해자를 살인 혐의로 고발했지만, 경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해버렸다.
그래서 피해자 가족은 텍사스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속지주의를 고수하는 미국법 입장에서 이 판결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이다.
차원문은 엘 파소에 열려 있었지만, 차원문 안쪽의 공간은 텍사스가 아니니까.
텍사스 땅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어떻게 텍사스 주 법원이나 미국 연방대법원이 판단한단 말인가.
차원문 안쪽의 공간이 지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구와는 나무도 동물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그 공간이 지구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법은 법.
소송의 쟁점은 엘 파소에 열려 있는 차원문과 그 안쪽의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가, 그래서 차원문 안쪽의 던전을 텍사스 영토라고 볼 수 있는가였다.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답이 나왔지만, 판결의 파장은 컸다.
조지아주에서 최초의 길드, ‘남부의 힘’이 결성된 이후 전 세계에 길드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정부 소속 구원자들도 많았을 때였다.
그런데 정부가 무책임한 입장을 공식화해버리자, 구원자들은 욕심이 아니라 안전 때문에라도 길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던전에서 살해된 사람은, 텍사스 주 경찰의 명령에 따라 공무를 수행한 것이다.
공무 수행 중 사망에 대해서 관할권 없음이라는 판결을 내리는 정부를 어떻게 믿고 목숨을 맡긴다는 말인가.
이 판결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럽과 남미에서 비슷한 판결이 연이어 나왔다.
최후의 한 방은 대륙법계의 대표 격인 독일에서 나왔다.
독일에서까지 던전 내 사건에 대한 법원의 관할권을 부인하자, 더 이상 이견은 존재하지 않았다.
던전 안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구원자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싫은 놈이 있으면 던전 안에서 죽이라는 말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던전에 대한 관리 권한이 정부에서 길드 협회로 넘어갔다.
책임과 함께, 권리도 넘어간 것은 물론이다.
구원자들의 자조 조직으로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구원자들의 협회는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상덕이 말을 이었다.
“다케다 상이 가만히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떠벌려봤자, 아무런 결과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이게 현실이야.”
“그래서 야마시타 시게루를 섭외하신 거군요.”
“야마시타 상도 준기 씨가 죽인 거지?”
“얼마 전에, 광주에서 권총을 든 사람이 저를 쫓아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이준기는 한숨을 쉬었다.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상황이다.
이상덕도 답답해서 이준기와의 평화회담에 나선 것이지만, 오늘 어떻게든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것은 이준기도 마찬가지다.
“좋습니다, 회장님. 과거는 묻어두고,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해 보죠.”
“좋아, 좋아. 나도 찬성이야.”
“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씩이나?”
“첫째, 구원자들에 대한 공격이나 공작을 멈춰주십시오.”
“그런 일이 없다니까.”
“둘째, 일본 구원자협회와 관계 단절을 요구합니다.”
“뭐라고?”
“일본 쪽에서 뭘 약속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소꼬리가 되는 것보다는 닭 머리가 되는 게 낫다는 속담도 있잖습니까?”
“무슨 소린가! 도대체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그 두 가지를 약속해주시면, 제가 협회 직속 용병으로 활동하겠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어떤 던전에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가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협회의 명령에 따르겠다니, 이상덕이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준기가 요구하는 두 가지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그동안 해왔던 공작과 음모를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이상덕이 대답했다.
“난 누굴 공격하라고 사주한 적도 없고, 일본과 무슨 비밀 약조 같은 걸 한 것도 없네.”
“협회장님!”
“하지만, 약속을 하겠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하시는 겁니다?”
“그래. 약속하지.”
“한일 연합 공격대를 비롯한 모든 한일 연합 프로젝트는 더 이상 진행하지 말아 주십시오.”
“좋아, 좋아. 협회 차원에서 한일 연합 프로젝트는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겠네. 하지만 개별적으로 길드가 추진하는 것은 내가 막을 수가 없어. 그건 준기 씨도 이해하겠지?”
약속을 한다 해도 그 약속이 지켜질지에 대해서, 이준기도 이상덕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
지금 이상덕이 한 말처럼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것은, 오히려 약속이 진실하다는 느낌을 주려는 고도의 수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준기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진에 들어온 이상, 뭐 한 가지라도 건져야 했다.
“좋습니다.”
“좋아, 좋아!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구!”
이상덕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이준기는 그 손을 잡았다.
이상덕이 세차게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