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95화 (9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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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3: 천리행 (6)

Episode 33: 천리행 (6)

차원문을 나온 건 오후 여섯 시 반.

최대한 느리게 진행하고, 보스전에 돌입하기 전에는 시간까지 체크했다.

오후 여섯 시에 군인들이 퇴근한다고 하니, 그 이후에 나가야 했다.

던전을 클리어한 이준기는 입구의 오두막으로 돌아와 자판기 메뉴를 클릭했다.

오렌지색 동전으로 살 수 있는, 희귀 스킬 두루마리를 둘러보았다.

손가락을 튕겨 메뉴를 아래쪽으로 스크롤 하던 그는, 찾던 이름을 보고 화면을 멈췄다.

- 텔레키네시스. 마나 책 5권 소요. 채널링 필요. 손을 대지 않고, 원거리의 물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조작합니다. 숙련도가 증가할수록 더 무거운 물체를 움직일 수 있고, 더 복잡한 동작을 취할 수 있으며, 사정거리와 지속시간도 증가합니다.

그렇다. 예전에 이도협이 우유 팩이나 야구공을 움직이던 그 스킬이다.

운이 없는지, 38레벨이 되도록 얻지 못하고 있던 것을, 드디어 얻은 것이다.

던전 안에서만큼이나, 던전 바깥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킬.

쇼핑을 끝내고 충분히 쉬고 나서, 이준기는 오두막의 반대쪽 문을 열고 차원문을 나왔다.

빛의 통로를 지나자,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는 게 들렸다.

“젊은이가 나왔어!”

“스즈키가 마을을 구했군!”

“차원문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어!”

사람들은 마을 잔치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떠들썩해지는 것은 이준기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오늘 파출소 순찰은 지나갔나요?”

“그럼. 아까 오후 한 시쯤에, 잠시 서지도 않고 그냥 근처를 한 바퀴 돌고 가버렸지. 보통 때처럼 말야.”

“군인들은요?”

“여섯 시가 되자마자 튀어나간다구, 그놈들은. 미리 짐까지 챙기고 준비하고 있다가.”

“아침 아홉 시에 다시 오는 거고요?”

“그렇지. 그러고 보니 내일 아침 아홉 시가 되면 차원문이 사라진 걸 그놈들도 알겠군.”

“이장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해봐. 자네는 우리 마을을 구해준 영웅이니까.”

*****

“우리 마을 사람들은 돈 되는 건 뭐든지 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가 어려우니까. 그래서 밀수도 하는 거고.”

“이해합니다.”

“북쪽 바다로 나가서, 사할린이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러시아 배와 만나는 건 흔한 일이야. 마침 이틀 뒤가 또 그날이지. 12월 29일.”

“러시아 쪽 배로 갈아탈 수 있을까요?”

“미리 연락할 방법은 없지만, 괜찮을 거야. 주로 밀수를 하지만, 가끔 러시아 쪽 무용수나 노동자를 우리가 데리고 오기도 하거든.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지만.”

“그렇군요.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정이 있어서요.”

“누구나 말 못 할 사정이 있지. 우리 마을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젊은이한테는 우리 마을 전체가 큰 빚을 졌으니, 우리가 도와주겠네. 꼭,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감사합니다.”

이틀 뒤에 러시아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므로, 하루는 마을에 숨어 있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지었다는 방공 시설이 마을 여기저기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준기는 구로다 상회 지하에 있는 방공호에 숨어 있기로 했다.

“거기가 그나마 지낼 만 할 거야. 바로 위는 상점이니,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가져다주겠네.”

목숨을 위협받으며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왠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조슈아 테일러 일당을 피해 10개월이 넘게 도망 다니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이준기다.

도망 다니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몸.

그러나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지, 다급함이나 위기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 구멍가게 지하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생각되었다.

예상대로, 던전 클리어 다음 날, 마을은 아주 시끄러웠다.

구로다 상회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장소다.

지하에 숨은 이준기에게도 위에서 하는 이야기가 잘 들렸다.

아침에 하품을 하면서 나타난 군인들이 아주 놀라 자빠졌다는 이야기로, 마을 사람들의 담소가 시작되었다.

