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53: 멕시코 (3)
Episode 53: 멕시코 (3)
“뭐냐, 훌리오? 그놈은 뭐야?”
“보··· 보스!”
갑자기 들이닥친 부하들을 보고 훌리오의 보스가 소리를 질렀다.
러닝 차림으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토마토소스가 묻어 있었다.
지저분한 테이블에는 피자 박스와 나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를 한번 슬쩍 쳐다보고 이준기가 말했다.
“너희 보스, 구원자가 아니군?”
“그··· 그렇다.”
침입자의 건방진 질문에 맥없이 대답하는 부하를 보고, 보스가 소리 질렀다.
“뭐야, 훌리오! 그 자식은 뭔데 너한테 명령조로 말하는 거야?”
“보··· 보스··· 죄송하게 됐습니다.”
훌리오의 등을 밀치면서, 이준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보다 더 센 깡패가 쳐들어온 게, 설마 이번이 처음은 아닐 텐데?”
“뭐, 뭐라고? 훌리오, 말해봐라. 저놈이··· 구원자란 얘기냐?”
훌리오가 다시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보스.”
“추··· 추이 이아고닉··· 그 녀석 같은?”
“네··· 보스··· 어쩌면 추이보다 더 셀지도···”
“뭐라고? 그게 말이 돼?”
구원자라면 희소한 전략 자원.
웬만해서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목숨을 걸고 차원문을 정리하는 직업이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라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인생을 즐겨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 큰 이권과 영광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준기가 훌리오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이봐, 훌리오. 내가 또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제가 보스에게 잘 설명하겠습니다.”
자기 부하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부아가 치민 보스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훌리오 델가도, 정신 차리지 못해! 뭘 설명하겠다는 거냐!”
“보··· 보스··· 이 사람이 조금 전에···”
훌리오가 말을 더듬는 것이 너무 답답했는지, 식당에 같이 갔던 다른 부하가 문장을 완성했다.
“초··· 총알을 멈췄습니다!”
보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총을 못 쏘게 막았다고?”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날아가는 총알을··· 아니··· 수많은 총알들을···”
“뭐? 똑바로 말해!”
“여··· 영화처럼··· 기관총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총알을··· 공중에서 멈추게 했습니다!”
“거··· 거짓말 마라.”
보스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실내가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분명 다른 이유로 흐르는 땀이었다.
“그··· 그래서?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냐?”
“너희 나와바리가 티화나 전체 아니냐? 사무실이 너무 좁고 지저분하네. 저기 테이블 좀 치워봐라. 따끈따끈한 부리또가 식기 전에 먹어야 해. 식당 주인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건데.”
보스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훌리오와 부하들은 보스가 피자를 먹던 테이블과 연결된 옆 테이블을 분주히 치우기 시작했다.
“너희들 보스도 구원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까지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거지? 일단 뭘 좀 먹으면서, 너희들 사정도 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
스페인어가 부족한 이준기를 위해 훌리오는 영어를 잘하는 부하를 데려왔다.
“티화나는 바하 칼리포르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입니다. 인구는 주변 지역까지 해서 2백만 명 정도 되고요. 아시다시피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접경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죠.”
“내가 멕시코에 대해서 일자무식인 건 사실이지만, 시시콜콜 모든 걸 배울 시간은 없어. 요점만 말해라.”
“요··· 요점이라 하시면?”
“추이 이아고닉. 그 녀석은 너희 조직한테도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무슨 관계지?”
“그··· 그게···”
부하는 보스를 흘끗 훔쳐보았다.
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하는 말을 계속했다.
“추이 이아고닉은 우리 조직의 과··· 관리자라고 할까··· 우리의 보고 라인에 위치한 상사 같은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그러니까 보스의 보스 같은 존재다 이거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스의 보스의 보스의 보스입니다.”
“이건 뭐 거의 봉건 영주 수준이군. 차근차근 알아보자. 너희 보스의 직속 상관은 누군냐?”
“개리 헌팅턴(Gary Huntington)입니다.”
“이름이 왜 그래? 멕시코인이 아닌 거냐?”
“멕시코 국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출신입니다.”
