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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4: 마피아의 생존법 (1)
Episode 34: 마피아의 생존법 (1)
2022년 1월 3일, 월요일.
러시아 사할린주(州)의 주도, 유주노사할린스크.
사람들의 통행도 뜸해진 저녁 9시.
대로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골목 안쪽.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노란색 차량이 빠른 속도로 질주해와, 급제동을 한다.
람보르기니 베네노.
새가 날개를 드는 것처럼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옅은 갈색 머리에 회색 눈.
코트의 깃 사이로 살짝 보이는 목에는 문신이 가득하다.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면서 외쳤다.
“로스코비츠 님! 새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세르게이 로스코비츠(Sergei Rothkowitz).
사할린주 전체를 나와바리로 하는 마피아 조직의 제2인자다.
무정부 상태에 빠진 러시아.
마피아가 대놓고 경제를 주무르는 것은 사할린에서도 마찬가지다.
관내 소상공인에 대한 착취 역시 그들에게는 중요한 수입원.
20대 중반에 불과한 세르게이 로스코비츠의 직함 중 하나가 유즈노사할린스크 상가 번영회장이다.
사람 좋은 척 미소를 지으며, 그는 아버지 어머니뻘 되는 상인들을 죽 둘러보며 말했다.
“뭐, 별일 없지?”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중년 부인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눈치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우락부락한 대머리 청년이 한번 쏘아보자 그녀는 찍소리도 못하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이봐, 미샤. 너무 그렇게 겁주지 말라고.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 나타샤 아주머니던가? 할 말 있어요?”
로스코비츠가 그렇게 말했건만, 나타샤는 여전히 겁을 먹은 채 입을 다물고 있다.
미샤가 그녀를 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로스코비츠 님이 물으시잖아. 아주머니, 대답해!”
쭈뼛거리면서, 나타샤는 앞으로 두세 걸음을 걸어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로스코비츠의 손가락에 입을 맞춘 다음, 말했다.
“로··· 로스코비츠 님! 가, 간밤에도 괴물이!”
“뭐야, 또 고블린인가?”
“네, 네. 로스코비츠 님. 또 고블린이··· 저는 문을 꼭 닫고 숨어 있었지만, 우··· 우리 카챠가···”
“카챠? 나타샤 아주머니한테 딸이 있었어?”
로스코비츠의 질문에, 미샤가 그녀를 향해 호통을 쳤다.
“이봐요, 나타샤 아주머니!”
호통에 이어 미샤는 땅바닥에 거칠게 발을 굴렀다.
나타샤가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넘어졌다.
미샤는 로스코비츠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했다.
“카챠는 나타샤 아주머니가 기르던 개 이름입니다.”
로스코비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항? 그래서 나타샤 아주머니가 기르던 개새끼가 죽었다고? 그것참 안된 일이로군요, 나타샤 아주머니?”
“죄,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 고블린 놈은 지금 어딨어요? 아직도 나들이 중이신가?”
“저, 전파상 하는 이반이 쏴··· 쏴 죽였습니다.”
“아니, 그럼, 뭐가 문제야 대체?”
“어, 언제 괴물이 나올지 몰라서···”
“괴물이 이제 5분 후에 나옵니다··· 이렇게 예고 방송이라도 하라는 건가? 나보고 지금 그거 해달라는 거야?”
나타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로스코비츠를 우러러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아··· 아뇨··· 로··· 로스코비츠 님. 로스코비츠 님은··· 차원문을 없애 버리실 수 있잖아요.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제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스코비츠의 오른발이 바닥에 쿵하고 내리찍혔다.
나타샤는 물론, 대머리 떡대 미샤도 움찔했다.
“아니, 내가! 세르게이 로스코비츠가! 쥐새끼 마냥 고블린이나 잡으러 돌아다녀야겠나? 이봐, 미샤. 네놈 생각도 그러냐?”
“아, 아닙니다. 저, 절대.”
“그런데 저 아주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당장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습니다.”
미샤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기 뒤에 차려자세로 기립하고 있던 불량배 두 명에게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금 당장 저 아주머니 끌어내! 끌고 가서 교육 좀 시키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미샤 님!”
