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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1: 와이번 모나크 (1)
Episode 31: 와이번 모나크 (1)
이상덕 회장이 청와대에 직접 불려갔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대통령이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퍼졌다.
구원자, 그것도 그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협회장에게 일반인인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로, ‘구원자는 수퍼히어로’라는 공식이 사람들 사이에는 펴져 있었다.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통령이 이상덕에게 호통을 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헌법상 국군 최고 통수권자다.
특수경찰 한 부대만 동원해도 이상덕 따위는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와이번이 인천 공항 차원문을 빠져나온 바로 그 날 오후, 이상덕은 대통령을 독대하러 청와대에 들어갔다.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공격대 구성과 날짜.
차원문에서 전대미문의 괴수가 빠져나와 행패를 부렸다면, 그런 정도의 대응책은 곧바로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정부 비상대책 회의보다 여섯 시간이나 늦게 개최된 길드협회 대책 회의에서는 별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내용도 없는 결과보고서를 가지고 들어갔다가 이상덕은 호통을 들은 것이다.
‘호통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거다. 상덕이 놈이 저렇게 허둥대는 건 구원자 각성 후에는 처음 보는 것 같네.’
신학길은 대통령 독대 후 허둥대는 이상덕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꼈다.
구원자로 각성하고, 구원자들의 이익단체에서 수장 자리를 꿰찬 이상덕.
그가 고개를 숙여야 할 상대라고는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일본 구원자협회장 구라모토 역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라고 늘 말하던 그였다.
그런데 겨우 대통령에게 호통을 듣다니.
생각할수록 열 받는 상황이지만,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도 알 수 없었다.
한밤 중에 집안에서 총이라도 맞는다면?
이 모든 영화가 한갓 꿈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신학길!”
“네, 회장님.”
“그, 그··· 하, 한상태는 어떻게 됐어?”
“스케줄 체크해 보고 연락 주겠다고 합니다.”
“스케줄? 이거 아주 미친놈이네? 국가 위기상황이라고!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는데 스케줄?”
“그래도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그러니까 말로 잘 꼬드겨야지! 사무총장이라는 자리가 뭐 하는 데야? 아니, 그거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
“회, 회장님. 그래도 일단 이준기는 섭외해 놨습니다.”
“이준기? 그놈 지금 랭킹이 어떻게 돼?”
“13위입니다.”
“그래? 20위쯤 되나 했더니 다시 올랐군? 이번에 레벨 빠진 인간들이 많아서 그런 거지?”
“그, 그런 거죠.”
“흥.”
“그래도 이번에 브릴리언트 길드 소속 던전 다녀와서 레벨업 한 겁니다. 무슨 아이템도 주워 먹었다고 하던데요.”
“그게 지금 중요한 얘긴가?”
“이준기가 이번에 공격대에 들어가니까, 장비가 좋은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 너 잘났다. 대승적으로 생각하는 신학길이가 위너다.”
“아,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다른 직원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회, 회장님!”
“무슨 일이야 미스 김? 문에 노크도 안 하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한상태 회장이···”
“한상태가 뭐?”
“이번 공격대에 빠지겠다고 해서···”
“뭐가 어째? 이 자식이고, 저 자식이고. 내 말이, 아니, 대통령 말이 우습게 들리나?”
*****
11월 10일 수요일.
인천 공항 차원문 앞에 구원자들이 정렬했다.
아침 9시. 파격적인 시간이다.
그만큼 이상덕 협회장이 급했다는 이야기.
공항 근처 호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부터 집결한 구원자들 사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많았다.
“아, 이게 뭐야. 아침 9시 소집이라니 미친 거 아니야?”
“아니, 왜 우리까지 와야 하냐고. 공격대 사람들만 모이면 되지.”
“이상덕 협회장이 엄청 쫄았나 보네. 쫄보 협회장 같으니라고.”
“군대 사열한다며?”
“미니 에어쇼도 있다는데? 비행기 몇 대 날아다닐 거래.”
“미친. 졸려 죽겠구만.”
“공항 근처라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잤는데.”
“공격대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지. 저 사람들은 뭔 죄야.”
“그러니까, 그 정찰대 놈들이 제대로 못 해서 이 난리가···”
전 세계에 중계된다는 출정식에 외신기자들까지 잔뜩 모여들었다.
