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21화 (22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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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2: 캘리포니아 (3)

Episode 52: 캘리포니아 (3)

이준기는 여전히 발을 떼지 못하는 여자에게 말했다.

물론 영어로.

“어서 집으로 들어가세요. 이 사람 말대로 요즘 밤길은 위험하죠. 아무리 치안 좋다는 라호야라 하더라도.”

치안 좋은 라호야.

이준기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조슈아 테일러가 늘 하던 말이다.

멕시코 갱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라호야는 밤에 걸어 다녀도 안전한, 치안 상태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고··· 고맙습니다!”

인사말과 함께 여자는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자세를 낮추며 손목을 빼내려는 디에고를 이준기는 빤히 쳐다보았다.

“뭐 해?”

“아아···”

“이름, 소속, 레벨.”

“으응?”

디에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길로 이준기를 올려다보았다.

이준기는 이미 ‘이르헬의 눈’을 발동 중이다.

37레벨. 어둠, 불, 마나 특화 트리.

“이름, 소속, 레벨.”

“뭐?”

“영어 몰라?”

“이··· 이름은 디에고다. 디에고 라몬.”

“소속은?”

“소속이라니?”

“말 그대로다.”

이준기는 손아귀에 살짝 힘을 더했다.

디에고가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그렇게 소리를 내고 싶다면 입에서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해줄까?”

“아··· 아니다!”

디에고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엄살이었는지, 신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디에고 라몬. 소속은 어디냐?”

“소속이라니 무슨 얘기인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야? 네가 생각하기에 너는 어디에 속하냐는 말이다.”

“메··· 아니··· 캘리포니아.”

“거짓말 말고.”

“미··· 미안해! 메··· 멕시코시티.”

“예상대로군. 도대체 여기는 왜 온 거야?”

“도··· 돈 벌러. 아, 아니··· 위에서 시켜서. 두목이 시켰어.”

“두목? 그 두목의 조직 이름이 네 소속이겠군.”

“그··· 그건···”

두목의 화난 표정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디에고의 눈빛에 공포감이 어렸다.

그러나 이준기가 한쪽 눈썹을 올리자, 그건 곧바로 다른 감정과 대치되었다.

눈앞에 위협이 존재하는데, 머나먼 멕시코시티에서 두목이 화를 내는 것은 나중 일일 뿐이다.

“기··· 길드 이름은 킬러포니아(Killafornia)··· 그러니까 K.I.L.L···”

“스펠링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 유치한 작명이군.”

“이름에서 아··· 알겠지만 우리 길드는 캐··· 캘리포니아에 있다. 정확히는 바하 칼리포르니아(Baja California)지만···”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을 텐데?”

“무··· 무슨?”

이준기의 물음에, 디에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순순히 불 수밖에 없다.

“길드는 킬러포니아··· 하지만 난 비밀조직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ina)에도 소속되어 있다. 길드 멤버 반 정도가 가입되어 있는 비밀조직이지. 다른 길드 멤버도 좀 있고···”

“알타 캘리포니아?”

미국 내전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조직이다.

당연히 알고 있지만, 이준기는 팩트 체크 차원에서 물었다.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디에고는 이준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줄 수 있어 기쁘다는 표정으로 열띠게 말했다.

“아··· 알타 캘리포니아! 멕시코 땅에는바하 칼리포르니아라는 주(州)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바로 남쪽이지. 예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도 우리 땅이었어. 미국에 빼앗기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 그렇다면 이해하기 쉽지! 바하 칼리포르니아는 ‘아래쪽의’ 캘리포니아라는 뜻이야. 알타(Alta)는 위쪽을 뜻하지. 그러니까, 알타 캘리포니아는 위쪽의 캘리포니아. 즉, 우리가 빼앗긴 그 캘리포니아. 지금 미국 땅이 되어 있는 그 캘리포니아다.”

“빼앗긴 옛땅을 되찾겠다는 거군?”

“그··· 그래. 그게 우리 조직, 알타 캘리포니아의 미션이다.”

폴란드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멕시코 역시 ‘원래 내 것이었던’ 땅을 되찾겠다고 벼르고 있다.

구원자 각성과 민족주의가 결합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이준기는 왠지 입맛이 씁쓸했다.

이준기는 드라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과 소속을 말했으니, 이제 레벨을 말해보실까?”

