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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4: 마피아의 생존법 (4)
Episode 34: 마피아의 생존법 (4)
차원문을 나왔다.
상인 몇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통역을 담당했던 상인, 마르코비츠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알료샤!”
이준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마르코비츠 씨. 알료샤란 이름으로 불러주니 반갑네요.”
상인 세 명과 함께, 미샤가 차원문 바깥에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어제 본 광경과는 다르게, 미샤는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다.
이준기의 모습을 보자마자 미샤는 차려자세로 섰다.
어제까지 로스코비츠에게 그랬던 것처럼.
로스코비츠도 이준기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미샤가 외쳤다.
두려움에 반가움이 약간 섞인 목소리였다.
“로스코비츠 님!”
로스코비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준기의 눈치를 보았다.
이준기가 로스코비츠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상인들에게 말했다.
“로스코비츠, 아니, 세르게이가 차원문을 정리했습니다.”
마르코비츠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료샤 당신이 한 게 아니고요?”
“저는 감시··· 아니, 구경만 했죠. 응원도 좀 하고요.”
로스코비츠가 말했다.
“나··· 나는 대장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마르코비츠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삼켰다.
입 모양만이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보여주었다.
‘대장?’
이준기가 상황을 정리하려고 말했다.
“로스코··· 아니 세르게이의 말버릇이에요. 날 자꾸 대장이라고 부르네요.”
로스코비츠가 사과하는 투로 말했다.
“아··· 미, 미안해, 알료샤.”
이준기가 다시 상인들에게 말했다.
“세르게이는, 세르게이 로스코비츠는 오늘부로 이곳 번영회장 자리를 사퇴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세르게이?”
“으응. 물론이야.”
“번영회장으로 다른 사람이 오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세르게이가 직접 자기 상급자한테 가서 그렇게 건의할 거거든요. 번영회를 폐지하는 쪽으로요. 그렇지, 세르게이?”
“무, 물론.”
“당분간은 번영회비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되겠죠. 하지만 다른 마피아가 여길 또 노리고 올지도 모릅니다. 그 부분까지는 제가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도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
나타샤 아주머니의 집에서 작은 환송회가 있었다.
이준기는 물론, 마르코비츠와 그의 딸 사샤, 그리고 로스코비츠가 참석했다.
“이 식탁에 사람이 이렇게 여럿 앉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타샤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사샤가 통역했다.
머쓱해 하는 로스코비츠에게 나타샤가 러시아어로 말했다.
“로스코비츠 님, 아니 세르게이가 우리 집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이런 날이 오다니. 와줘서 고마워.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네.”
“제, 제가 그동안 너무 못되게 굴었죠. 죄송합니다, 나타샤 아주머니.”
사샤가 통역하려는 것을 이준기가 막고 말했다.
“화해의 장면이겠죠?”
사샤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알료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거죠.”
“네, 정말 그래요. 이렇게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게 되다니. 알료샤 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평화가 얼마나 계속될지 걱정은 됩니다만.”
“프로코포프 씨가 약속했으니까요,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요.”
프로코포프는 로스코비츠의 직속 상관이자, 극동 마피아 사할린 지부의 총책임자.
바로 어제, 잔뜩 겁을 집어먹은 로스코비츠가 번영회 해체를 건의하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던 인물이다.
총을 들고 난입한 부하 넷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이준기를 보고, 생각을 바꿔먹기는 했지만.
“워, 원하는 게 뭐냐?”
“이런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한테 피는 좀 작작 빨라는 거지.”
“그, 그건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냐. 그것도 모르나?”
이준기에게 큰 목소리로 대드는 자기 보스를 보고, 로스코비츠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리려고 했다.
프로코포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큰 목소리로 이준기에게 말했다.
완력만으로 마피아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난, 지부장일 뿐이라고. 저 세르게이 녀석이 무슨 허풍을 쳤는지 모르지만, 그놈도 이런 시골에서 행동대장 역할이나 하는 녀석일 뿐이라고!”
“그러게요. 시골에 있기에는 좀 아까운 녀석이라서 세르게이는 제가 데리고 갑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내 요구사항은 간단합니다. 첫째, 번영회를 해체하고 상인들 삥 뜯는 짓은 그만둘 것. 둘째, 상납금은 네놈이 그동안 축적한 재산에서 채워 넣을 것. 간단하죠, 안 그렇습니까?”
“시··· 싫다면?”
당당한 목소리를 가장하는 프로코포프였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이준기가 헛기침을 했다.
“흠! 뭐라고요?”
“그, 그러니까··· 만약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그땐 제가 다시 옵니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드리죠.”
“으, 응분의 대가라고?”
“장래가 촉망되는 러시아의 젊은 경제인 100인에 선정된 분이, 그런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따위 목숨, 제가 거둬가 드리겠습니다.”
“사, 살인을 하겠다고?”
“프로코포프 씨가 사업하느라고 구원자 세계를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구원자로서 제 레벨 정도 되려면, 살인은 밥 먹듯이 하게 돼요. 양심의 가책이라도 기대하시는 모양인데, 해충 제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까?”
프로코포프는 그걸로 설득이 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 올린 재산도 아깝겠지만, 자신의 목숨은 더 아까울 것이다.
그런 인간이니까, 이준기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사샤가 말했다.
“아버지가요, 시장 상인들 모아놓고 말하는 폼이, 약속을 지킬 것 같아 보인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겁먹은 프로코포프 씨 표정은 처음 봤다고 얘기하시던걸요.”
“다행이네요.”
“모두 다, 알료샤 님 덕분입니다.”
“천만에요.”
머뭇거리면서, 연갈색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 사샤가 물었다.
“알료샤, 원래 이름은 뭐예요? 은인의 본명도 모른 채 헤어지는 건, 좀 억울하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요.”
