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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4)
Episode 51: 책장을 넘기며 (4)
“아니? 이럴 수가 없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몰아쉬며, 바이런이 이준기를 향해 외쳤다.
전시실 구석구석에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얼음 화살이 빗나가다니, 무슨 개수작이냐?”
분노와 증오를 불태우며 달려온 길이다.
그러나 지금 이준기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침착했다.
냉기가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그는 대답했다.
“빗나간 게 아니라 내가 피한 거다. 너는 모르는 세계겠지만, 민첩 스탯이 어느 수준을 넘어섰을 때 가능한 거지.”
“나··· 나도 알고 있다! 공격을 좀 피했다고 기고만장하구나! 난 아직 보여줄 게 많다!”
“너에게 몇 차례 공격권을 준 건, 절망감 속에서 죽어가라는 뜻이었다. 너 따위에게 내가 자선을 베풀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개소리!”
바이런은 뒤로 물러서며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냉정!”
“그걸 기다렸다.”
이준기의 논평에, 바이런은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너 따위 깡패가 그런 고급 스킬을 가지고 있다니, 안타깝군.”
“뭐든지 안다는 식으로 지껄이는군.”
“그래, 무슨 스킬을 즉시 시전하려는 거지?”
“뭣?”
순간 흠칫했지만, 평정을 가장하며 바이런은 벽을 끼고 뒤로 걸었다.
5미터가 넘게 거리가 벌어졌지만, 아직도 거리를 더 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거리가 필요한가? 내가 확보해주마.”
그렇게 말하고 이준기는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눈을 번뜩이며, 바이런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하이드로펌프!”
펑!
경쾌한 폭발음과 함께, 푸른 빛으로 휩싸인 바이런의 몸이 공중으로 살짝 들어 올려졌다가 내려왔다.
“얼음 회오리!”
바이런의 손끝에서 십여 개의 얼음 조각이 쏟아져 날아왔다.
얼음 파편들이 모두 손끝을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바이런은 짧게 오른쪽으로 도약했다.
또다시 팔을 들어 이준기를 향하며 바이런이 외쳤다.
“얼음 회오리!”
그리고 또 옆으로 폴짝 뛰어 자리를 옮기고 얼음 조각들을 연이어 발사했다.
“얼음 회오리!”
얼음 조각들이 부서져 사방으로 튀었다.
무수한 작은 얼음 파편들로 뒤덮인 방안은 마치 안개에 휩싸인 듯 뿌옇게 변했다.
바이런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그 연무를 뚫고 방안에 울려 퍼졌다.
“으하하하! 걸렸구나! 죽어라!”
승리감에 도취되어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웃어젖혔지만, 바이런은 곧 자세를 바로 하고 팔을 들어 올렸다.
겉멋에만 치중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바이런은 흩어지는 안개를 바라보며 스킬을 하나 더 시전했다.
“물 보호막!”
스킬 ‘냉정’의 즉발 효과는 사라졌지만, ‘하이드로펌프’의 마나 재생 효과는 아직 살아 있다.
물의 책을 무려 15권 소모해서 사용한 비장의 스킬, ‘하이드로펌프’의 효과를 끝까지 알뜰하게 다 쓰겠다는 의지였다.
물 보호막이 몸을 감싸자, 승리감에 더해 안도감이 바이런을 휘감았다.
여전히 숨이 찬 목소리, 하지만 훨씬 덜 날카로운 목소리로 바이런이 안개 속을 향해 외쳤다.
“잘만 떠들더니, 벌써 나가떨어진 거냐? 조용하군?”
얼음 파편의 안개가 걷히며, 이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개의 얼음 파편이 그의 주위를 맹렬히 휘돌고 있었다.
얼음의 장막을 건너와서 그런지, 이준기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더 차가웠다.
“보여줄 것은 전부 보여준 것 같군.”
눈동자에 좌절의 빛을 잔뜩 담은 채, 바이런이 뒤로 물러섰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는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너의 컨트롤은 나름 괜찮군. 간만에 집중 좀 했다.”
“너··· 너는 대체···”
“감각을 유지해야 하니, 훈련은 틈틈이 해야 하거든.”