“37레벨이다. 아마··· 당신보다 한참 아래겠지.”

최근 며칠간의 연이은 전투로 인해 이준기는 51레벨이 되었다.

유럽연합군의 장-바티스트 콩트와, 한상태, 그리고 일본 구원자협회장 구라모토 신스케.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또는 갱생의 기회를 주어 정치판을 안정시키기 위해, 각기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 살려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경험치를 요구하는 50레벨 대에서 1레벨 승급을 한 것이다.

팔을 잡히는 순간, 디에고는 아마 피 냄새도 맡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순식간에 초식동물처럼 조용해진 것이 틀림없다.

“오늘 밤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약한 사람들 괴롭히는 게 너의 오늘 미션이냐?”

“아··· 아니야. 사실 그냥 총소리만 조금 내고 철수하는 계획이었어.”

“그런데? 하루라도 악행을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나?”

“그··· 그게··· 잘못했어.”

디에고는 고개를 숙이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

디에고는 또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괜찮다고 했잖아. 음료수를 엎은 것도 아닌데.”

“아··· 아니, 그래도··· 대장이 안 잡아줬으면 큰일 날 뻔했으니까··· 내가 서툴러서 컵을 엎을 뻔했고, 그래서 대장이 쓸데없이 수고를 해야 했잖아···”

세르게이와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있는데, 샌디에이고에서 대장 소리를 들으니 어색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건 이제 잊어.”

“응, 알겠어, 대장. 고마워.”

“더 중요한 얘기를 해야지. 그래서, 오늘 작전도 어제와 같다고?”

“응. 10시 반에서 11시 반 사이에 적당히, 5분간 요란하게 총을 쏘고 사라지는 거야.”

“그걸 언제까지 한다고?”

“서부 전선 녀석들이 나타날 때까지.”

“서부 전선 사람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땐 그걸 본부에 알려야지.”

“그래서··· 서부 전선 멤버들과 싸우는 건 본부 사람들이다?”

“으응. 우리는 선발대··· 아니, 정찰대랄까. 적을 도발하는 게 우리 임무야.”

“모두 다섯 명이라고 했지, 너희 정찰대?”

“응.”

“그럼 오늘 몇 시에 어디에서 그 총질을 하는지, 정해져 있는 거야? 아니면 그냥 10시 반에서 11시 반 사이에 아무 때나 하면 되는 거라서 정하지 않은 거야?”

“후자가 맞아. 아무 때나 하려고 했어. 정해진 시간은 없어. 두목이··· 랜덤하게 하라고 해서.”

“네가 빠지게 된 것은 예정된 일이 아니었으니, 뭔가 바뀐다고 봐야겠군?”

“아···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벌써 본부에 연락했을 수도 있고.”

“널 구하러 오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 아마도···”

“그으래?”

이준기는 조금 놀리는 투로 물었다.

멕시코라면 러시아, 태국과 더불어 구원자는 깡패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대표적인 나라들 중 하나다.

악당들의 우정이라니 비웃어주고 싶었다.

“나··· 나는 별거 아니지만··· 두··· 두목은 달라.”

“너보다 레벨이 훠얼씬 높기라도 한가 보구나?”

“그··· 그래. 그게 사실이야. 나보다 10레벨은 높단 말야.”

“무서워서 몸이 떨리는데. 사시나무처럼. 사시나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디에고는 묻지도 않은 정보를 또 불기 시작했다.

“두··· 두목 이름은 아론 페르난데스(Aaron Fernandez). 어···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이야. 구원자 각성 전에는 이종격투기 선수였다고 들었어.”

“이종격투기 선수였다고? 처음 듣는 이름인데?”

“페럴 퓨리(Feral Fury)라는 이름이었어.”

“페럴 퓨리? 여전히 처음 듣는 이름인데?”

“유··· 유망주였다고···”

이종 격투기 따위 관심도 없고, 페럴 퓨리라는 이름은 당연히 모른다.

그러나 아론 페르난데스는 잘 알고 있다.

처음에는 동부 연합의 요청에 따라 용병을 보냈고, 나중에는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미국 내전에 개입한 멕시코 갱의 대부.

미국 내전에 관여한 남미 구원자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축에 속하는 인물.

두 달만 지나면 미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된다.

‘조슈아 테일러에게 한 방에 작살난’이라는 수식어를 이름 앞에 붙이게 되기는 하지만.