두 청년이 양팔을 하나씩 잡자, 나타샤 아주머니의 얼굴색이 노래졌다.
“사, 살려주십쇼, 로스코비츠 님! 미샤 님!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끌려나가는 나타샤를 로스코비츠는 잠시 감상하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정신 상태가 저 모양이니 어디 장사가 제대로 되겠어요? 개새끼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장사를 좀 열심히 해봐요. 지역 경제를 좀 살립시다.”
“네, 네. 알겠습니다. 로스코비츠 님.”
“다른 불만은?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젊은이가 여기 있잖아요. 허심탄회하게 말해봐요.”
“···”
“뭐, 요즘 같은 태평성대도 없다 이건가. 하긴, 나 같은 인텔리겐챠가 이런 깡촌 구석까지 와서 러시아의 부흥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있으니. 이런 게 솔선수범이지.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안 그래, 미샤?”
“그, 그렇습니다, 로스코비츠 님.”
“넌,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냐?”
“네, 네? 노블···”
“아, 아니. 됐다. 너한테 내가 뭘 바라겠냐.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 같으니라고.”
미샤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였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임하신다···는 건 알고 있지? 네놈도 일단은 교회에 다니니까 말이야.”
“네··· 넵!”
“그거랑 비슷한 거야. 모스크바 대학교를 다니던 내가, 고향땅을 마다하고 이런 깡촌까지 내려와서 지역경제 살려보겠다고 상가 번영회장 나부랭이를 맡고 있잖아. 이런 게 노블리스 오블리주야. 알겠냐?”
“아···! 네, 네. 로스코비츠 님.”
“그러니까 너도 마찬가지야. 네 지위만 믿고 사람들 괴롭히는 건 그만두고, 여기 사할린 경제를 어떻게 살릴까, 이런 생각도 좀 해보라고. 알았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로스코비츠 님!”
못마땅하게 미샤를 쳐다보던 로스코비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상인들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상인 여러분들한테도 내가 할 말이 있습니다. 별거는 아니고, 새해가 됐으니,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서 번영회비를 15% 인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인들 사이에서 숨죽인 비명 같은 게 들렸다.
로스코비츠가 상인들 몇몇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어? 설마? 내가 잘못 본 거죠?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그렇죠?”
로스코비츠의 눈빛에 움찔거리던 상인들은 시선을 피하며 숨죽였다.
“그런데, 미샤. 네 부하 놈들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설마 나타샤 아주머니 장례라도 치르는 중이야?”
“그, 그럴 리가요. 이 녀석들 일 처리가 왜 이렇게 느리지? 로, 로스코비츠 님, 제가 잠깐 가서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때마침, 골목 저편에서 미샤의 부하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들이! 로스코비츠 님이 와 계시는데 어슬렁거리다니! 당장 뛰어오지 못해!”
“미··· 미샤 님!”
그들은 직속 상관 미샤의 명령에 따라 뛰려고 했지만, 곧바로 바닥에 넘어졌다.
두 명의 덩치가 바닥에 넘어지자, 그 뒤에 서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 짙은 갈색 머리, 검은 눈.
시장 가판대에서 산 듯한 싸구려 바람막이 재킷을 입은 동양인이다.
그가 영어로 말했다.
“뭐야, 뛰려고 했던 거야?”
*****
두 명의 덩치가 버둥거리면서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것을 그 동양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했다.
로스코비츠와 시장 사람들의 시선도 그곳을 향했다.
손이 뒤로 묶인 게 틀림없는 두 덩치는 바닥을 짚으려고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두 덩치의 발 하나씩이 서로에게 묶여 있었다.
이인삼각 경주를 할 때처럼.
동양인이 다시 영어로 말했다.
“이거, 나타샤 아주머니네 잡화점에서 100개들이 한 묶음으로 산 건데. 요즘 경찰들이 수갑 대신 쓰는 플라스틱 끈 말이지. 나쁜 놈들 제압할 때 효과가 있군.”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당황하는 미샤.
상황은 잘 몰라도, 자기 부하 두 명이 저 동양인에게 제압당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한 미샤를 대신해서, 로스코비츠가 동양인을 향해 영어로 외쳤다.
