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04화 (104/248)

────────────────────────────────────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5)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5)

긴 설명을 끝마치고 세르게이가 침을 삼켰다.

이준기가 잠깐 기다렸다가 말했다.

“하지만, 세르게이. 넌 내가 뭘 하려는지 알잖아.”

“그래. 갑자기 그 생각을 하니 목이 마르네. 물 좀 마셔도 되지?”

“물론이다. 그런 걸 물을 필요는 없어.”

“그, 그래. 고맙다.”

세르게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냈다.

그가 물을 마시는 걸 바라보면서, 이준기는 생각했다.

‘내가 정말 뭘 하려는 거지? 무정부 상태인 러시아에 숨어서 기회를 보다가 귀국하려던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게 될 줄이야.’

정말 목이 말랐는지, 세르게이는 500밀리리터짜리 생수를 쉬지도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세르게이는 디마와 다르다. 사악해서 마피아가 된 것이 아니라, 절망해서 마피아가 된 녀석이다. 내가 러시아 땅에 정의를 구현하려고 한다고 믿게 되면, 정말 그 일에 온몸으로 뛰어들지도 모르는 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동료를 얻게 되겠지. 조슈아에 맞서 내 곁을 지킬··· 동료를.’

세르게이는 물 한 병을 다 비우더니, 병 레이블을 살펴보고 있었다.

유통기한이라도 찾고 있는 듯이.

호텔 방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그는 병에 적힌 작은 글씨를 파헤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봐, 세르게이.”

“응?”

“뭐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면, 넌 뭘 하고 싶어?”

*****

1월 11일 화요일. 아침 10시 30분.

높이 솟은 하늘.

차갑게 식혀져 청정하게 느껴지는 공기.

이따금 칼바람이 부는 도시 한복판은 인적이 없어 황량한 느낌이다.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페르보레첸스키 구의 주택가.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대로 한가운데에 차원문이 요동치고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군경이 3중, 4중으로 둘러싼 한국의 차원문과는 너무 다른 광경.

지키는 사람은 없지만, 콘크리트로 된 바리케이드는 엉성하게나마 둘러쳐져 있었다.

그래서 교차로임에도 불구하고 차원문 근처의 도로로는 차들이 통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바리케이드도 없었다면, 자동차들도 그냥 평소처럼 다녔을 것이다.

운이 없으면 때마침 차원문을 나온 몬스터에게 죽겠지만, 그런 일은 적어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접근엄금이라고 쓰인 경고 표지판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것이 보였다.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뭇가지를 들고 차원문 근처로 달려왔다.

차원문의 희푸른 소용돌이를 향해 나뭇가지를 뻗어 찔러 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이는 곧 깡총깡총 뛰면서 차원문에 뛰어드는 시늉을 한다.

부드럽게 요동치는 그 구름 덩어리 위에 올라탈 수 있다는 듯이.

그런데 정말 그 아이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디에선가 나타난 남자가 그 아이를 안아 올린 것이다.

들어 올려진 아이는 까르르 웃으면서 남자의 코트 자락, 그리고 중절모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린다.

아이를 들고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도는 남자.

신이 난 아이는 꺅꺅 소리를 질러 댄다.

남자는 아이를 다시 한 바퀴 공중그네 태운 뒤, 땅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차원문의 반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에게 뭐라고 말한다.

위험하니까 다른 곳에서 놀라고 하는 말이겠지.

발이 땅에 닿은 아이는, 쪼르르 뛰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걸 지켜보다가, 코트를 입은 남자는 뒤를 돌아 차원문을 어루만진다.

‘뭐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인상착의가···’

이준기는 휴대폰을 꺼냈다.

세르게이에게서 받은 사진과 대조해 보려는 것이다.

그 순간, 총소리가 겨울 하늘을 갈랐다.

탕!

이어서,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외친다.

“스즈키 상! 바로 저놈이야!”

다시 고개를 돌려 차원문 쪽을 바라보는 이준기.

남자는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바실리 엘리셰프를 바로 눈앞에서 놓쳤다.

숨을 헐떡거리며 청바지 차림의 남자가 이준기 옆으로 달려와 섰다.