“그놈들 놀라는 걸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

“혼비백산이었죠. 전화하느라고 아주 진땀을 흘리더라구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거 어디 갔냐고, 차원문 어디 있냐고 난리를 쳤다면서요?”

“도깨비가 물어갔나보다고 했지, 내가 말야. 허허허!”

아침에는 유쾌한 톤으로 대화가 이어졌지만, 이내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 사람들의 대화 톤이 달라졌다.

“아유, 무슨 일이래요, 이게!”

“이장님이랑, 청년부장, 게다가 아이바 할아버지까지?”

“으, 읍내 파출소가 아니라, 사, 삿포로 경찰서에서 데려갔다는데요?”

“읍내 파출소 놈들은 아예 연락도 받지 못한 모양이더라구. 점심시간에 평소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으니. 놀라 자빠진 건 그다음 얘기고.”

“이장님하고 마을 사람들, 풀려나겠죠?”

“늙은이들한테 뭘 어쩌겠어? 저녁때는 집에 돌아올 거야.”

“지금까지 우리가 민원을 넣은 게 몇 번인데! 차원문 신경도 쓰지 않다가 갑자기 이게 웬 적반하장이냐고!”

점심시간에는 구로다 할머니가 직접 밥상을 들고 내려왔다.

전갱이구이에 츠케모노, 그리고 된장국뿐이었지만, 맛이 아주 좋았다.

“어머님이 해주신 밥 같네요. 정말 맛있습니다.”

“어머니만 하겠어? 그래도 일식이 입에 맞나벼?”

“그럼요. 와쇼쿠라면 대환영이죠.”

“일본을 싫어하는 건 아닌가 보구만.”

“저를 죽이려는 사람이, 우연히 일본인인 것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서 이준기는 말을 바꿨다.

“너무 맛있어서 과식하겠어요. 조용히 숨어 있어야 하는데. 하하.”

“밥은 더 있어. 더 먹고 싶으면 말혀.”

“이장님은요? 돌아오셨나요?”

“아직인디. 듣자 하니, 도쿄에서 회사 다니는 이장 아들까지 지금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다고 하더라구.”

“좀, 걱정이 되네요.”

“걱정은 말구. 스즈키 젊은이가 내일 배 타는 데는 아무 문제 없어. 마을에 배 가진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괜히 저 때문에, 이장님과 다른 분들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여, 그게! 사람들이 무서워서 밤에는 바깥에 나다니지도 못한 게 1년이여, 1년! 스즈키 총각이 그놈의 도깨비 문을 없애줘서 마을 사람들이 고마워하는 게 안 보이는겨? 총각은 우리 마을 영웅이여!”

“뭘 그렇게까지··· 감사합니다.”

“잠깐 좀 있어 봐. 내가 칼피스라도 좀 갖구 올랑게.”

*****

12월 29일 수요일.

오키나와 차원문을 공략하기로 했던 날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이상덕과 구라모토의 공작이었으므로, 오늘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본 경찰은 80이 넘은 노인을 상대로 밤샘 조사를 할 정도로 막돼먹은 놈들이었다.

경찰에서 알아서 그렇게 했는지, 협회 측의 압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이장과 일행은 아침 일찍 경찰차 편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걱정 많이 했지? 배 타고 나가는 건 점심 먹고 나서니까, 걱정하지 말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 때문에···”

“아니, 무슨 소리여? 마을의 화근덩어리를 없애줬는데, 젊은이는 우리 마을의 영웅이라고!”

결국 이장과는 마을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러시아 어선과 만나 이준기를 밀항 시켜 주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맡았다.

조그만 동력선을 타고 바다로 나오면서, 이준기는 자기를 걱정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실종··· 어차피 죽었다고 알고 있을 거다. 당분간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모두에게 좋겠지.’

이준기는 러시아에서 잠시 지낼 생각이었다.

부패한 정치권과 결탁한 마피아가 구원자들을 고용하고 차원문을 관리하는 나라.

용병으로 충분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가져온 크레딧 카드로 두 달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물론, 카드는 추적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최후의 수단이다.’

한 달, 길어도 두 달이 지나면, 길드 세계 대전의 막이 오른다.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지만, 분쟁 지역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댜오위다오에서 시작하겠지만, 역사의 루트가 조금 바뀐다 하더라도 세계 규모로 확전되는 분쟁이 일어날 지역은 도처에 널려 있다.