“가··· 가까이 오지 마!”
“냉정에 이은 하이드로펌프, 그리고 얼음 회오리 연격이라··· 이 정도면 초필살기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만하군. 오만할 만해.”
“오... 오지 말라고!”
“지금까지 내가 싸운 상대들 중에서도, 이 정도면 최고급의 실력이다. 그걸··· 악행에 사용하다니.”
“아··· 안돼···”
이준기가 어느새 그의 바로 앞까지 왔다.
이준기의 주위를 도는 얼음 조각들은 마치 전기톱처럼 그의 물 보호막을 찢고 들어왔다.
조금 전 자신의 손끝에서 날아갔던 얼음 조각들.
물의 보호막을 찢고 들어온 그 작은 조각들이 바이런의 몸을 파고들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고통은 현실이었다.
온몸이 찢기는 고통에 바이런은 주저앉으며 소리 질렀다.
“끄아아아악!”
*****
바이런과 이준기의 대결이 펼쳐지는 동안, 세르게이와 박물관 직원은 복도에서 기다렸다.
먼 거리였지만, 그들은 뜯겨 나간 전시실 문을 통해 전투 광경을 조금씩 훔쳐보고 있었다.
문을 통해 메아리쳐 나오는 바이런의 날카로운 비명에, 그들은 조심조심 주위를 살피며 전시실로 돌아왔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바이런을 이준기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음 조각들에 반쯤 파묻힌 상태로, 바이런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이준기가 물었다.
“나폴레옹과 총사령관의 위치, 정말 모르나?”
“이··· 준기··· 이··· 이제야 기억이 나다니···”
“너 대신 내가 그들을 죽여주마. 총사령관의 위치, 말해.”
“후··· 후후··· 안다면 정말 말해주고 싶군. 나··· 나폴레옹, 그녀석도 나처럼 비··· 비참하게 죽게 해 주고 싶다···”
“정말 모르는군.”
“사··· 사무실에 가면··· 화상회의 자료가 남아있다. 그··· 그걸 잘 분석해 보면··· 알아낼 수··· 있을··· 지도···”
“사무실 위치는?”
바이런은 최고급 호텔 체인의 이름을 댔다.
모스크바 중심가가 아니라 조금 외곽에 위치한 호텔이기는 하지만, 예상 가능한 범위다.
적 수뇌부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면 주요 호텔들 숙박객 명부 정도는 뒤져야 했다.
그걸 아직까지 못 하고 있었다니, 모스크바 마피아는 정말로 남은 힘이 없는 모양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모스크바 마피아는 거기도 찾아보지 않은 거야?”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모스크바 마피아는 대장이 박살 냈잖아. 하루하루 공격을 막기에도 힘에 부쳤을 거야.”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목소리로 바이런이 중얼거렸다.
“이준··· 기! 그들을 찾아내··· 죽여다오··· 나 혼자 주···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
*****
바이런의 시체를 뒤로하고, 이준기는 바실리사에게 연락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바실리사의 이해를 구한 다음, 그들은 그녀와 합류했다.
바이런이 아지트로 쓰던 호텔 앞에서 그들은 만났다.
간만에 보는 동료의 얼굴에, 그들은 모두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서운하지 않아요. 준기 씨가 저를 배려해준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바실리사의 얼굴에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투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투지를 살려, 바실리사는 바이런의 방을 수색하는 일에 앞장섰다.
컨퍼런스 콜 장치에서 찾아낸 녹화 영상의 복사본을 만들고, 원본은 경찰서에 보내기로 했다.
“카플론스카야 경찰청장. 침략군에 대한 적의에 불타고 있으니,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제가 직접 가져갈게요.”
바실리사가 자청하자, 이준기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플론스카야 경찰청장··· 마피아와 연계된 인물이잖아요?”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애정만큼은 진짜죠. 경찰과 함께, 제가 직접 가겠어요. 바이런, 아니 장-바티스트 콩트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아가타 하바로프스키도 가증스러운 범죄자잖아요. 제 손으로 잡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공개 수사로 해달라고 하세요. SSF와 함께 가는 건 어떨까요? 아린이에게 부탁해 볼게요.”
