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11화 (21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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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0: 트루 컬러즈 (5)

Episode 50: 트루 컬러즈 (5)

후지와라 테츠는 고민했다.

저녁 8시에는 공항에 나가야 했다.

한일 연합군 제3차 원정대 일본팀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오는 시간이다.

나리타 공항에서 일본항공편으로 도착하는 그들을 맞아야 한다.

이유 없이 원정대에서 빠지겠다고 한다면, 아마 야마토 연합과 협회, 그리고 길드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러나 원정대에 남아 이준기와 대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케다 시게히데가 한 것처럼, 그렇게 은거해 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은퇴 당시 일본 전체에서 탑랭커였던 다케다.

협회장 구라모토로서도 그를 어떻게 하는 것은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바람에 졸지에 20위권에 들어온 후지와라 테츠는 구라모토의 눈에 일개 병졸일 뿐이다.

암살해 버리면 그만이다.

구라모토 회장의 오른팔, 왼팔이라 불리던 하시바 세이이치로와 야마시타 시게루가 모두 죽었지만, 후지와라 정도를 죽이는 데는 그런 거물을 동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준기의 동료··· 아니 부하가 되어도 정말 괜찮을까?’

구원자로서 누렸던 특권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준기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페이도 특권도 없이 그저 보람을 먹고 사는 길이라고.

‘난 아마 그렇게 살지 못하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미 이준기의 수하가 되었다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이준기라는 자가 정말로 극동 마피아를 부수고 일본군의 진격을 막은 것인지.

‘이준기의 부하가 된 사람이 누굴까?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사실은 살아 있는 거겠지? 사토? 와타나베?’

제2차 원정대 사람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시바 세이이치로나 그의 심복, 야스다 겐지일 가능성은 없다.

참의원 아들이라고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아마쿠사 쿠로가 이준기에게 투항했을까?

쉽게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다.

사토 켄이치나 와타나베 아카리도 일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공포에 굴복한 것이라면?

노크에 이어, 방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극동 마피아 소유였던 값싼 비즈니스호텔.

후지와라가 지금 갇혀 있는 곳이다.

들어온 것은 문아린.

김창수와 함께 그를 이곳으로 안내한 한국인 구원자다.

후지와라는 침대맡의 디지털시계를 살펴보며 머뭇머뭇 물었다.

“버··· 벌써 시간이 됐나요?”

“아뇨. 안심하세요, 후지와라 씨. 정말 한국어가 자연스러우시네요. 한국 사람 발음이네요.”

“감사···합니다.”

“궁금하신 게 많죠? 질문에 대답을 해드리려고 왔어요. 준기 오빠가 후지와라 씨를 좋게 평가하는 것 같네요. 이렇게 생각할 시간을 다 주고.”

“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죽였나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던전 안이었다면, 아무래도 상황이 이렇게 고요하지는 않았겠죠.”

“다행···인 거군요.”

“말해 보세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뭐죠?”

후지와라는 기가 막혔다.

구원자로서 특권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데, 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냐고?

이준기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구원자는 그 결정이 쉬웠나 보다.

‘기생 오래비처럼 생겨서, 이렇게 여자가 꼬이는 건가 보군. 이 여자도 꽤 미인인데.’

후지와라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문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원자로서 특권을 버려야 하는 것 때문이겠죠? 아닌가요?”

“마··· 맞습니다. 특권이라고 할 것도 없잖습니까? 저는 집이 부자도 아니고, 급료는 필요해요. 저도 먹고살아야죠.”

“준기 오빠가 숙식 제공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호의호식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아, 호의호식이 필요하신 거예요?”

제2차 원정에 참가했던 김창수의 레벨은 후지와라보다 훨씬 낮다.

문아린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자, 후지와라는 대등한 자격으로 논쟁을 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비꼬실 필요는 없잖아요? 구원자님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구원자 각성 전까지 후리따로 살던 처지였습니다. 후리따가 뭔지 모르시죠?”

