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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3: 멕시코 (4)
Episode 53: 멕시코 (4)
“이··· 이아고닉 님, 저 호르헵니다. 호르헤 에르난데스.”
“그래, 에르난데스. 보고 계통 스킵하고 감히 나한테 전화질이라니··· 아주 시급한 일이 아니면 혼 좀 나야 할 거다.”
휴대폰 저편에서 추이 이아고닉이 성깔 있는 목소리로 외치는 게 들렸다.
만사 귀찮은데 왜 전화질이냐고, 마치 화면에 자막이 깔리는 느낌이다.
“죄··· 죄송합니다. 여··· 여기 티화나 사무실인데, 이아고닉 님과 통화하겠다는 분이 계셔서···”
“뭐? 어떤 놈이 감히 나하고 전화 통화를 하겠다는 거냐?”
“이준기··· 라는 사람입니다.”
“이준기? 그게 누군데?”
더욱 고압적이 된 추이의 호통에, 호르헤 에르난데스가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이준기가 적어준 문장을, 그는 종이에 쓰인 대로 읽었다.
“가··· 간밤에··· 샌디에이고 라호야에서 만났던··· 동양인···. 이라고 합니다.”
전화선 저편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추이의 목소리는 사무실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들렸다.
갑자기 기가 죽고 볼륨이 작아진 그의 목소리.
게다가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한다.
그 모든 것이, 휴대폰의 작은 스피커를 통해 방 안 사람들 모두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 그 사람이··· 지금 너희 사무실에 있다는 거냐?”
“네··· 이아고닉 님.”
“나··· 나와 통화를 원하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 그래?”
우물쭈물하는 추이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이준기는 호르헤에게서 전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스피커 폰을 켜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이준기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추이?”
“여··· 여보세요. 이준기···라고?”
“그래. 발음 좋구나. 내 목소리는 잊지 않았군?”
“무··· 물론이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빨리 다시 얘기를 할 거라고는 나도 생각 못 했다. 어쨌든 아는 사람과 통화하니 반갑군.”
“왜··· 멕시코에는 왜 온 거냐··· 난 약속대로 철수했고, 다시는··· 캘리포니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네가 캘리포니아에 오지 않는다는 약속이었지. 내가 멕시코에 못 온다는 조건은 없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라. 너를 어떻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그··· 그럼?”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둘의 통화를 듣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을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추이 이아고닉이 겁먹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상대라니.
“지금 어디에 있어?”
“왜··· 왜 묻는 거지?”
“묵비권이냐?”
“아··· 아냐! 미안해! 난 지금 메히칼리(Mexicali)에 있어.”
“그게 어딘데?”
“티화나에서 멀지 않다. 같은 바하 칼리포르니아의 도시다.”
“그래? 지금 이곳으로 올 수 있어?”
“지··· 지금?”
“그래, 지금.”
“왜···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한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제··· 제안이라고?”
“그래.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다니까, 만나자.”
“그··· 그래. 지금 출발하겠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나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데려오라고. 너희 보스 아론 페르난데스든 누구든 말야.”
“보··· 보스는 여기에 없어. 나··· 나 혼자 갈게. 운전사와 단둘이 가겠다.”
“지금이··· 오후 4시 5분이군. 몇 시까지 올 수 있지?”
“두··· 두 시간이면 간다. 그런데 차가 좀 막힐지도 모르겠네.”
“세 시간 주겠다. 7시까지 와라. 여기 사무실은 너무 좁고 답답하니까, 어디 식당에서라도 만나자.”
“그··· 그래. 조직이 운영하는 고급 술집이 있다.”
“좋아. 거기에서 기다리겠다. 차가 막힌다든가 하면 연락하라고. 7시까지 기다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연락도 없으면···”
“그···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
전화를 끊고 이준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지장처럼 탈색된 얼굴들.
공포에 의한 지배가 최선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텔레키네시스는 이런 목적으로 사용할 때 최선이다.
손으로 옮기는 게 훨씬 빠른 우유갑을 들어 올릴 때 쓰라는 게 아니다.
*****
갱들이 이준기를 안내한 곳은 고급스러운 바였다.
대형 화면이 몇 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이리라.
화면에는 촌스러운 뮤직비디오가 꼬리를 물고 재생되고 있었다.
이준기는 CNN으로 채널을 돌리라고 명령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CNN은 넘쳐나는 뉴스를 배치할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주요 뉴스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내보내는 패턴만은 여전했다.
몇 시간 틀어놓고 있으면, 아침에 스타벅스에서 보았던 바로 그 뉴스가 나올 것이다.
자기소개를 직접 할 필요가 없어진다.
게다가 추이 이아고닉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뉴스를 정리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선전에서 저항군 세력이 결사 항전 태세에 들어감에 따라, 중국 내전도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 뉴스, 홍콩에서 제임스 워런 기자가 직접 전합니다.”
화면에 홍콩의 아침 거리를 배경으로 선 기자가 등장했다.
바닥에는 깨진 벽돌이며 부러진 죽창 따위가 나뒹굴었다.
기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홍콩입니다. 간밤에도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저항군의 본거지, 홍콩은 이제 완전히 진압된 것으로 중국 정부는 홍보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렇습니다. 여전히 밤마다 기습 시위가 있고, 기습 시위는 거의 전부 경찰서나 공공기관을 향한 습격으로 이어집니다. 아침마다 이렇게 거리에 쓰레기가 쌓이는 것이 어제만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임스 워런 기자, 지금 방송하시는 그 장소, 안전합니까?”
