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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9)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9)
전투는 올레그가 예상했던 대로, 비켄티가 두려워했던 대로, 그리고 블라디미르가 우려했던 대로 진행되었다.
바실리사가 희망했던, 그리고 이준기가 예측했던 상황이 착착 전개되었다.
“쏴! 쏴 버리라고!”
멀리서 실루엣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블라디미르가 다급한 목소리로 부하들을 채근했다.
비켄티가 인벤토리를 뒤적이며 시간을 끄는 사이, 올레그가 활시위에 화살을 매겨 날렸다.
화살이 소실점을 따라 사라진 다음에도, 실루엣은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다가왔다.
부하들의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할 보스의 입에서 솔직한 감정의 말이 새어 나왔다.
“이런, 형편없는 자식들!”
블라디미르가 최고급 석궁을 손에 쥐었다.
볼트를 장전하며 불안한 눈빛으로 적들의 실루엣을 체크하는 블라디미르.
순간, 실루엣 하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 뭐지?”
“보, 보스! 적 하나가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니 집중해!”
“네, 넵!”
비켄티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아··· 아까 그 스킬? 아직도 스킬 책이 남아있었던 건가···”
이준기가 블라디미르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 이, 이놈···!”
파팍!
발차기를 맞고 바닥에 엎어진 블라디미르.
잔뜩 겁에 질린 비켄티가 옆으로 비켜섰다.
더러운 것이라도 피하는 것처럼.
“이··· 이런 곳에··· 왜, 왜 내가!”
올레그는 달랐다.
마피아 경력 12년 차의 신중함이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배어 나왔다.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근접 무기로 바꾸고, 자세를 비틀어 이준기의 정면에 섰다.
손에는 쌍 단검.
내리깐 목소리로 위협하듯, 올레그가 물었다.
“왜 배신하는 거지?”
“배신?”
두 사람이 한차례 검날을 교차했다.
헉헉거리면서 올레그가 물었다.
“프로코포프가 배신한 건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
“무슨 말이냐?”
“나와 프로코포프가 한 팀이라고 생각한다면.”
“한 팀이 아닌데, 우리 쪽에 거짓 정보를 흘렸다? 너를 잠입시키기 위해서?”
“하하하. 세상은 넓지. 적어도 너희 범죄자들의 생각보다는 말이야.”
“프··· 프로코포프가 너한테··· 협박을 당해서 그런 짓을 했다는 거냐?”
“사람이 움직이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 이익, 애정, 그리고··· 공포.”
“네가··· 네가 사할린을 접수했다는 거냐?”
“빙고.”
“너, 넌 도대체 뭐냐? 야쿠자가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다는 거야? 넌 그 선봉장인가?”
“야쿠자? 난 범죄자 안 좋아한다. 마피아든 야쿠자든 삼합회든 말이지.”
“설마, 너 단독이라고?”
“하하하!”
“에잇!”
이를 악물고, 올레그가 다시 덤볐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두 개의 단검을 오른손 무기로 비껴 내린 이준기는 왼손에 쥔 단검으로 올레그의 옆구리를 정통으로 찔렀다.
“헉!”
이준기는 비틀거리는 올레그의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크억···!”
비켄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그걸 보고 있었다.
바지가 젖어 있다.
손에는 아직도 활이 쥐어져 있다.
블라디미르가 소리를 질렀다.
“비켄티! 정신 안 차리냐!”
비켄티가 허겁지겁 인벤토리를 뒤졌다.
이준기가 그의 손을 발로 찼다.
들고 있던 활이 날아가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이준기가 올레그와 비켄티를 상대하는 사이, 블라디미르는 바닥에서 일어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도착한 바실리사가 블라디미르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너는 내가 상대해 주마.”
“너, 넌 누구냐? 서, 설마, 바실리?”
“바실리사 엘리셰프, 푸가초프의 이름으로 극동 마피아 보스, 블라디미르 아쉬코프를 처단한다.”
“계집년일 줄이야.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
올레그가 쓰러지고, 비켄티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기!”
“네?”
“무기, 내놔”
“예, 예!”
비켄티가 들고 있던 양손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뒷걸음질 쳤다.
“하, 항복합니다!”
이준기는 비켄티의 양손검을 수풀 사이로 던져버렸다.
바실리사가 블라디미르와 싸우고 있다.
34레벨의 바실리사보다 3레벨이나 높은 블라디미르.
보스 자리를 도박으로 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이다.
양손에 장검을 들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블라디미르.