“대강 알아요. 그러니까 비정규직이라는 거죠?”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많이 쓰더군요.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비정규직만도 못한 게 후리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후리따의 한국말 번역은 ‘거지’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그건 너무 비약 아닌가요? 저도 구원자 각성 전에는 가난했어요. 아니, 구원자로 각성한 다음에도 돈은 별로 못 벌었어요.”

“그런데 구원자 생활을 은퇴하고 여기에 와 계신 겁니까?”

문아린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물었다.

“후지와라 씨는 가족이 있나요?”

“가족이요? 부모님, 그리고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에게 뭔가, 돈이나 부동산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거예요?”

“아···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그냥 저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먹고는 살아야죠. 인간이라면 당연한 본능 아닙니까?”

“그 정도는 가능할 거예요.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둔 돈도 조금은 있잖아요?”

“네? 그거야 약간은 있지만···”

“주제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말씀하세요.”

“저는, 구원자의 목숨은 불꽃 같다고 생각해요.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불꽃이 원래 그런 거죠. 화려하게 보일지 말지, 결정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곧 꺼질 운명이죠.”

“죽는다는··· 얘기십니까?”

“네. 전 세계 차원문이 다 사라지면 구원자들도 다시 일반인이 되는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 날이 언젠가 올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날을 보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죽을 걸 생각하고 사신다고요?”

“그래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제 남은 수명은 길어야 5년 정도 아닐까요?”

*****

이준기의 동료가 되기로 하고, 후지와라는 쿠로사와를 만났다.

살아남은 인원 중에 이준기의 첩자가 있었다니, 구라모토가 알면 기가 찰 일이다.

쿠로사와는 후지와라의 두 손을 와락 잡으며 친한 척을 했다.

“환영한다, 후지와라! 너도 이준기 님의 동료가 됐구나.”

“님은 또 뭐야? 이준기 님?”

“이준기 님의 실력을 봤을 거 아냐. 그래서 돌아선 거 아닌가?”

“어··· 그렇긴 하지만··· 너에게 직접 듣고 싶다. 이준기가 그 정도로 대단한가?”

“무슨 말이야? 오늘 이준기 님이 살짝 맛배기만 보여주신 건가?”

“염력 정도.”

“텔레키네시스만 해도 대단하지! 하시바 세이이치로, 그놈 기억하지? 자기가 텔레키네시스 최고 실력자라도 되는 듯이 우쭐대고는 했잖아. 뭐, 사실 상당한 실력자이기도 했고.”

“하시바 세이이치로, 말만 들었을 뿐이야. 하시바가 염력 쓰는 모습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자동차를 구겨버린다고 하면, 상상이 돼?”

“뭐, 진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던 날, 실제로 그놈이 그걸 선보였었지. 그 정도가 다였지만.”

“무슨 소리야?”

“이준기 님과 하시바 세이이치로의 대결. 그걸 직관한 유일한 목격자가 쿠사나기다. 그 여자가 나에게 얘기해줬지.”

이 시점에서 쿠사나기와 쿠로사와는 서로가 같은 편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홀로 적진에서 밀정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쿠로사와가 알도록 한 것이다.

공포에 굴복한 그가 다른 공포에 굴복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대결··· 어떻게 됐는데?”

“이준기 님은 하시바에게 열 번 공격권을 줬다. 정확히는 열한 번이지. 그걸 단 한 번도, 하시바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거다. 놈의 장기라던 귀검도 텔레키네시스도 이준기 님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는 거지.”

이어, 쿠로사와는 둘 사이의 텔레키네시스 대결 이야기를 했다.

하시바가 세 조각으로 부러뜨린 자수정 성모상을, 이준기가 빼앗아 다시 차곡차곡 쌓았다는 이야기.

“그··· 그건, 오늘 본 것과 비슷하군.”

“아, 그래? 나는 아직 이준기 님 텔레키네시스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운이 좋군.”

“한상태가 뽑아 들고 덤빈 표지판을, 이준기가 다시 보도블록 위에 심었지. 그다음엔 한상태의 발을 움직여 보도블록 튀어나온 부분의 땅을 다졌지.”

“크하하하! 그거 재미있었겠군!”