“그런 조직, 믿지는 않지만··· 좋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저는 그들이 아니라 준기 씨를 믿으니까.”
“그럼, 부탁할게요. 서부 전선 일은 바실리사가 마무리해 주세요. 저는 동부 전선에 아직 일이 남아서요.”
“한일 연합군 말이군요. 제가 부탁할게요. 침략군을 물리쳐 주세요.”
*****
병실 문이 열리고, 설국헌과 함께 문아린이 들어오자 한상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아린 구원자님? 어떻게 여기에?”
“SSF 러시아지부에 와 있어요. 극동 마피아가 괴멸되어,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방치되고 있는 차원문들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죠.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왔어요.”
“이··· 이준기! 살아 있더라고요. 혹시, 벌써 만나셨나요?”
“네.”
“아··· 역시! 하긴, 그렇죠. 호··· 혹시?”
“네?”
“이준기와 연락하고 계셨던 거예요? 실종된 이준기가 러시아에 와 있는 것, 알고 계셨어요?”
문아린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뇨. 준기 오빠를 만난 건 2주일 정도 전이에요. 그전에는 저한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요. 괘씸해서··· 만나자마자 명치에 한 대 세게 먹여줬어요.”
“하··· 하하. 그··· 그랬군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설국헌이 한상태에게 물었다.
“한 회장··· 잘 잤어요?”
“설 교수님··· 오랜만에 정말 잘 잤습니다. 열두 시간도 넘게 잤네요.”
“다행이군요. 그럼, 귀국할까요? 비행기 표는 공항에 도착해서 사도 되니까.”
“저는··· 저는 아직 준비가···”
“하루 이틀 더 쉬어도 괜찮아요. 누가 한 회장에게 뭐라고 하겠소? 주변 일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쉽시다, 그럼.”
머뭇거리면서 한상태가 대답했다.
“설 교수님 덕분인지, 잠은 정말 잘 잤습니다. 악몽도 꾸지 않았어요. 전··· 악몽에 시달릴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잠드는 것이 두려웠는데, 어느새 곯아떨어졌죠. 어제는··· 힘든 하루였으니까.”
“그래요. 그랬겠죠.”
“서··· 설 교수님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어요. 이준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정도로 한심한 실력의 구원자인 것도 모자라서, 일본 협회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매국노 협회장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으니까요!”
“매국노···는 아니죠, 한 회장.”
“이준기가 말했죠. 제가 이상덕과 뭐가 다르냐고.”
“한 회장,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소?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 사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잘못을 바로잡을 수도 있는 존재죠. 삶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한 기억에 괴로워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거요. 괴로운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는 잘못을 고치는 편이 낫지 않겠소?”
“그래서··· 설 교수님은 저를 믿어주시겠다는 겁니까?”
설국헌은 한상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언제나 한 회장 편이었소.구원자로 각성하고 길드 ‘퇴마문’의 입회 면접을 보던 그때부터 말이오.”
“가··· 감사합니다!”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먹이는 한상태의 등을 두드리며, 설국헌은 말을 이었다.
“이제 주말이니까,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요? 아무리 바쁜 한 회장이라도 주말엔 쉬어야지. 그런 다음에, 월요일쯤에 한국으로 돌아갑시다.”
“하··· 하지만! 그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이오?”
“구··· 구라모토 회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하시바가, 사이토가 죽었다고 해서 일본 협회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구라모토 회장이 일본 구원자 계를 장악하고 있는 한, 저··· 저는 벗어날 수 없어요.”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한 회장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그는 뱀 같은 자입니다. 하시바 세이이치로를 보고 모두 섬뜩한 인간이라고 했죠. 하지만 구라모토는··· 그 하시바보다도 더한 놈이에요! 겉보기에는 어리숙한 샌님처럼 보이지만··· 그놈의 진가는 그놈과 진지한 이야기를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그런 계약을 해봐야 놈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자의 진짜 모습을 본 건 아마 이상덕과 저뿐일 겁니다!”
한상태는 구라모토가 지금 이곳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듯 설국헌이 뒤를 돌아보자, 문아린이 말했다.
“구라모토는 준기 오빠가 처리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