“소꼬리보다 닭머리가 되겠다. 뭐 그런 건가?”
“잘은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조직들을 정리하고 티화나를 통일한 자입니다. 길드는 킬러포니아고요.”
“킬러포니아라면, 추이 이아고닉의 길드?”
“네. 킬러포니아 길드의 바하 칼리포르니아 지부장이라고 할 수 있죠. 이곳이 규모는 작지만 미국과 접경 지역이기도 하고···”
“킬러포니아 길드의 모토를 생각하면, 이곳은 상징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곳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개리는 추이가 데려온 용병이라는 말도 있어요.”
“추이와 개리 사이에 있는 건 누구야? 말하자면 네 보스의 보스의 보스 말이야.”
갱스터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멕시코 중북부에 위치한 치와와주의 도시,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arez).
이곳 티화나와 마찬가지로 미국 국경에 딱 붙어 있는 도시다.
“이름은 파블로 로드리게스(Pablo Rodriguez). 시우다드 후아레스를 장악한 조직의 보스입니다.”
“길드는?”
“길드는 킬러포니아입니다.”
“킬러포니아가 그렇게 큰 길드야?”
“규모로만 따지면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에 이어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큰 길드입니다만··· 상위랭커들은 킬러포니아가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테··· 테스카 뭐라고?”
“테스카틀리포카. 멕시코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입니다.”
“대단히 호전적인 작명이군.”
그렇게 말은 했지만, 멕시코 땅까지 와서 전쟁의 기운을 퍼뜨리려는 자신이야말로 전쟁의 신, 테스카틀리포카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요약하면, 너희 보스 위로는 상관이 3층으로 있는데, 직속 상관부터 말하자면 개리 헌팅턴, 파블로 로드리게스, 그리고 추이 이아고닉이라는 거지?”
“네.”
“그런데 추이 이아고닉은 킬러포니아 길드의 마스터가 아니잖아?”
“아··· 알고 계시는군요. 킬러포니아 길드의 수장은 아론 페르난데스(Aaron Fernandez)입니다.”
“그 위에 보스가 하나 더 있다는 거군. 너희 보스부터 해서 5층 석탑이네.”
“네···”
“내가 멕시코 구원자 계를 재편할 것도 아니고, 나는 용건만 전달하면 그만이다. 그러려면 아론 페르난데스, 아니면 적어도 추이 이아고닉을 만나야 할 것 같아. 어떻게 하면 그놈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나?”
“그··· 글쎄요. 우리 같은 조직에서 그게 가능할지···”
“너희 조직이 박살 나면, 위에서도 일단 들여다보기는 하겠지. 그렇게 해줄까?”
“아··· 아뇨!”
“비상 연락망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조직이 박살 날 상황이니까 연락해라.”
*****
“뭐냐? 비상 콜을 하다니!”
조직원이 전화를 하고 채 15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
문을 박차고 사무실에 들어온 30대 초반의 멕시코 남자가 외쳤다.
어느새 셔츠를 갖춰 입은 훌리오의 보스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에르난데스 님···”
문 쪽으로 등을 향하고 있던 이준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에르난데스? 개리 헌팅턴이 아니고? 넌 그 녀석의 졸개냐?”
들어온 남자가 이준기를 흘끗 쳐다보았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살펴보는 느낌으로 이준기의 허우대를 잠깐 훑어본 그는 이준기에게서 조직 보스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이 동양놈은 뭐지? 비상 콜을 한 게 설마 이놈 때문이냐?”
“그··· 그게···”
머뭇거리는 그를 대신해 이준기가 대답했다.
“티화나 갱 조직이 박살 나게 생겼으니 연락하라고, 내가 시켰다.”
“네가 시켰다고? 이 자식들이 미쳤나, 키만 멀뚱하게 큰 이따위 놈한테 쫄아서 감히 나한테 연락을 했다고?”
“비상 연락망 아냐? 비상 상황이다. 조직이 박살 나게 생겼으니.”
“조직이 박살 나? 너 때문에? 하하하!”
“말로 하면 얘기가 안 되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내가 말빨이 딸리나?”
