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37화 (137/248)

────────────────────────────────────

Episode 39: 디스 민즈 워 (10)

Episode 39: 디스 민즈 워 (10)

벽장 안에서부터, 이리나 보로비예프가 걸어나왔다.

밖에 서자마자 그녀는 오렌지색 긴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마치 샴푸 광고라도 찍는 것처럼.

“휴··· 답답해서 혼났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서 반쯤 일어선 채, 루슬란이 말했다.

“수고했어, 이리나. 뭐 마실 거라도 가져다줄까?”

“괜찮아요··· 아니, 보드카 좀 있어요?”

“물론이지. 잠깐 기다려. 온더락스로?”

“스트레이트로 줘요. 잔에 반만 채워서.”

거실에서 기둥 하나만 사이에 둔 부엌으로 가서 루슬란은 부스럭거렸다.

이리나는 개똥밭이라도 걷는 것처럼 바닥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 소파까지 왔다.

지저분한 소파를 보며 인상을 한 번 쓰기는 했지만, 이리나는 털썩 앉았다.

루슬란이 유리잔에 보드카를 반쯤 채워서 가지고 왔다.

이리나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잔을 빼앗아 한 모금을 삼켰다.

“잘하셨어요.”

“뭘···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건데.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즐거운 농부는 그래서 지금 아저씨 한 사람뿐인 건가요?”

“아··· 아니. 내가 무슨 조직원이야. ‘즐거운 농부’라는 건 이제 없는 거지.”

“하긴 그런가? 아저씨, 총 있어요?”

“초··· 총이 어딨어. 있었어도 이미 팔아버렸을걸.”

“가난한 거군요?”

“그래.”

“구원자인데도 그래요?”

“구원자라고 누가 돈을 주나.”

“강도질이라도 하면요?”

“가··· 강도질을 왜 해.”

“가난하게 사느니··· 저 같으면 강도질이라도 하겠어요.”

“그··· 그런가.”

“이 근처에 어디 부잣집 없어요? 아저씨가 정 그러면, 제가 그 집 털어드릴게요. 오늘 사례로.”

“아, 아냐. 말만이라도 고마워.”

이리나는 다시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입안에서 술을 머금고 잠깐 음미하다가, 꿀꺽 넘기고 그녀는 말했다.

“즐거운 농부를 찾아 여기로 올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두 명일 줄은 몰랐어요. 바실리사 혼자였다면··· 복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보리스··· 좋은 사람이었나 봐.”

“그럼요. 천애 고아인 저를 거둬준 은인이죠. 푸가초프라는 대의를 가르쳐 준 것도 그 사람이고요. 그런 보리스를··· 배신하고 죽인 바실리사··· 절대 용서하지 못해요.”

“옆 사람은 누구였을까? 말도 거의 하지 않던데.”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극동 마피아 멤버죠. 살아 있었다니··· 바실리사는 아마 극동 마피아에 회유된 것 같아요.”

“극동 마피아?”

“보리스의 정보에 따르면, 바실리사는 최근에 극동 마피아 두 명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고 했어요. 모스크바 마피아의 역습으로 그 두 명은 죽고 바실리사 혼자 살아남았다고 했는데··· 보리스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보리스는 죽었다고 했지?”

“네. 저는 시체를 못 봤지만··· 사벨리가 확인해 줬죠.”

“사벨리?”

“네. 푸가초프 멤버예요. 제 공식 접촉점이죠. 사벨리와 바실리사.”

“보리스는?”

“보리스는 비공식 접촉점이고요. 저를 푸가초프로 안내한 것은 보리스인데, 형식상으로는 사벨리가 저를 입회시킨 것으로 했어요.”

“그래? 그렇다면 보리스는 이리나나 바실리사 말고도 많은 사람들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군?”

“저나 바실리사와 같은 평 조직원보다는 그렇겠죠. 그게 뭐 문제인가요?”

“아니··· 그런 건 점조직이라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 같아서···”

“그만큼 푸가초프에 중요한 멤버였다는 거죠. 아무튼··· 저는 푸가초프가 어떻게 되든 그런 건 더 이상 상관 안 해요. 보리스의 복수를 하는 것만이 제 목적이죠.”

“보리스를 죽인 게, 바실리사라는 건 확실하고?”

“보리스의 마지막 일정이 바실리사와 만나는 거였어요! 바로 그 술집에서. 그런데 죽었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요?”

“아니, 아까 그 아가씨 눈이··· 사람 죽이고 그럴 것 같지 않아서···”

“뭐예요? 제가 보기에는 표독스럽기 그지없던데. 아저씨, 말조심 해주세요. 저,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으니까요.”

“그, 그래··· 미안해.”

이리나는 잔에 남아 있던 보드카를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상관없어요. 제가 계속 추격할 겁니다. 푸가초프가 도와줄 거예요.”

*****

1월 26일 수요일. 아침 10시.

세종문화회관 앞 대로에서 대대적인 출정식이 치러졌다.

