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직서는 던지는 게 제맛
“선 넘네······.”
어릴 적, 할머니는 나를 당신의 무릎에 앉혀놓고 삶의 지혜를 나눠 주셨었다.
옛이야기, 밖에서 내가 가지고 온 이름 모를 들풀에 대한 지식, 사람들과 지낼 때 지켜야 하는 예의 등등.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들은 하나같이 주옥같았는데, 걔 중에서도 할머니는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강조하시곤 했다.
사람은 필시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어쩔 수 없이 무리를 이루어 지내야 하는 존재라고.
무리를 이루고 잘 살기 위해서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역린을 피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역린을 건드는 사람은 필사(必死)한다는 말이 있는 만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역린을 건들지 않기 위해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서 팀장은 방금 내 역린을 건드렸다.
“뭐? 야 이새끼야 말 똑바로 안 해? 귀먹었냐?”
거기다 역린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고 천지 분간 못한 채 길길이 날뛰기까지.
저 자식을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는 소리를 들을까.
엉덩이에 불붙은 원숭이처럼 길길이 날뛰는 서 팀장을 보자니, 화 보다는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너무 화가 나면 차분해진다더니.
“웃어? 니가 지금 네 능력 믿고 까부는 것 같은데, 결국 이 회사의 주인이 될 건 나지 니 새끼가 아니라고. 어디서 개 주제에 주인한테 대들어 대들긴?”
개.
지금 개새끼처럼 월월 짖고 있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자각은 없어 보였다.
“헐···. 대박···.”
이제는 활짝 열린 팀장실의 문 너머로 놀람을 감추지 못한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벼락을 맞은 듯 입을 벌리고 얼어 있었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핸드폰 카메라는 전부 서 팀장을 향해 있었다.
그래.
아무리 노비라 해도, 진짜 노비라는 소리를 들으면 빡치기 마련이거든.
하물며, 지금 서 팀장이 말한 건 사람도 아니었다.
개라니.
“말 좀 조심하시죠?”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 막 하다가 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나.
그래도 상식이 있는 사장님을 생각해 한번은 넘어갈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사장님을 생각해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니.
기껏 입사 후 밤낮없이 머리를 싸매가며 이만큼 키워놨더니, 아들이라는 똥을 뿌린 걸 보면 사장도 똑같았다.
나는 실실 웃던 걸 멈추고 얼굴을 굳힌 채 서 팀장에게 경고했다.
“마, 말조심? 말조심 안 하면 어, 어쩔건데?”
겁먹은 티가 역력히 나는 주제에, 끝까지 센 척은.
얼굴 한번 굳힌 거로 겁을 먹을 정도의 간으로 싸움을 걸다니.
“지금까지 대화, 다 녹취했습니다.”
상대방 잘 못 골랐어. 이 자식아.
관용을 베푸는 것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 의도치 않게 실수를 했을 때나 베풀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격지심과 피해망상을 섞고 거기다 열등감을 한 스푼 가득 넣은 채 반죽한 결과물 같은 사람에게 상식이라?
모르긴 몰라도, 내가 서 팀장에게 관용을 베푸는 일 따윈 지구가 멸망해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뭐, 뭐? 누구 마음대로 녹음하래 이 새끼야!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봐라.
방금 겁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금 욕을 처하고 있다.
“이것도 녹음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민낯을 사방팔방 다 알리고 싶어 하나 본데, 도와드려야지.
“이, 이! 야 이···! 당장 그거 내놔!”
“읏차. 그렇게는 안 되죠 팀장님. 뭐, 지금 이거 뺏는다고 다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에이 설마.”
“또 뭐, 뭐?”
더군다나 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설마, 끝장을 보자고 했는데, 녹취하나 하는 거로 끝내기엔 아쉽잖아.
“어디 보자···. 우선 소소하게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사용하셨으니 횡령이 있을 것이고. 조금 더 들어가자면, 뇌물 수수도 될 수 있겠네요? 이 경우에는 사기라고 해야 하나. 팀장님, 저 자리 비웠을 때 아주 여기저기서 받아먹고 다니셨더라고요?”
“그, 그걸 니가 어떻게···.”
“문서 위조하면 안 걸릴 줄 알았나 봐요? 근데 그걸 아셔야지. 여태 니 새끼 뒤치다꺼리해준 사람이 바로 접니다만?”
내가 자리를 비운 새 리베이트 금액을 조절해 놓은 걸 발견했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정말 들키지 않을 줄 알았던 걸까.
“개, 개인정보 침해로 고소할 거니까 각오해.”
“하시죠. 전 명예훼손으로 고소장 추가하겠습니다. 직장 내 갑질도 추가하고요.”
“너! 너···.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뭐 이제 안 볼 건데, 가만히 있으실 필요 없죠? 마음껏 날뛰세요. 어차피 내일부터는 바빠지실 테니.”
“뭐, 뭐?”
“이 시간 후로부터는 제 변호사와 이야기하시죠. 아, 그리고 사직서.”
팀장의 책상 위에서 뒹굴던 종이 한 장에 즉석으로 사직서를 휘갈긴 나는, 서 팀장의 책상으로 툭 던졌다.
예의가 없는 사람에게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가 캐비닛을 열어 재킷과 가방을 챙긴 뒤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내 주변으로 모인 팀원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와···. 개 쩐다···.”