차원문에서 와이번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차원문 경비 경력은 두 배로 늘었다.
공격대 명단이 발표되었다.
- 공격대장 겸 리드: 이상덕 한국 길드협회 회장. 6PM 길드. 29레벨.
- 탱커
- 한상태 회장. 퇴마문 길드. 33레벨.
- 전용택 회장. 신이 선택한 자들 길드. 31레벨.
- 김범규 회장. 브릴리언트 길드. 30레벨.
- 오대영 회장. 발해의 후예들 길드. 28레벨.
- 힐러
- 김나리. 브릴리언트 길드. 29레벨.
- 길수연. 6PM 길드. 26레벨.
- 남경철. 발해의 후예들 길드. 26레벨.
- 한소미. 신이 선택한 자들 길드. 25레벨.
- 딜러
- 박충기 회장. 문경새재 길드. 31레벨.
- 강명성. 코리아 길드. 28레벨.
- 정두리. 6PM 길드. 28레벨.
- 홍세희. 문경새재 길드. 27레벨.
- 이준기. 무소속. 27레벨.
- 변희영. 발해의 후예들 길드. 27레벨.
- 조수현. 코리아 길드. 26레벨.
- 하성도. 신이 선택한 자들 길드. 26레벨.
- 임한별. 문경새재 길드. 26레벨.
- 장대한. 드래곤볼 길드. 26레벨.
- 나현우. 퇴마문 길드. 25레벨.
해운대 던전 공격대도 당시에는 ‘사상 최강’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 공격대는 정말로 사상 최강이다.
현재 한국 내 상위 랭커들을 위에서부터 죽 내림차순으로 정렬한 공격대다.
최저 레벨 공격대원인 한소미 힐러도 랭킹 25위의 실력자다.
피치 못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탑랭커 전원이 공격대에 합류했다.
랭킹 10위의 최현은 지병이 도졌다는 이유로, 랭킹 12위인 박보도는 부친상을 이유로 빠졌다.
문아린 역시 부상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공격대에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다.
딜러 중 최저 랭커는 22위의 나현우다.
24위인 문아린에게는 공격대 참여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한상태 회장, 빠진다는 소문 아니었어?”
“이상덕 협회장한테 무슨 요구를 했다는데? 합류하는 조건으로 말야.”
“이상덕, 박충기가 한 팀이라니.”
“청와대에서 한 명씩 다 전화를 돌렸다는 말이 있던데.”
“최현은 랭킹이 10위나 되는데 용케 빠졌네.”
“그 사람 작은 아버지가 무슨 장관이라던데. 아니, 육군 장성이던가?”
“구원자도 빽이 있으면 급이 달라지는 거군. 죽을 데는 안 간다 이거지.”
의장대 사열에 미니 에어쇼까지, 허례허식은 대단했지만, 기자회견은 짧게 끝났다.
두 차례에 걸친 정찰대의 보고가 있었으니, 더 궁금할 것도 없었다.
상위 랭커들이 모조리 포함된 공격대.
가십 거리가 넘칠 만한 인적 구성이었지만, 상황이 무거웠다.
구원자들이야 원래 죽어 나가는 존재들이니 상관없지만, 이번에는 군인과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다.
이례적으로 많이 참석한 고위공직자들은 마치 문책이라도 하듯이 공격대원들을 쳐다보았다.
기분은 나쁘지만, 할 말이 없는 상황.
국민 세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구원자들이다.
할 일은 해야 한다.
반드시 차원문을 닫겠다는 각오만 밝히고, 공격대는 차원문으로 들어갔다.
*****
이상덕 협회장이 공격대를 리드하는 것으로 발표는 했지만, 사실상 리드 역할은 이준기에게 주어졌다.
“그러니까, 이준기 구원자님. 아니, 용병님. 이상덕 협회장님이 공격대장이기는 한데, 척후 역할은 이준기 님이 하셔야 합니다.”
신학길이 쭈뼛쭈뼛하는 태도로 이준기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준기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정윤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준기가 말렸다.
“이준기 구원자님이 리드 역할이면 그렇게 발표를 해야죠!”
