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건 선 넘었지
“우리 헤어지자.”
화창한 봄날.
진한 원두 향이 향긋하게 맴도는 카페 안에서, 나는 6년을 함께한 여자친구로부터 헤어짐을 통보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통보에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지만, 그녀의 말은 바뀌지 않았다.
그저 나를 조금 더 무심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우리 헤어지자고. 여기 나온 거, 헤어지자는 말 하려고 나온 거야.”
“왜인지 설명 들을 수 있을까?”
“더는 할 말 없어. 간다.”
일방적으로 말을 끝낸 여자친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가 앉았던 맞은편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하···.”
6년을 사귀었는데.
헤어짐은 이토록 간단했다.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었다.
‘오빠 우리 언제 만나?’
‘오늘도 야근이야?’
‘...출장?’
생각해보면, 여자친구는 계속해서 나에게 신호를 보내왔었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여자친구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니까.
“하.”
오늘도 여러 일들을 마무리하고 3주 만에 여자친구와 만난 참이었다.
아무리 이 모든 일의 이유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내 잘못이 컸다.
거기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관리를 소홀했던 내 몸은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근육보다 지방이 더 많아 보이는 몸.
구부정한 자세.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온갖 스트레스로 거칠어진 피부까지.
“지친다.”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되는 이별이었지만, 어쩐지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아 얼굴을 감싸 쥘 때였다.
-지이잉
[정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스크린에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어.”
[너 지금 뭐 하냐?]
방금 차여 우울한 나와는 달리 무언가 좋은 일이 있는 듯한 들뜬 음성.
“...우울하니까 말 시키지 마라.”
친구 놈의 기쁜 목소리와 달리, 방금 헤어져서 그런지 내 목소리는 해저를 뚫을 수도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아직도 일 안 끝났냐? 그 회사는 너만 일하는 것 같다? 노동청에 고소할 거면 알지? 제가 또 노동자의 편에서 회사를 잘 족치는 변호사로 또 유명···.]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
변호사 아니랄까 봐, 그 틈에 영업해대는 친구 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이놈 수다를 들을 정도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민준의 말에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새끼, 까칠하기는. 너 드디어 상속문제 정리됐다.]
“아···. 그래?”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된 공동상속인의 존재.
한때는 홀로 남은 나에게 또 다른 가족이 생길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었지만, 장례식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아 바로 그 기대를 접었었다.
하지만 공동상속인으로 명의가 올라가 있는 만큼 정리가 필요했기에, 유일하게 아는 변호사인 민준에게 일을 맡겼다.
[아 그래? 야 반응이 뭐 그리 미적지근하냐. 친척 찾느라 쎄빠지는 줄 알았어. 더 찬양해봐.]
“어. 그래. 고생했다. 조만간 술 한번 하자. 비용은 문자로 알려줘. 바로 입금할게.”
[이야 이 반응은 뭐지? 내가 이거 해결해 줬다고 너한테 비용청구 하겠냐. 술은 오케이. 근데, 비싼 거 사야 될 거다.]
“...왜?”
[내가 누구냐. 그 친척분 찾아서, 상속 다 포기 받아냈지. 자, 이제 날 찬양하거라!]
“뭐? 상속 포기하셨다고? 그럼···.”
[그래. 너 이제 땅 부자야 인마! 축하한다 이 자식아! 한턱 제대로 얻어먹을 테니까!]
“내가, 땅 부자라고?”
**
[..할머니가 남기신 땅이 꽤 되더라고. 너희 집에 뒷산 있던데 그것도 할머니 앞으로 되어있고]
‘상속세는···?’
[얼마 안 돼서 없어.]
‘없어?’
[땅이라고 해봤자, 시골에 있는 거라 그렇게 안 비싸더라고.]
인생사 새옹지마 라더니.
여자친구가 떠난 그 날.
나는 땅과 부지를 상속받게 되었다.
“과장님, 오셨어요? 개발팀 조 팀장님이 연락 좀 달래요.”
[...너 모르게 증여도 많이 하셨더라고. 아는 세무사랑 해서 다 처리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새끼, 축하한다.]
그것도 세금 걱정도, 친척 걱정도 없는
깨끗한 땅.