예루살렘, 쿠르디스탄, 이슬람 국가(IS), 체첸, 조지아, 우크라이나, 콩고, 수단, 콜럼비아···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 일본 협회로서도 이준기 한 명을 뒤쫓을 여력은 없을 것이다.

자기 목숨 건사하기도 힘겨운 상황이 될 테니.

이상덕이고 구라모토고, 이준기가 기억하는 역사에서 그들은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세계 대전 이후를 모르는 편이 더 행복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딱히 그들을 동정할 이유도 없다.

99%.

조슈아 테일러가 그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연설에서 인용했던 숫자.

단 두 달 만에, 99%의 구원자가 사망한다.

숫자 하나로 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살아남은 1%에게 좋은 세상이 펼쳐진 것도 아니다.

조슈아 테일러를 거역한 자들은 조슈아와 그의 일당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고,

조슈아 테일러를 따라 인류를 배반하려 했던 자들은 이준기와 그의 일당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제 한두 달 앞으로 다가온 무거운 역사적 과제를 생각하면, 이준기는 마음이 어두워졌다.

어쨌든, 한두 달 사이에 세계는 급격하게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한다.

바로 그 혼란한 틈을 타, 이준기는 한국으로 귀환할 예정이다.

조슈아와 맞서 싸우는 일, 굳이 한국에서 시작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길수연이 있으니, 한국에는 가봐야겠다고 이준기는 생각했다.

동료는 많을수록 좋다.

더구나 길수연이라면 이준기와 생각이 같을 뿐 아니라 능력도 출중하다.

‘문아린은 동료가 되어 줄까? 린핑 루는? 내가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까?’

마을에서 하루 종일 숨어있는 동안 휴대폰 배터리는 꽉 채워 놓았다.

하지만, 당분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가능하다면 배터리를 아껴야 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을 참기가 어려워, 이준기는 뉴스를 빠르게 검색해 보기로 했다.

일본 뉴스 포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구원자와 차원문 기사가 가득했다.

- 사라진 차원문의 수수께끼? 전일협, 미등록 구원자 전수 조사에 나서.

- 1년이나 방치된 차원문. 차별받는 마을의 실태.

- 부라쿠민 문제 재조명. 동화지역 지정은 오히려 낙인찍는 일. 마을 주민들도 꺼려.

오키나와 차원문 공략에 나설 예정이었던 한중일 연합 공격대 기사도 많이 있었다.

- 일중한 연합 공격대 무산. 이준기 비행 사고에 이어 린핑 루도 병원 입원.

- 경찰, 대대적인 이준기 수색 작업. 사고 후 나흘째가 되면서 생존 가능성은 희박.

- 전일협, 이번 사고에도 불구하고 연합 공격대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확대할 방침.

조슈아 테일러가 전면에 나서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 내전 소식도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 서부 전선, 애틀랜타에 이어 마이애미도 점령. ‘승리 선언이 멀지 않았다.’

- 동부 연합 제2인자, 드레 럭러스터 사망설 급속 유포. 자살설도 나돌아.

-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뉴욕시에서 산발적 무력 충돌 이어져. 해당 지역 휴교령 연장.

“스즈키 상! 이제 나와도 돼!”

밀항을 도와준 일본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이준기는 러시아 어선으로 갈아탔다.

싸구려 문신을 잔뜩 새긴 러시아인의 굵은 팔뚝이, 이준기의 팔을 잡아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는 러시아어 문구는 딱 하나.

“스파시바!”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왠지 욕 같이 들린다고 생각했다.

“하하! 예의 바른 친구구만! 일본어로 하라고. 아리가또오데 이인데스까라.”

“일본어를 잘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래. 어서 오라구. 배가 고물이라서 조심해야 할 거야. 뱃멀미를 할지도 모르니까. 일본 배와는 다르다고.”

러시아인이 엔진에 달린 줄을 두 차례 거칠게 당겼다.

픽픽거리던 소리가 우렁차게 부르릉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맞은편, 일본 배에서 마을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이준기도 웃으면서 손 인사로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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