맞은 편에는 검과 방패를 들고 마찬가지로 숨을 고르는 바실리사가 서 있다.
이준기의 발걸음을 느꼈는지, 바실리사가 먼저 소리쳤다.
“준기 씨, 여긴 제게 맡겨주세요.”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이··· 준기? 그건 또 뭐냐? 바실리는 남자가 아니더니, 너는 일본놈이 아닌 거냐?”
이준기가 대답했다.
“기분 나쁜 가면을 쓰고 있느라 혼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난 야쿠자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
그리고 바실리사 쪽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바실리사, 정말 괜찮아요?”
“네. 이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 부탁합니다.”
“일부러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굳이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건 일일 뿐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죠.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그렇지 않아요. 사적인 원한입니다.”
이준기가 반응하기도 전에, 블라디미르가 크게 웃어젖히며 끼어들었다.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네년의 말은, 내가 너의 원수라도 된다는 거냐?”
“더러운 입, 닥쳐라.”
“너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내가 죽였군? 그런 거야? 으하하! 통쾌한걸. 아주 시원해.”
“죽여주마,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바실리사가 방패로 왼쪽의 가드를 유지하면서 오른손의 검을 내질렀다.
블라디미르는 왼손 무기로 그녀의 검을 비껴내리면서 오른손에 든 검을 치켜올렸다.
겨우 버클러에 불과한 바실리사의 방패 위쪽으로, 블라디미르의 검날이 날아들었다.
치캉!
이준기가 둘의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오캄의 검날이 블라디미르의 검을 쳐냈다.
뒤로 물러서면서 무게중심이 흐트러진 블라디미르가 바닥에 침을 뱉고 말했다.
“뭐냐, 이 비겁한 놈!”
역시 뒤쪽으로 물러선 바실리사도 항의했다.
“준기 씨!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이건 제가 할 일이에요.”
이준기가 대답했다.
“바실리사. 당신 마음은 이해합니다. 아니, 이해하고 싶어요. 하지만 동료가 다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실리사가 울부짖었다.
“저놈을, 저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살아있을 이유가 있을까요!”
블라디미르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뭔지 몰라도 내가 아주 멋지게 한 건 했나 보군! 너무 뿌듯한데!”
“블라디미르, 죽어라!”
바실리사는 방패를 내던지고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기세로 블라디미르에게 달려들었다.
블라디미르는 옆으로 비켜서서 피했다.
이준기가 외쳤다.
“도발이잖아요! 도발에 흔들리면 어떡합니까!”
바실리사가 울면서 소리쳤다.
“흔들리지 않으면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블라디미르가 이준기에게 말했다.
“내가 저년에게 뭔가 대단한 일을 하긴 했나 봐. 저 여자가 자기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좀 물러나 주는 게 어때? 그게 신사답지 않겠어?”
“그게 너한테 어떤 의미가 있을까? 5분 정도 더 살고 싶다는 거냐?”
“너는 나를 무조건 이긴다는 얘기냐? 그딴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냐?”
“너 따위를 못 이길 거였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지.”
“그래? 그렇다면 2대1로 덤비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내가 저년을 죽일 수 있도록, 잠깐만 우리를 놔둬라.”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바로 그다음 순간에 너는 죽는다.”
“하아. 네놈이 오만하다는 건 충분히 보여줬으니 이제 그만 해도 된다. 내가 저년에게 무슨 재앙을 안겨줬었던 건지, 난 그게 정말 궁금해 미치겠단 말이다.”
블라디미르는 바실리사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봐, 힌트를 좀 줘봐. 아무래도, 가족···이겠지?”
“이런, 개자식!”
바실리사가 다시 양손으로 거머쥔 검을 휘둘렀지만, 블라디미르는 오른손만으로 그걸 쳐냈다.
무게중심이 흔들리며 옆으로 자세가 무너지는 바실리사를 향해, 블라디미르가 왼손의 검을 내질렀다.
“커헉!”
바실리사가 오른쪽 옆구리를 붙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블라디미르도 비명을 질렀다.
“컥! 비겁한 놈!”
바실리사와 마찬가지로, 블라디미르 역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오른팔은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다음에야, 바닥으로 착지했다.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 것을 확인하고 블라디미르는 울부짖었다.
“스즈키! 이 개새꺄! 비겁한 새끼! 쪽빠리!”
그대로 서서 고개만 돌린 채로, 이준기는 바실리사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놈이 당신을 다치게 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
블라디미르가 인벤토리에서 힐링 포션을 꺼냈다.