아침 10시에 차원문에 들어가야 하는 구원자들의 사정을 고려해서, 기자회견은 생략하고 보도자료 배포로 대신했다.

상위 랭커 20명 전원이 공격대를 구성했지만, 사상 초유의 A등급 던전이다.

20명 중 몇 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희생자가 자신이 아니기만을 희망하면서.

그러는 와중에 생각이 더 복잡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상덕, 한상태, 김범규는 물론이고, 김나리··· 그리고 유지호.

출정 겨우 사흘 전에 문아린이 은퇴해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20위가 되어 공격대에 강제로 편성된 유지호다.

탱커라서 화력에 별 보탬이 되지 않으니까, 다음 순위를 공격대에 편성하는 게 맞다고 항변했지만, 긴급명령에 의한 공격대 구성에 예외는 인정되지 않았다.

아니, 예외는 긴급명령에 명시된 그 세 가지에만 국한되었다.

‘제기랄··· 내가 왜 이런 사지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 나는 상황이건만, 공격대에 포함되자마자 유지호는 여러 사람들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협회 사무총장 신학길을 시작으로, 프라이드 길드의 한상태 회장, 브릴리언트 길드의 김범규 회장, 이어서 협회장 이상덕까지 만나야 했다.

‘누구 편이냐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던전이 무슨 배틀로얄 투기장이냐?’

인천 공항이 아니고 청와대가 지척인 광화문이라서 그런지, 출정식 식순에는 대통령 연설까지 포함되었다.

3분 내외의 짧은 연설이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공격대원들은 모두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한상태만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통령님 연설은 역시 훌륭하군. 나도 한 표 찍어드렸다고!”

공격대원 명단이 발표되었다.

미리 준비해둔 바람잡이들이 주도하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 공격대장 겸 리드: 이상덕 한국 길드협회장 겸 서울연합 길드 마스터. 41레벨.

- 탱커.

- 한상태 회장. 프라이드. 40레벨.

- 오대영. 서울연합. 39레벨.

- 김범규 회장. 브릴리언트. 39레벨.

- 선우결 회장. 레인메이커즈. 35레벨.

- 신다은. 브릴리언트. 35레벨.

- 유지호 회장. 남십자성. 33레벨.

- 힐러.

- 길수연. 기파랑. 38레벨.

- 김나리. 브릴리언트 길드. 37레벨.

- 남경철. 서울연합. 36레벨.

- 한소미. 프라이드. 34레벨.

- 딜러

- 강명성. 서울연합. 38레벨.

- 변희영. 서울연합. 37레벨.

- 정두리. 서울엽합. 37레벨.

- 최현. 브릴리언트. 36레벨.

- 나현우. 브릴리언트. 36레벨.

- 박보도. 서울연합. 36레벨.

- 장대한. 프라이드. 36레벨.

- 박건우 회장. 기파랑. 35레벨.

- 김새로미. 브릴리언트. 34레벨.

기자 김대기는 명단을 살펴보면서 문아린 은퇴 소식을 떠올렸다.

구원자가 은퇴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만두는 것이 가장 흔한 케이스.

그런 경우라도 그냥 소리소문없이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지, 은퇴 발표를 하지는 않는다.

문아린은 그러나 은퇴 발표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공식 랭킹 20위의 딜러로서 이 공격대에 강제 편성되었겠지.

“진입합니다!”

사회자의 선언이 울려 퍼졌다.

차원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이상덕이 사람들을 향해 손을 한 차례 흔들어 보이고 사라졌다.

*****

공격대 출정식은 10시 46분에 끝났다.

군경들이 투입되어 행사장이 빠른 속도로 정리되고 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원문 근처에 나타났다.

차원문을 향해 다가오는 그들을 막아서면서 최한식 중령이 말했다.

“접근금지입니다.”

무리의 선두에 선, 중절모를 쓴 남자가 손바닥을 폈다.

명함이었다.

그걸 건네면서 그 남자가 중령에게 말했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진철입니다.”

최한식 중령이 거수경례를 올렸다.

“모··· 몰라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경계를 잘 서고 있으니, 내가 오히려 칭찬을 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가···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온 이유는··· 뭐 대략 추측하시겠지요?”

“이··· 이분들은 누구신지?”

“이분들은 광화문 차원문 정리를 도와주실 분들입니다. 대통령 각하 지시로, 이분들 역시 앞서 진입하신 공격대원들과 함께 던전 공략에 나설 예정입니다.”

“네?”

최한식 중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런 지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분들은 구원자들입니다.”

“네, 그렇겠죠. 하지만···”

“중령님이 막아서도, 이분들은 밀고 들어가실 수 있다는 겁니다.”

“네?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직접. 이분들이 오늘 이곳 차원문에 들어가는 것은, 대통령 각하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혀··· 협회는요?”

“아! 협회. 말씀 잘하셨습니다. 이분들이 여기 차원문에 진입하게 해 달라고, 대통령 각하께 직접 청원을 한 사람이 바로 이상덕 협회장입니다.”