“안전하지 않습니다. 시위가 문제가 아니고 중국 정부의 단속이 심하니까요. 전쟁이라도 지나간 것 같은 비참한 거리의 모습, 오늘 CNN이 세계 최초로 단독 보도하는 것입니다. 카메라맨 피터 로렌조와 저, 둘뿐입니다. 기습 방송을 하고 저희도 공안을 피해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선전으로 본진을 옮긴 저항군이 결사 항전을 공언한 것이 3월 1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전에, 일제에 저항했던 한국의 독립운동, 3.1절을 기념해서 3월 1일에 성명을 발표한다고 했죠. 그 이후로 전쟁 양상은 더욱 처절해졌습니다. 저항군 쪽은 지금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을 각오로 버티겠다고, 그런 의지를 재차 천명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까?”
“중국 정부는 요지부동입니다. 중국 정부는 현재의 폭동 상황이 일부 불순분자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투항하는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겠지만,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들은 엄벌에 처하겠다고, 여전히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투항자에게 베풀겠다는 관용. 그것도 시한이 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3월 10일이 데드라인입니다. 3월 11일 0시를 기해 중국 정부는 선전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돌입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선전 내부에서 저항군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홍콩에 대한 기습 공격이 계속되는 것도, 홍콩을 탈환하고 선전에서 나오려는 저항군 지도부의 결정 때문이라는 소문입니다.”
“저항군에는 구원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죠?”
“네. 저항군의 아이콘, 스티브 챈(Steve Chan)을 비롯해서 많은 수의 구원자들이 저항군의 지도부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일부 불순분자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구원자들입니다.”
“그런데 진압군에는 구원자가 별로 없다고요?”
“네. 중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진압군에는 구원자가 거의 없습니다. 작전 지휘부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전부라고 합니다. 중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신빙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소식통에 따르면 현장에서는 중국 정부의 이 말만은 믿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정말로 진압군에 구원자가 없다는 얘기입니까? 워런 기자 생각은 어떻습니까?”
“중국 정부는 진압군에 기갑부대를 대대적으로 편성했습니다. 귀중한 군사 자원인 구원자를 아끼려고 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구원자를 활용하지 않고 구원자를 제압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린핑 루라든가, 유명한 중국인 구원자가 현장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제임스 워런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홍콩 현지에서, 제임스 워런이었습니다.”
이준기는 린핑 루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2022년 5월이나 되어서 벌어질, 미래의 대화.
중국 내전의 속사정은 CNN의 잠입 취재가 알아낸 것과도 달랐다.
“저항군 지도자 3인방은 전부 다 공안의 첩자였어. 세계 각지에서 소수민족 독립운동이 벌어지니까, 사전에 싹을 자르려고 첩자들을 투입해서 분리주의 운동에 불을 지핀 거지. 분리주의자들을 한꺼번에 일소해 버리려고 계획한 거야.”
“그래서, 스티브 챈이 정말로 분리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정부도 몰랐던 거라고?”
“그건 스티브 본인에게 물어봐야겠지. 원래부터 분리주의자였던 것인지, 아니면 첩자로 들어가서 활동하는 도중에 분리주의에 물들어 버린 것인지.”
“어느 쪽이든 드라마틱하기는 마찬가지군.”
“스티브 챈의 삶이 드라마틱한 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잖아. 조슈아 테일러의 심복이 되었으니까.”
“정말, 사람의 마음속이라는 게 이렇게 알기 힘든 거라니까.”
“나도 물어보고 싶어. 또 생각이 바뀐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구원자 우월주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제삼의 가능성도 있잖아? 스티브 챈이 분리주의자인 동시에 구원자 우월주의자인 가능성.”
“억압하는 정부는 거부하지만, 자신이 억압하는 쪽이라면 괜찮다는 거야?”
“아니. 소수 민족의 자결권은 인정한다. 그러나 구원자로 구성된 세계 정부는 필요하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한 것일 수도 있잖아.”
“복잡하군, 그런 건.”
*****
더 완벽할 수 없는 타이밍에 이준기의 뉴스가 CNN을 통해 흘러나왔다.
실종되었다는 이준기가 살아 돌아왔고, 현재 추정 레벨은 미국 최고 레벨 구원자, 조슈아 테일러와 동급이라는 것.
사상 최고의 레벨업 속도 기록 보유자라는 이야기는 덤이다.
뉴스가 지속되는 3분여의 시간 동안, 이따금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은 사람들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주변의 눈치를, 그리고 이준기의 눈치를 살폈다.
CNN 뉴스에서 대단한 구원자라고 소개하는 그 사람은 현재 그들의 적이다.
단신으로, 단 두 개의 스킬만을 보여주며 티화나의 갱 조직 전체를 무릎 꿇게 만든 가공할 적.
뉴스는 끝을 맺고 있었다.
“어쩌면 미국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이준기는 아직 미국 팬덤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니까요.”
“이준기가 지금 미국에서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하하. 앤디 스위프트 씨,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농담을 섞은 앵커의 클로징 멘트.
TV를 보면서 추이 이아고닉의 도착을 기다리는 멕시코 갱들에게는 아이러니하기 이를 데 없는 한마디였다.
이준기는 정말로 미국에 있었고, 단 한 차례의 만남을 통해 멕시코의 최상위 랭커, 추이 이아고닉에게 공포를 심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 멕시코 땅까지 쫓아온 악귀.
한국 최고 랭커였다니.
남의 속도 모르고 허허 웃는 앵커의 클로징 멘트가 긴 여운을 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추이 이아고닉이 술집 문을 열어젖히고 등장했다.
“도··· 도착했다!”
추이는 숨을 몰아쉬며 선언했다.
운전사는 주차 중인 건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추이 혼자였다.
어디에서 내려서 뛰어왔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이준기가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추이.”
“이준기! 한국··· 최고 랭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