이준기는 그의 왼손에 사커킥을 날렸다.
힐링 포션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 수풀 어딘가로 사라졌다.
세 개째다.
“야, 이 개새꺄! 넌 제네바 협약도 모르냐!”
“모르는데?”
“항복했잖아! 난 포로다! 포로 학대는 협약 위반이다! 치료를··· 치료를 해야 돼! 아파 죽겠단 말이다!”
“힐링 포션을 몇 개나 더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아직 사커킥 몇 번쯤은 더 할 체력이 있다. 어디 또 한 번 꺼내 봐라.”
“안돼! 살려줘라. 그 정도도 못 해주냐!”
“넌, 죽을 거다.”
“안돼, 안돼! 난 죽지 않을 거다!”
블라디미르가 또다시 힐링 포션을 꺼내 들었다.
이준기의 발차기에 또다시 유리병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썅!”
욕을 하며 바닥에 침을 뱉는 블라디미르.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힐링 포션으로 치료를 마친 바실리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사형이다.”
“아··· 안돼! 내가 뭘 어쨌길래? 난 극동 연방 관구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다! 여기에 나만 한 통치자가 있었다는 거냐?”
“토, 통치자?”
바실리사는 말문이 막혔다.
블라디미르에게서 눈을 떼고, 하늘을 한 차례 쳐다보면서 숨을 고르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네놈이 지은 죄를 열거하자면 해가 진 다음에야 널 죽일 수 있겠지. 그건 내가 사양한다. 자, 이제 죽어라.”
“자, 잠깐, 바실리사! 내가 너의 누구를 죽였나? 그건 알려다오.”
“거절한다.”
“자··· 잠깐만! 내가 죽일 놈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한 것 아닌가? 그, 그리고··· 힐링 포션을 하나만이라도 먹게 해다오. 너, 너무 아프다. 떨어져 나간 팔이··· 불타는 것 같아!”
“네가 죽인 그 수많은 사람들··· 그들에게 넌···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풀었던가?”
“아냐! 난 누구보다 합리적인 통치를 했다. 그것도 모르겠냐?”
“네놈에게 이 이상 말하는 즐거움을 줄 수는 없다. 이제, 죽어라.”
“아, 안돼!”
바실리사의 검이 대각선으로 내려왔다.
블라디미르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쿠, 쿨럭. 나, 난··· 아··· 안돼··· 난, 아직···”
바실리사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의 고통스런 단말마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다는 듯, 그녀는 숨조차 죽이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준기도, 비켄티도 숨을 죽였다.
겨울의 숲에는 풀벌레 소리도 없었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블라디미르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 섞이는 배경음은 오직 이따금 들리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준기 씨.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녜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이준기는 비켄티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저 친구부터 처리하죠.”
마치 물건을 대하듯 하는 이준기의 말투에 비켄티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이 지나간 후, 비켄티의 얼굴에 사색이 드리워졌다.
그는 울먹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 저는··· 아니, 날··· 죽··· 죽이지는··· 아니, 그게 무··· 무슨···”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건지, 비켄티의 말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만 가득했다.
바실리사가 이준기에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죠. 모두 죽여야 한다고.”
비켄티의 목소리가 커졌다.
울먹임으로 계속해서 끊기는 그의 목소리가 어떡해서든 의미를 짜내려고 노력했다.
“아··· 아··· 아니! 나, 나를 왜··· 나, 난 그저··· 또··· 똘··· 마니···”
바실리사가 말했다.
“전형적이고 비겁한 핑계군요.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주인의식이 없었다면서,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는 왜 주인의식을 가지려는 거죠?”
비켄티를 내려다보는 바실리사의 눈에 혐오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면서, 이준기는 말했다.
“이 자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겠죠?”
“비켄티 안드로포프. 살인 13건과 살인 교사 7건. 그가 직접 죽인 살인 피해자 중에는 열두 살짜리 꼬마도 있어요. 푸가초프가 파악한 것만 그래요. 인신매매, 기물 파손, 강간, 상해, 강도, 밀수, 불법 무기 유통··· 이런 건 목록을 만들기도 어렵죠. 충분하지 않은가요?”
“충분합니다.”
“사형은 제가 집행하겠습니다. 푸가초프의 이름으로.”
비켄티는 아직도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한 채 웅얼거리고만 있었다.
“아··· 아··· 나··· 주··· 죽는···”
바실리사가 비켄티의 바로 앞에 다가가 섰다.
그녀의 두 손이 검을 움켜쥔 채 높이 올라갔다.
푸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