“아론 페르난데스가 너희 조직에서 가장 강한 자냐?”

이준기의 질문에 디에고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보··· 보통은 두··· 두목이 제일 세잖아? 그런데 우리 조직에는 더 센 녀석이 하나 있어.”

“듣고 있다.”

“헤··· 헤수스 이아고닉(Jesus Iagonic). 보통 추이(Chuy)라고 불러.”

“헤수스 이아고닉?”

“태··· 탱커야. 전설 등급 방패를 가지고 있지.”

“전설 등급?”

“틀랄록의 원반(Tlaloc’s Disk)이라고. 무시무시한 아이템이야.”

“뭐가 그렇게 무시무시한데?”

“피! 피를 빨아···!”

*****

서둘러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지만, 이준기는 3월 5일 밤에 조슈아를 만나지 못했다.

‘하긴, 모든 사건이 예전 그대로 다시 재생되는 건 아니잖아. 일단 나부터가.’

실망하기는 했지만, 기회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디에고와 그의 정찰대는 서부 전선 구원자들의 주의를 끌 때까지 샌디에이고, 아니 정확하게는 라호야에서 깽판을 부리기로 되어 있었다.

더 기다리면 그만이다.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정찰대의 최고 레벨 멤버, 디에고가 이준기에게 잡혀 있다.

디에고를 현장에서 잡았을 때, 정찰대 멤버들이 왜 덤비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아마, 한순간에 제압당한 디에고를 보고 이준기에게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오늘 밤 정찰대는 어제 그 정찰대가 아닐 것이다.

멤버 보강을 해서 오거나, 아니면 그냥 튀었겠지.

마침 샌디에이고는 멕시코 접경 도시다.

티화나에서 라호야까지는 차로 한 시간 거리도 되지 않는다.

구원자들의 등장 이후 훨씬 엄격해진 국경 검문이 있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론 페르난데스의 사조직, ‘알타 캘리포니아’가 캘리포니아를 노리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왜 이제야 캘리포니아에서 활동을 시작했느냐는 것이다.’

동부 연합이 내전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밀렸기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나중에 드러나는 일이지만, 아론 페르난데스의 목표는 서부 전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멕시코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이다.

그 일에 방해가 되는 미국의 길드 연합, 서부 전선을 타도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동부 연합과 같은 콩가루 조직과도 연합할 생각을 한 것이다.

예전, 세계 대전 개입 초기에 동료들이 잡담을 하던 것이 생각났다.

미국 내전은 중국 내전, 우크라이나 내전과 함께 세계 대전으로 들어가는 3대 내전 중 하나로 꼽혔다.

당연히 화제에 자주 올랐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동부 연합이 애초부터 서부 전선에 상대가 되냐고. 서부 전선은 정예 조직이고, 동부 연합은 그야말로 막장이잖아.”

“그렇지. 서부 전선은 수장 로스 캐넌부터가 신뢰를 받는 인물이지만, 동부 연합은···”

“동부 연합 수장 스탠 파운즈(Stan Pounds). 애틀랜틱 시티(Atlantic City) 카지노 운영자 출신. 그런데 이런 인물이 동부 연합 떨거지들 중에서는 오히려 괜찮은 축에 속하니까.”

“그래. 대변인 격인 드레 럭러스터는 강간범, 동맹군 수장이라고 볼 수 있는 존 백스터는 비리 교육자 출신이니까.”

“존 백스터는 정확히 말하면 동부 연합이라고도 할 수 없지. 따로 신연방(New Confederate)이라는 사조직을 운영하던 남부 독립주의자니까. 그냥 당시 상황이 동부 연합에 붙어야 하는 상황이었을 뿐이지.”

“그렇긴 한데, 존 백스터가 서부 전선으로 붙으면 그건 더 이상하잖아?”

“서부 전선에서 받아주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서부 전선 멤버들은 동부 연합에 비하면 프로필이 훨씬 멀쩡하니까 말야.”

“그래, 수장인 로스 캐넌은 사업가 출신. 2인자라는 린 슐레겔(Lynn Schlegel)도 간호사 출신이니까.”

“거기에 조슈아 테일러를 포함시켜야지.”

“아아, 조슈아. 뭐, 전직 아이돌이라고 봐야 하나?”

“아니지. 현직 아이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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