목에 머플러를 두르기는 했지만, 그냥 평범한 봄가을 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남자.

극동 마피아 보스,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춥지도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준기에게 아쉬코프가 소리를 질러댔다.

“뭐 하는 거야, 스즈키 상! 당장 놈을 추격해!”

“차원문 안쪽까지 따라가라는 겁니까?”

“왜, 문제 있나? 당신은 구원자잖아. 쫓아 들어가서 잡아 죽여!”

“저 사람이 얼마나 센지도 모르는데, 저 혼자 들어가라고요?”

“이게 당신의 첫 임무야. 잊어버렸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임무 따위 포기하겠습니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아쉬코프는 콧방귀를 뀌며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니, 금방 저쪽에서 받는 것이 들린다.

“나, 나다! 지금 당장, 페르보레첸스키 차원문에 들어갈 구원자 다섯 명을 보내! 그래, 바로 거기. 내가 지금 바로 거기에 와 있다. 나도 들어간다. 그러니까 아무나 다섯 명 보내! 레벨이 높으면 좋겠지만, 지금 연락되는 대로, 다섯 명을 빨리 모아서 보내라. 그래, 알았다.”

전화를 끊고, 아쉬코프는 잠시 이준기를 쏘아보았다.

이준기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아쉬코프가 푸념하듯이 말했다.

“스즈키 상. 이게 마지노선이니까, 잘 들어. 지금 당장, 차원문으로 들어가서 오두막 입구를 지키고 있어. 나는 부하들이 도착하는 대로, 그놈들과 함께 따라 들어가겠다. 알겠지? 그걸로 당신이 첫 번째 임무를 완수한 걸로 해주겠다는 얘기야!”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가능하죠.”

“퇴각 페널티가 거의 없는 차원문이다. 그러니까 저놈이 저렇게 들락날락 하는 거야! 지금 들어가는 걸 눈으로 확인했으니, 나오지 못하게만 막으면 이번에는 확실히 놈을 끝장낼 수 있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아! 스즈키 상도 그 정도 역할은 해야지. 안 그래?”

*****

황량하게 버려진 도로 위에 차원문 하나.

그런 비현실적인 광경을 구경하느라 아직 차원문 정보도 확인하지 않았다.

차원문 안으로 들어온 이준기는 우선 상태창을 열어 던전 정보부터 확인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08991. 랭크 C. ‘소환사의 탑’.

- 차원문 소멸 조건: 탑 꼭대기 층의 소환사 사망.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등급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레벨 업 이후로 축적된 경험치 소멸.

과연, C급이나 되는 던전 치고는 퇴각 페널티가 없다고 말해도 좋을 수준이다.

오두막 문을 열고 나가보니, 숲 한가운데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첨탑이 하나 솟아 있다.

조금 시간을 지체하기는 했지만, 이준기는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발자국은 물론, 별다른 단서가 남아 있지 않다.

추격을 따돌리는 일에는 이력이 난 모양이다.

‘아쉬코프의 말대로, 입구인 오두막을 지키고 있으면 바실리는 꼼짝없이 안에 갇히고 말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쉬코프에게만 좋은 일이 되는 것이고.’

‘소환사의 탑’ 포맷이라면 로밍몹은 거의 없다.

얼마 안 되는 로밍몹도 들락달락 하던 바실리 엘리셰프가 처리했을 것이다.

이준기는 가장 원시적인 방식의 소통을 시도했다.

“먼저 들어오신 분! 저와 한 팀 합시다!”

근처 나무에서 새가 몇 마리,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곧바로 조금 전의 고요함이 다시 돌아왔다.

“전 한국에서 여행차 온 구원잡니다! 러시아 사람이 아니에요!”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려고, 이준기는 계속해서 영어로 외쳤다.

“제 이름은 이준기입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목청껏 소리를 지르다 보니 목이 탔다.

이준기는 인벤토리에서 물병을 꺼내 마셨다.

물도 마시고 가글도 했다.

인벤토리의 물병은 언제나 물이 가득 차는 마법의 물병이니, 물이 떨어질 걱정은 없으니까.