이준기의 뒤편에 어깨를 웅크린 채 서 있는 훌리오에게, 에르난데스가 물었다.
“야, 훌리오!”
“네··· 네, 에르난데스 님!”
“이렇게 거들먹거리는 거 보니 이놈은 구원자인가 보군?”
“그··· 그렇습니다.”
“구원자고 나발이고 이런 자식은 그냥 총으로 쏴버려. 귀찮게 날 부르지 말고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그··· 그게 말입니다···”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했냐? 그럼 내가 쏴줄까?”
“그··· 그게 아니고··· 에르난데스 님!”
훌리오가 말리기도 전에 에르난데스는 아킴보 자세로 서서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연습이라도 한 건지, 서부극에서 나오는 악당들처럼 권총을 휘리릭 손안에서 돌리고 나서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엇?”
바로 앞에 선 동양인을 향해 날아간 총알이 공중에서 멈추자, 에르난데스는 놀라서 외쳤다.
“뭐, 뭐야?”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리고 에르난데스를 쏘아보며 이준기가 말했다.
“에르난데스··· 39레벨. 너 따위 녀석도 죽으면 멕시코 범죄조직에 꽤나 타격이 되겠지?”
공중에 멈춰 있던 총알이 천천히 움직여 에르난데스를 향해 다가갔다.
“뭐, 뭐야! 오지 마!”
허겁지겁 뒷걸음질 치던 에르난데스는 의자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총알은 매우 느린 속도로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달이 행성 주위를 돌 듯이.
에르난데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뭐야··· 사··· 살려줘!”
이준기가 대꾸했다.
“에르난데스. 이름이 뭐냐?”
“호··· 호르헤다. 호르헤 에르난데스.”
“보르헤스와 이름이 같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소설가인데.”
“보··· 보르헤스? 그게 뭐냐?”
“위대한 문학가다. 불세출의 천재라고나 할까. 감옥에 가면 천천히 읽어봐라. 너 같은 악당들에 관한 이야기도 꽤 있으니.”
“가··· 감옥에 가라고?”
“죽는 게 나으려나?”
“아··· 아냐! 살려줘! 감옥에 가겠다!”
“감옥에 가기 전에, 네 보스를 불러라. 개리 헌팅턴이라는 녀석.”
“보··· 보스를 부르라고?”
“추이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어. 그래도 첫걸음은 개리 헌팅턴부터 시작하나 했더니··· 그 부하가 오다니. 이렇게 한 계단씩 올라가려면 날이 새겠다. 멕시코 범죄조직은 조직도가 왜 이렇게 복잡해?”
“추··· 추이라면, 추이 이아고닉?”
“추이를 아나?”
“추··· 추이··· 이아고닉 님을 불러주면, 나를 놔줄 생각이 있나?”
“훗. 그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하지만 잊지 말라고, 그 총알··· 언제든지 네 머리를 뚫고 지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
여전히 자기 머리 주변을 돌고 있는 총알을, 호르헤 에르난데스는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 잘못했다! 용서해줘! 다··· 당장 누구라도 부르겠다! 개리든 이아고닉 님이든···”
“이아고닉을 불러주면, 내가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그, 그래! 이아고닉 님에게 당장 전화하겠다!”
“좋아. 전화해라. 지금 당장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너도 개리 헌팅턴도 다 죽고 티화나 조직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
문제는 추이에게 이준기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이준기는 서부 전선 소속인 양 행동했다.
조슈아 테일러를 끌어내려면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점을 납득시키려고 그랬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조슈아 테일러를 끌어내는 방법이라면 한 가지가 더 있다.
언제나 머릿속을 머물며 떠나지 않는 단 하나의 옵션.
간밤에 조우했던 미지의 자객이 선택을 쉽게 만들었다.
‘이미 한번 죽었던 목숨이다. 조슈아 테일러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일단 결심을 굳히자, 다음 단계를 실행하는 것은 쉬웠다.
너무나 분명한 목적지다.
목적지를 향해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악몽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의도도 과정도 결과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호르헤 에르난데스가 이준기에게 묻고 있었다.
“누···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내 이름은 이준기다.”
호르헤의 휴대폰에서 신호가 가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