“그··· 그렇다면···”

“뭔가 미리 들으신 것이 있군요?”

“이분들이 바로··· 일본 구원자분들?”

“네, 맞습니다.”

차진철의 뒤에서 키가 작달막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손을 내밀어 최한식 중령의 손을 강제로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시바 세이이치로라고 합니다.”

*****

공격대원들은 대기실인 오두막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마쳤다.

A등급 던전의 오두막은 처음이다.

C등급 던전 오두막의 네 배는 되는 크기.

보급품 선반이나 자판기는 그대로이지만, 대기 공간의 크기가 큰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번 던전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소모품 보충을 시작으로, 장비 점검도 하고 전략 관련해서 이런저런 잡담도 하는 사람들.

서울연합 메인 탱커, 오대영이 대화의 중심에 있었다.

포맷 ‘사대천왕’에 대해서 일본 구원자협회에서 공식 브리핑을 듣고 왔기 때문이다.

“사대천왕 중에서 겨우 한 명한테만 이기면 된다는 게 사실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그게 일본 협회에서 들은 이야깁니다.”

“자료를 보고 궁금했던 게 그거예요. 왜 일본에서는 고블린이 아닌 오크 천왕을 선택한 거죠?”

“일본 공격대도 처음에는 고블린을 선택했죠.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고블린이 아무래도 제일 약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니까요.”

“아니었다는 겁니까?”

“고블린 천왕이 엄청 세다는 겁니다.”

“그래요? 일본 협회 자료에는 딱히 그렇게 쓰여 있지는 않던데.”

“왜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써 놓았는지는 저도 의문입니다. 그저 고블린 천왕이 사용하는 기술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기술되어 있죠. 고블린 천왕에게 전멸당할 뻔했다고, 일본 협회 사람은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용케 전멸을 피했군요.”

“항복하면 된다고 합니다. 공격대장이 항복 의사를 전달하면, 무사히 돌려보내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공격대는 고블린 천왕에게 덤볐다가 항복하고, 이어서 오크 천왕을 이긴 거군요?”

“네. 그래서 놀 천왕과 이그니 천왕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실하죠.”

한편, 김범규는 이상덕과 가볍게 환담 중이었다.

“이상덕 회장님. 그동안 못 뵌 지가 좀 됐네요.”

“그렇군요, 김 회장. 잘 지냈죠?”

“물론입니다. 이 회장님 레벨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지겠어요.”

“하하. 무슨 겸양의 말씀을. 요즘은 저도 좀 느긋해졌죠. 레벨업 속도가 말입니다.”

“아하. 그렇긴 하죠. 이준기가 실종된 후에는···”

이상덕에게 이준기 이야기를 한 것이 말실수는 아닌지, 김범규는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상덕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다.

“이준기 실장··· 정말 아까운 사람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 회장님한테 이준기··· 실장처럼 큰 공을 세운 사람도 많지 않죠?”

“네, 네. 물론이죠.”

“수색은 아직입니까?”

“아직도 하루에 한 번은 헬기를 띄운다고 합니다. 일본 협회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죠. 보통 실종자 같으면 벌써 수색을 포기했겠지만···”

“일본을 도우러 가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요. 그 사람들도 조금 미안하기는 하겠죠.”

“많이··· 많이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색도 계속하고 있는 거고요.”

“하긴 그렇겠네요. 실종된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거의 한 달이군요.”

김나리는 같은 길드의 딜러 김새로미와 이야기 중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설마··· 협회장 때문에?”

“너는 인천 공항 그 자리에 없었잖아.”

“정말··· 살벌했나 보구나.”

“학살···이었다구!”

“나는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그런 싸움은 자주 일어나잖아?”

“그래. 아무리 그래도 살인을 직접 목격하고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치외법권이라면서··· 우리가 뭘 어쩌겠어.”

“내가, 우리가 희생자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있어?”

“서··· 설마.”

누군가가, 김나리의 어깨를 격려라도 하듯이 가볍게 다독였다.

한상태였다.

“걱정 말아요, 김나리 힐러.”

“한상태 회장님.”

그녀를 뒤로하고 한상태는 오두막 문 쪽을 향해 성큼 걸었다.

“모두들, 준비 끝나셨습니까?”

오대영이 앞으로 나서면서 한상태에게 말했다.

“뭡니까, 한상태 회장님? 공격대장은 이상덕 협회장이십니다.”

“훗. 오 회장은 빠지시죠.”

“네? 뭐라고요?”

무례에 항의하려는 오대영을 본체만체 하며, 한상태가 오두막 건너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상덕!”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상덕이 사람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한 회장··· 예의를 갖추세요. 공격대에서 뭐 하는 겁니까?”

한상태는 콧방귀를 뀌며 더 큰 목소리로 이상덕에게 소리 질렀다.

“이상덕! 너와 나의 일기토다. 앞으로 나와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