“재미? 그냥 놀라서 지켜보기만 했지.”

“아무튼, 환영한다! 이제 일본인으로 이준기 사단은 세 명이군!”

“불안하지 않아, 이렇게 사는 거?”

“글쎄? 일단 살아 있으니까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단순해서 속이 편하겠다고 생각하면서, 후지와라는 물었다.

“그래, 오늘 저녁에 우리 둘은 함께 움직이는 거지?”

“그럼. 걱정 마라.”

*****

출국장을 나오는 일본 팀.

일본 랭킹 4위의 사이토 카이를 선두로, 스무 명가량이 쏟아져 나왔다.

쿠로사와 카츠와 후지와라 테츠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사이토 님.”

“응? 후지와라 너는 한상태 회장을 수행해야 하는 거 아닌가? 굳이 여기까지 나올 필요가 없는데.”

“그게··· 급히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사이토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말했다.

“뭔데?”

“한상태 회장과 한국 팀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뭐가 어째?”

“약속이 틀리다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알아듣게 설명을 하란 말이다!”

“그게··· 적측에··· 그러니까 러시아 쪽에··· 이준기가 나타났습니다!”

“이··· 준기? 그 이준기? 비행기에서 떨어지고 실종되었던 그 이준기?”

“네.”

“살아 있었다고?”

“네.”

“구라모토 회장이 죽었을 거라고 얘기했었잖아! 아니, 당연하잖아! 구원자는 비행기에서 떨어져도 사는 거야? 나도 한번 뛰어볼까?”

“사이토 님, 진정하십시오.”

“그래서, 이준기가 러시아 쪽에 붙었으니 얘기가 다르다면서 한상태가 군대를 철수했다고?”

“네.”

“이봐, 쿠로사와, 네가 설명해 봐라. 넌 이준기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었나?”

쿠로사와가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난번에, 러시아 마피아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우리 아지트를 기습했다고 했었지. 그때 하시바가 죽은 거고 말이야. 그때 넌 어디에 있었나?”

“이미 보고드렸다시피, 저는 하바롭스크 출장 중이었습니다.”

“흠··· 그랬었지.”

사이토는 뒤를 돌아 자기 뒤를 따르는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쿠사나기!”

“네.”

“너는? 아지트가 기습당할 때 거기 있었겠지? 너는 하시바 녀석의 비서니까 말이다.”

“네. 현장에 있었습니다.”

“기습당할 때, 적군 사이에 이준기가 있었어?”

“그··· 글쎄요. 저는 못 봤습니다. 저는 정문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하긴, 보고서에도 그렇게 썼었지. 너는 정문 방어 중이었고, 후문으로 들어온 부대에 아지트가 털린 거라고. 그래서 너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아나온 것이고 말이야. 그렇지?”

사이토의 뱀 같은 시선을, 쿠사나기는 당당하게 맞받았다.

“네. 그때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그럼 후문 쪽으로 들어온 부대에 이준기가 섞여 있었던 건가? 정문 쪽은 어땠어? 혹시 동양인이 있었나?”

“아뇨. 러시아인들이었습니다.”

“그래. 후문 쪽도 방어를 좀 잘할 것이지. 쯧쯧.”

사이토는 고개를 돌려 다시 후지와라에게 물었다.

“그래서, 한상태가 군대를 물렸다?”

“네. 사이토 님이 오실 때까지 일단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그게, 이준기가 적측에 있어서? 이준기가 무서워서 도망갔다고?”

“그렇다기보다는, 한국인 이준기와 싸울 수 없다면서.”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한상태가 죽인 이상덕은 한국인이 아니었나?”

“한상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말을 전하는 입장이라서.”

“좋아. 그렇다면 얘기가 간단해지는군. 내가 그 이준기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회를 떠버리면, 한상태가 군대를 몰고 다시 돌아오겠군.”

“그···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준기가 예상했던 그대로 사이토가 말하자, 후지와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들렸다.

다음은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자동문이 열리고, 문 건너편에서 이준기가 사이토를 향해 손짓을 했다.

“사이토 카이, 덤벼라. 내가 이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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