“과장님!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과장님, 공장장님이 연락 왔는데요? 전화 돌려드리겠습니다!”
상속을 받았다고 해서 내 일상에 변화가 생긴 건 없었다.
주말을 보내고 다시 출근한 회사에서는 내 출근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나를 찾아댔다.
과장님! 과장님······.
띵동, 띵동.
줄기차게 불러대는 과장이라는 직급이 마치 고깃집 불판을 갈아달라는 손님들의 벨 소리 같았지만, 여느 때처럼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땅이 있어서 그런가?
모니터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실핏줄이 터져 벌건 눈동자와 버석 마른 입술.
하지만 묘하게 생기가 돌아 보였다.
‘우리 똥강아지, 언제든지 힘들면 와라. 이 할미가 우리 똥강아지 정도는 맥여 살릴 수 있다. 안카나.’
일에 치여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가 항상 입버릇처럼 내게 하시던 말씀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손주, 뭐가 그리 이쁘다고···.”
돈을 잔뜩 벌어 호강시켜드리겠다고 한 주제에, 호강은커녕 할머니가 그렇게 원하시던 손주며느리도 못 보여드렸다.
“...”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더욱 일에 매달린 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항상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 안일함을 원망하며.
상속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다른 무엇보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내 근본을 잃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부모님도, 일가친척도 없던 내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고향인 곳이었으니.
“다행이다···.”
아.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순식간의 눈가에 몰린 열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며 그 열을 코끝까지 전달하였다.
“후. 일하자. 일.”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나는 익숙하게 흐릿한 눈을 손으로 훔쳐냈다.
그리고 다시금 쌓인 일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는 시골로 한번 내려가겠다는 다짐을 하며.
고작 며칠 비웠다고 가득 차 있는 메일을 빠르게 확인하며 쳐낼 때였다.
“저기···. 과장님.”
팀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 이 대리. 무슨 일이야?”
“다른 게 아니라···. 과장님, 잠시만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는 이 대리에 나 또한 고개를 같이 숙여주었다.
“서 팀장이 또 저보고 전표 치래요.”
뭔가 했더니.
우리 영업팀의 옥에 티. 서팀장과 관련된 일이었다.
“...얼마짜린데?”
서 팀장은 개인적인 일에 법인카드를 사용하고, 다른 팀원들의 이름으로 결재를 올리게 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
“28만 원이요. 아, 저 저번에도 회계팀에 불려갔는데···. 어떡해요? 아니, 서 팀장은 지가 처먹었으면 지가 치면 되지 왜 맨날 다른 사람한테 치라고 한대요? 그리고 점심으로 누가 28만 원어치를.. 아, 이건 정신 나간 거죠.”
거기다 금액도 컸다.
점심에 28만 원이라.
정신이 나갔지.
이 대리가 저렇게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 대리, 목소리 낮춰. 이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 놓고 가.”
뭣 같은 팀장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팀원은 나로서 족했다.
이런 고충을 처리하는 게 상사의 역할이기도 하고.
“아. 역시. 우리 영업팀의 구세주. 김 과장님. 충성!”
28만 원이 찍힌 영수증이 찍힌 전표를 이 대리에게서 받아들자, 이 대리가 감격한 듯 허리를 곧추세우며 충성을 외쳐댔다.
“충성은, 가서 일이나 해. 바이어가 납기 업데이트 묻던 것 같은데, 답했어?”
“와. 그건 또 언제 보셨대. 진짜. 최곱니다. 과장님. 그럼, 전 열심히 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
이 대리를 보내고 다시 밀려있는 메일을 처리하려 모니터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김 과장! 김 과장 어딨어!!”
개인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팀장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찾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팀원들의 모습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네. 팀장님.”
“아니, 이걸 김 과장이 보내면 어떡해! 내가 보낼 거라고 하지 않았어?”
팀장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모니터를 가리키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팀장이 가리킨 모니터에는 내가 오전에 업체들에 보낸 메일이 켜져 있었다.
“.,.”
메일을 보고서도 아무 말이 없자, 그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뗀 팀장이 나를 노려보았다.
“뭐야? 할 말 없어? 분명 내가 보낸다고 했는데 왜 발신자가 김 과장인 거냐고!!”