“넌 뭐냐!”
동양인이 고개를 으쓱하더니 답했다.
“통성명 시간이야? 난 알료샤(Alyosha)라고 한다. 알렉세이(Alexei)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지만, 그냥 알료샤라고 불러줘. 그쪽이 좋게 들리지 않아?”
“알료샤? 일본인은 아닌 것 같은데, 고려인이냐?”
“글쎄? 그건, 친해지면서 차차 알아가자구. 어때?”
“치, 친해져? 말이 좀 통할까 했더니 그냥 지나가던 미친놈인가 보구나. 미샤! 저놈을 당장 이리로 데려와라. 무릎 꿇려서.”
자신 있는 종목인 싸움을 명령받자, 미샤가 신이 나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미샤가 바닥을 쿵쿵 울리면서 달려 나갔다.
상인들은 또 무슨 흉한 꼴을 볼까 하는 생각에 불안한 표정으로 미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미샤는 한주먹에 상대를 날려버리려는 듯 주먹을 쥔 팔을 뒤로 한참 끌어당겼다.
활시위를 당기는 듯이.
다음 순간, 미샤의 몸이 비틀거렸다.
움직이던 물체의 관성 때문인지, 미샤는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두어 걸음을 더 내디뎠다.
동양인이 옆으로 비켜섰다.
오른손은 바지 주머니에서 빼지도 않고, 그는 왼손을 빠르게 움직여 미샤의 콧잔등을 타격했다.
“커헉!”
세 대째를 맞자, 미샤는 바닥에 쓰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구력만큼은 자신하던 미샤였지만, 머리가 핑 도는 탓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처음 한 대를 얻어맞을 때부터 직감했다.
입술 위로 뭐가 흐르는 것 같아 손등으로 훔쳐보니 코피가 묻어 나왔다.
미샤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로스코비츠를 쳐다보았다.
“로··· 로스코비츠 님!”
“미친···”
미샤 쪽을 향해 침을 뱉고, 로스코비츠는 상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들 오늘 운이 좋군. 내가 아주 좋은 구경을 시켜주지. 즉석 통구이를 보여줄 테니, 잘들 보라구.”
이어서 그는 동양인을 바라보며 영어로 외쳤다.
“까부는 건 좋지만, 상대를 가려야 하는 거다. 나에게 까분 대가는, 죽음이다.”
로스코비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편 채로 교향악단을 지휘하듯 손을 움직였다.
화염구 시전을 시작한 것이다.
동양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들릴 듯 말 듯,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늦어. 늦다고. 그런 스킬은.”
동양인은 주머니에서 뺀 오른손 손목을 천천히 돌렸다.
로스코비츠의 손이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현악단이라도 지휘하는 것 같던 그의 손이 갑자기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꺾이더니, 주먹을 쥐고 자기 주인의 얼굴을 강타했다.
로스코비츠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크헉!”
로스코비츠의 양손은 멈추지 않았다.
주먹을 쥔 채로, 그의 양손은 번갈아 가면서 자기 얼굴을 강타했다.
10미터 거리에 서 있는 동양인의 손이, 보이지 않는 실을 통해 마리오네트 인형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퍽! 퍽! 퍽!
자기 주먹에 맞아 코피로 얼굴이 얼룩지면서 로스코비츠가 울부짖었다.
“으, 으아! 살려줘!”
1분 가까이 린치는 계속되었다.
자기 주먹에 떡이 되도록 맞은 로스코비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동양인이 소리쳤다.
“누구! 여기 영어 하시는 분 없어요?”
세 개 정도의 손이 사람들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중 한 사람이 외쳤다.
“나, 나는 마르코비츠라고 하오만···”
“차원문이 있겠죠, 이 근처 어딘가에?”
“네, 네! 그렇습죠. 차원문에서 괴물들이 자꾸 튀어나옵니다!”
“안내해 주세요. 당장 닫아드리죠.”
“네? 정말입니까?”
“대신! 약간의 보답을 해주세요.”
마르코비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러시아어를 좀 가르쳐 주세요.”
마르코비츠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걸 보고, 상인들 사이에서도 안도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