“매니저님, 괜찮습니다. 아니, 그쪽이 더 좋아요. 별로 시선 끌고 싶지 않아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찰대장 문아린에게 귀띔을 해주었지만, 정찰대는 와이번 모나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당연하다.
둥지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모나크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으니까.
만에 하나, 정찰대가 와이번 사냥을 하면서 승승장구, 던전을 쓸어버릴 경우에 대비해서 말해준 것이지만, 결국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0시 방향. 고블린 상단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걸리적거리니까, 잡고 가죠.”
이상덕은 척후는 물론 공격대장으로서 판단을 해야 하는 부분까지 이준기에게 기댔다.
고블린 상단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지만, 이번 상단은 잡기로 결정했다.
위치상 와이번 모나크와의 싸움에서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덕에게는 그냥 캐주얼하게, 걸리적거리니까 잡는다는 이유를 댔다.
하나하나 설명할 상황도, 상대도 아니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니까.
“11시 방향. 선인장 근처에 와이번 있습니다. 빨대를 꽂으면, 사격 부탁합니다. 변희영 님.”
선인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와이번이 입을 벌렸다.
입속에서 대롱과 같은 빨대가 나와 선인장을 뚫고 들어갔다.
사나운 괴수의 모습이지만, 와이번은 선인장 수액을 주식으로 하는 초식동물이다.
조그마한 나비라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을 만한 광경이지만, 와이번의 빨대는 지름만 해도 15센티미터는 된다.
메인 탱커 한상태나 2탱 전용택도 풀링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풀링은 전문 스나이퍼인 변희영 딜러가 맡기로 했다.
현재 발해의 후예들, 전 충무공 길드 소속 스나이퍼.
바위 뒤에 엄폐한 자세로, 변희영은 침착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놓았다.
“이번에는 접니다!”
3탱 오대영이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날개를 휘저으며 다가오는 와이번을 막아서며 그는 오른손에 쥔 창을 휘둘렀다.
탑픽 길드의 마스터였으며, 현재는 죽은 이도협에 이어 발해의 후예들 길드 마스터를 맡고 있는 오대영.
<수호지>에 나오는 기병 대항 결정병기, 구겸창을 모티브로 한 창, ‘퍼플 레인’이 공기를 가르고 나아가 와이번의 오른쪽 날개를 찔렀다.
“꾸에에엑!”
와이번이 한쪽으로 쓰러지면서 오대영을 향해 왼쪽 날개를 내저었다.
방패로 가볍게 막아내면서, 오대영은 구겸창을 와이번의 날갯죽지에서 빼냈다.
와이번이 다시 한 차례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와이번을 둘러싼 딜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역시 상위 랭커들이라 기본 실력이 준수하군.’
와이번의 꼬리가 맹렬히 움직이며 여기저기를 찔러댔지만, 허공만을 갈라댈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괴수의 버둥거림이 잠잠해졌다.
“또 한 마리 사냥! 몇 마리째죠?”
“일곱 마리쨉니다.”
“아침 일찍 들어왔겠다, 이대로라면 오늘 저녁은 밖에 나가서 먹겠군요.”
이준기는 생각했다.
이준기, 헬렌 카자크, 길수연의 탱딜힐 조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준기, 길수연은 있지만 헬렌 카자크는 여기에 없다.
게다가 이준기는 탱커도 아니다.
그리고, 현재 공격대원들의 평균 레벨은 28레벨에 조금 못 미친다.
“한꺼번에 두 마리씩 잡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최대한 신중하게 가죠.”
‘공격대장’ 이상덕이 아닌 척후병 이준기에게 오대영이 묻자, 이준기는 교과서적인 대답을 했다.
길수연이 뒤쪽에서 외쳤다.
“힐러들 힘들어요!”
*****
“남동쪽 언덕. 그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지금 장황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연구한 결과에 이곳 지형을 감안해서 결론 내린 겁니다.”
“지금 우리 공격대가, 이준기 씨 감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거야?”
공격대장 이상덕과 척후 이준기의 대화 중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례를 숨기지 않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눈이 쏠렸다.
코리아 길드 강명성이었다.
코리아 길드 소속 최고 랭커지만, 길드 마스터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고 구원자의 본분에만 열중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오사카에서 죽은 코리아 길드의 전 마스터, 고성하는 그의 단짝 친구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만이 알겠지만, 이준기로서는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