“제 이름은 이준기입니다. 이, 준, 기.”
*****
“이준기요?”
사샤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외쳤다.
“저, 정말 이준기예요?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날··· 알아요?”
“부끄럽지만 제가 구원자 덕후라서요··· 어떻게 이준기를 몰라요! 패··· 팬이에요!”
팬이라고까지 하니 고맙기는 하지만, 얼굴을 알아보다니.
정말 변장이라도 해야 하나?
이준기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고··· 곤란하신 거예요? 제가 알아봐서?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 계신 거예요? 뉴스에서는···”
“뉴스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설마, 러시아 뉴스에도 제가 나왔나요?”
“네. 한국 구원자 계의 유망주이자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초고속 렙업 기록을 가진 이준기. 비행기에서 추락해서 실종됐다고··· 아무리 구원자라고 해도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미, 미안하지만 사샤··· 모른 척해줄 수 있죠?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요.”
사샤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알료샤.”
“알료샤?”
“이준기가 아닌 알료샤로 기억할게요. 아버지와 우리 동네를 구해준 영웅으로요···”
“고마워요, 사샤.”
“여기에 조금 더 머무르시면 좋을 텐데. 제가 러시아어도 가르쳐 드리고···”
“그런 여유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네요.”
“네. 저도 알 것 같아요. 사할린 마피아에 이상이 생긴 걸 극동 마피아 본부에서 알기 전에··· 뭔가 하시려는 거죠?”
영웅의 활약을 기대하는 사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멋진 스포츠 대결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걸, 이 아이는 모르는 걸까.
‘아직은 그런 세계, 몰라도 되잖아. 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차원문 사태가 끝났으면 좋겠다.’
둘은 거실로 나왔다.
텔레비전에는 구원자와 차원문을 소재로 하는, 요즘 세상에 흔한 오락 프로가 방송되고 있었다.
음식 접시를 들고 소파와 의자에 앉은 여러 사람들이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구원자인 세르게이가 의외로 열심히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리터리 스타일로 차려입은 여성 MC가 기초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양옆으로 앉은 남자 출연자 둘이 맞장구를 치면서 프로그램은 진행되었다.
“2019년 6월 12일. 런던에 차원문이 처음으로 열렸죠. 차원문에서 나타난 괴물들을 경찰과 군대가 처리했죠. 하지만 차원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차원문에서 언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살 수가 있습니까? 차원문을 어떻게 없애야 하나, 핵무기라도 터뜨려야 하나 각국 정부는 고민이 많았죠.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도시 한복판에 나타난 차원문에 핵무기를 쓰면···”
“네. 그렇게 각국 정부가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 모두 잘 아시는 최초의 구원자, 헬렌 카자크가 나타났죠. 그녀는 6월 19일, 런던 차원문을 닫는 데 성공합니다. 구원자라는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첫 순간이었죠.”
화면에 헬렌 카자크의 모습이 나오자,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들이 말했다.
“오, 헬렌 카자크.”
“정말 예쁜데, 실력도 출중하고. 팔방미인이야.”
“러시아에는 왜 저런 사람이 없는 걸까.”
“러시아 구원자는 죄다 마피아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세르게이 쪽을 흘끗 보며 흠칫했다.
세르게이는 못 들은 척하고 방송에 집중했다.
자료화면이 이어졌다.
“최초의 구원자이자 현재 전 세계 최고 레벨 구원자인 헬렌 카자크는 최고의 셀럽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라이벌이 없는 건 아니죠. 캐나다의 프리실라 세딘티, 베일에 싸인 중국 구원자 린핑 루··· 하지만 아무래도 최고의 라이벌은 이 사람이겠죠.”
방송을 보던 사샤가 작은 목소리로 MC가 말할 다음 단어를 예측했다.
“조슈아!”
여성 MC의 말이 이어졌다.
“바로 미국의 조슈아 테일러죠. 캘리포니아 출신의 천재 미소년, 조슈아의 인기는 가히 허리케인급이라고 해야겠죠. 실력도 실력이지만, 화려한 화이팅 스타일, 게다가 조각 같은 외모.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까요.”
여성 MC는 전율이라도 느낀다는 듯 두 손을 모아쥐며 말을 마쳤다.
마찬가지로 밀리터리 룩으로 차려입은 남자 출연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슈아 테일러. 과연 세계 구급 스타죠. 하지만 우리 조국, 러시아에도 훌륭한 구원자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러시아 랭킹 1위 아브람 쉬넨코 씨를 비롯해서, 본명을 공개하지 않고 활동 중인 2위 랭커, ‘헤라클레스’, 미모의 여전사 마리아 보로닌··· 우리 러시아에도 재색을 겸비한 구원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죠.”
“게다가 우리 러시아의 구원자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국고에서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모두 자원봉사 형식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정말 훌륭한 거죠.”
방송을 보던 몇 사람이 혀를 찼다.
세르게이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못 들은 척, 방송에 집중했지만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말씀하신 것처럼, 러시아에서 구원자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차원문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 구원자는 대개 구원자 자체가 직업이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본업이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생계를 위한 직업은 따로 있고, 구원자 활동은 철저히 사회에 대한 봉사 차원에서 접근하는 거죠.”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조국을 지켜주는 구원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 같네요.”
어차피 매스미디어도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다.
아무도 믿지 않을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당연하다.
사람들을 착취하는 마피아를 자원봉사자라고 추켜세우는 MC의 말에,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타샤가 소파 사이에서 리모컨을 찾아 쥐고 허둥지둥 채널을 돌렸다.
“재미있는 드라마 없나? 오늘같이 즐거운 날 심각하게 교양 프로는 왜 봐요... 자, 어서들 들어요. 음식은 많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