‘자, 다시 한 번.’

이준기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뱃속에서부터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앞에 들어오신 분! 저는 이준기입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등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이준기.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목소리가··· 여자다!

*****

“저는 바실리사 엘리셰프(Vasilisa Elyshev)라고 해요. 그쪽은 이준기? 제 발음이 맞나요?”

“네··· 네! 맞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이준기입니다. 반갑습니다.”

“제 복장이 좀 웃기죠?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아니, 딱히 웃길 것까지는···”

“남성틱한 코트야 그렇다고 쳐도, 중절모는 유니섹스 아이템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말씀 듣고 보니 그렇군요.”

둘은 함께 웃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와서, 차원문 클리어하시겠다고요? 한국식 바캉스인가요, 이거?”

“하하. 듣고 보니 수상하기 짝이 없는 얘기네요.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떡하죠? 저는 한국에서 온 이준기이고, 보시다시피 차원문 안쪽으로 들어온 구원자랍니다.”

“정말 솔직하시네요. 본명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하. 러시아에서는 알료샤라는 애칭을 쓰려고 하고 있는데, 그만두는 게 나으려나요?”

“알료샤요? 설마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그 알료샤?”

“그렇죠, 뭐. 한국 사람이 러시아 이름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그러고 보니 꽤 큐트하신데요! 정말 알료샤 카라마조프라고 해도 되겠어요.”

“그거, 칭찬인가요? 엘리셰프 씨야말로, 그렇게 여성스러운 얼굴로 남장을 하시다니···”

“아, 저는 이거 진짠데. 수염이라도 붙여야 하나. 지금까지는 남자로 잘 다녔다고요. 입만 열지 않으면.”

바실리사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준비가 됐다는 듯 다그치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이준기 씨?”

“네?”

“이준기 씨 맞아요? 이준기라는 이름은 한국에는 흔한 이름인가요? 이준기라는 구원자가 여러 명 있다든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흔한 이름은 아닐 것 같은데··· 저와 이름이 같은 구원자는 아마 없을 겁니다. 있다면 들어봤겠죠.”

“그렇다면, 정말 이준기 씨인 거네요! 살아 있었어요!”

“아, 네?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38레벨 정도 되셨죠? 오키나와 국제 연합 공격대 참가 차 비행기로 이동하다가 추락해서 실종되었다고 뉴스 나온 게 벌써 2주일이나 됐다고요.”

“저··· 저에 대해서 아시는 게 많군요!”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요! 뉴스에서나 보던 이준기 구원자를 직접 보다니! 이름도, 얼굴도 내가 아는 그 이준기인데,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그런데 정말이라니···”

“하하. 네. 조금 뻘쭘하네요.”

“이준기 씨는 모를 거예요. 러시아에서 마피아가 아닌 구원자가 얼마나 어렵게 지내는지. 저는 인터넷으로 이준기 구원자님 뉴스를 읽으면서 희망을 키웠다고요! 지금 제가 이준기 씨를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절대··· 절대 모르실 거예요.”

“아, 아아···”

팬 미팅도 아니고, 이런 식의 고백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바실리사는 여전히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무소속이잖아요! 저희랑 마찬가지 처지예요! 그런데 겨우 몇 개월 만에 한국 랭킹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왔잖아요! 세력이 없어도, 정치질을 하지 않아도 그게 된다는 걸 보여줬잖아요!”

독재자 협회장의 충견이 되었다는 뉴스는 아마 일부러 거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던전 안에서는 언제나 선두에 서신다고도 들었어요! 망설임 같은 것도 없이 언제나 과감하게 결정하고 행동하는데, 선택이 잘못된 경우도 없다고! 공격대원들이 언제나 신뢰하는 동료라고!”

자기 이야기를 좋게 해주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목격자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충분히 달아오를 만한 이야기를 바실리사는 계속했다.

‘누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좋은 방향으로만 곡해해서 지켜보고 있을 줄은···’

“그런데 여기 바로 내 눈앞에 있다니! 이게 설마 우연은 아닐 거예요. 저희를, 도와주러 오신 거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