일에 치여 퍼석한 피부에 시뻘게진 눈을 한 나와 달리, 팀장의 피부는 광이 날 정도로 번지르르했다.
“그러시면 10시 전에 오셨어야죠. 공유를 9시까지 한다고 했는데 지금이 몇십니까.”
회사가 노는 곳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내 업무도 눈앞에 있는 이놈이 팀장을 맡으며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외근하고 들어온다고 했잖아!”
내 앞의 인간은 팀장을 단 이후로 출퇴근 시간을 아주 뭣같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외근을 핑계 대며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에 출근하기는 일수였다.
팀장의 외근소리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래서 어딜 다녀오셨는데요?”
내가 몸담은 회사는 식품의 원재료를 가공해 자사 브랜드로 팔거나, 바이어의 상표를 부착하여 생산하는 OEM 형식으로 수주를 받아 납품한다.
그러니까, 식품회사라는 소리다.
특히나 공장과 납품처를 수시로 오가야 하므로 향수나 담배 따위는 상종도 해야 하지 말아야 할 영업팀 소속.
그런 영업팀의 장(長)이라는 사람의 온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풀풀 나고 있었다.
그런데, 외근을 다녀 왔다고?
프로젝트도 다 끝난 지금 시점에?
지나가던 똥개가 웃을 소리다.
“김 과장 내가 당신 위야. 내가 왜 어딜 갔다 왔는지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줘야 하는데!”
아하. 위라.
단춧구멍 같은 눈을 뒤룩 굴려대더니, 하는 소리가 저거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대신 처리해 주었더니 적반하장으로 성질부리는 저놈 밑에서 내가 대체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참고 일을 했을까.
“알려주셔야죠. 그래야 무슨 사고를 어디에서 쳤는지 알고 수습할 거 아닙니까.”
“뭐, 뭐?”
가는 곳마다 사고는 쳐대고, 수습은 나 몰라라.
정말이지 사장의 아들만 아니었더라면, 잘렸어도 벌써 잘렸을 인물.
“윗사람이면 윗사람답게, 잘 좀 하시죠. 일도 좀 하시고, 다른 사람 아이디어를 본인 거라고 가져가지도 마시고.”
“뭐? 김 과장, 말 다 했어?”
설마. 이제부터 시작인데.
“아뇨.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낙하산으로 들어왔으면, 사장님 얼굴을 봐서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매일 뭐 일만 하려면 자리에도 없고 연락도 안 되면서 실적만 매번 가져가려고 하는 거 양심에 찔리지도 않습니까?”
“뭐? 야, 양심?”
열이 오르는지 시벌 개진 얼굴을 푸들거리며 떠는 모습을 보자니 저 깊숙이 품고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말 좀 더듬지 마시고, 할 말 있으시면 제대로 하시죠. 아. 그리고 존댓말은 기본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벌써 까먹으면 어떡하십니까. 여기 회사입니다. 팀장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 밑에서 일을 배우던 직원 중 한 명이었던 팀장.
특별히 사장님의 부탁도 있었을뿐더러,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태 넘어갔지만.
글쎄.
배려해 주는 걸 고마워하기는커녕 지만 잘났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사람을 봐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너, 너, 김 과장!!”
너라니.
방금 반말에 대해 경고를 했음에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팀장의 모습에 나도 똑같이 맞받아쳤다.
“왜, 서 팀장.”
이런 애들은 꼭 똑같이 해 줘야 정신을 차리더라고.
“야!!!”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나가보겠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요. 그럼.”
팀장의 영양가라곤 없는 고함에 귀를 후비며 사무실 문을 열던 찰나였다.
서팀장이 내 뒤통수에다 대고 제 목청을 자랑하기 시작한 건.
“고작 할머니 죽었다고 휴가 낸 새끼 봐줬더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 내가 가만있나 봐라.”
살짝 열린 팀장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팀원들의 놀란 눈동자들, 그리고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아직도 내 뒤에서 씩씩거리는 서 팀장.
서 팀장의 말을 천천히 복기한 나는 어금니를 악물며 뒤를 돌았다.
“뭐······?”
“지금 뭐? 지금 또 나한테 반말했냐? 이 새끼가 미쳤지?”
하.
내가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선 넘었지.
그래. 너 오늘 나랑 끝장 한번 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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