“이 대리님 지금 감탄할 때에요?”
“김 과장님 안돼요!!”
“그만둔다고요? 안돼요!!”
“김 과장님 그만두시면···. 저희는 어떡하라고요!”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는 프로젝트만 해도···.”
“개발팀 부장님께 이르겠습니다.”
퇴사 반대부터 프로젝트의 걱정, 타부서 부장에게 이르겠다는 팀원까지.
“다들 미안, 이렇게 나가게 돼서. 관련 자료들은 파일로 정리해서 보내줄 테니까 그걸로 인수인계는 대신에 하자. 필요하면 얼마든지 연락하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무리를 제대로 해주겠다는 말밖에 없었다.
무능한 팀장 밑에서 일하는 게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남의 일까지 걱정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차피 나는 회사를 돌아가게 하는 부품의 한 조각일 뿐. 없어진 부품은 다시 새로 끼우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이들도 지금은 하늘이 무너진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을 잘해 낼 것이다.
“....여보세요? HR팀이죠? 저, 사표 내려고 하는데 서식 어디서 다운 받을 수 있죠?”
아, 메인 부품이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 하는 일들 모두 나를 구심점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같이 퇴사하겠다는 팀원들의 반응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영업팀.
또 다른 이름으로는 나, 김한울의 원맨쇼.
메인 부품이 빠진 기계가 얼마나 잘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다들 당장 일 안 해?!!”
닫히는 유리문 너머로 들려오는 직원의 다급한 통화 소리와 또다시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팀장의 목소리.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점점 사무실 소리가 멀어지자, 10년 묵은 체증도 함께 내려가는 듯했다.
한때 내 청춘을 바친 회사였기에, 치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덮으려 애썼것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 역린을 건드린 대가는, 따로 계산해야 하지 않겠어?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최근 통화목록을 뒤져 곧 내가 전달할 정보를 누구보다 더 기다렸을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너 저번에 노동자의 편에서 회사를 잘 족치는 변호사로 유명하댔지?”
[이야. 너 드디어 결심했냐? 전화 잘 주셨습니다. 고객님. 저 장민준 변호사는 노동자의 편에서! 고객님이 만족하실 때까지 아주 탈탈 털어드립니다. 어떻게, 증거 수집은 좀 하셨을까요?]
“증거? 텍스트, 스크린샷, 동영상. 뭘 원하는데?”
말 만해.
[어이쿠 고객님, 그 정도면 회사 영혼까지 싹 다 털어드리겠습니다!]
따끈따끈한 갑질 영상까지 싹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
-스읍
차에서 내린 나는 기지개를 켜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은 동장군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아 차가웠지만, 폐부를 가득 채우는 맑은 공기는 장시간 운전을 하느라 몽롱했던 정신을 일깨우기엔 제격이었다.
“후하. 역시. 공기가 다르네. 여기는”
서 팀장에게 퇴사를 통보한 그 길로 민준에게 직장 내 갑질을 신고한 나는, 전에 없을 만큼 바쁜 몇 주를 보냈다.
‘김 과장, 나를 봐서라도 한 번만 우리 아들놈 좀 봐 주면 안 되겠나? 김 과장에게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내가 우리 아들놈이랑 김 과장 자네랑 투톱으로 우리 회사를 경영하게 하려고 했어. 알지 않나.’
내게서 모든 증거를 건네받은 민준은 허풍이 아니었는지 정말 노동자의 편에 써서 모든 일을 척척 진행해갔다.
그중 관건은 ‘00식품 낙하산 사장 아들의 쩌는 갑질’이라는 유치한 제목의 너튜브 영상이었다.
이런 걸 누가 보냐라고 했지만, 그 유치한 제목을 단 영상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아무리 아들에 대한 불만을 꾸준히 제기해도 꿈적도 하지 않던 사장에게서 전화까지 오게 했으니.
“좋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오지 않아 낯설게 느껴지면 어쩌나 싶었건만.
숨을 한번 몰아쉬는 것만으로 내 몸은 이곳을 기억해 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지지배배 우는 새소리.
집집마다 연기를 피어올리는 장작 냄새,
그리고 낯선 것을 보고 간혹 컹컹거리는 누렁이의 소리.
서늘한 입김을 만들어내는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내뱉으며 나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산속 있는 마을은, 고개를 한번 돌리는 것만으로 한눈에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오기 쉬운 곳을. 여태 뭘 위해서 그렇게 망설였을까.”
나에겐 계기가 필요했던 것도 같았다.
쉼도 제대도 없이 쳇바퀴를 돌리면서도, 쳇바퀴를 멈추는 법을 잊어버려 멈출 수 없었던 걸지도.
“이거, 서 팀장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끊임없이 쳇바퀴만 돌리다 생을 마감할 뻔한 노예를 일깨워줬으니 말이다.
거기다 서 팀장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은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 하나 있다고 너무 오냐오냐한 것 같네. 내가 대신 사과하지.’
일파만파 퍼지는 영상을 멈출 수는 없으니, 사장은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
‘사과로는 충분하지 않을 테니, 내가 퇴직금은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겠네. 그러니···. 그, 합의했다는 말 한 번만 해 주면 안 되겠나?’
노동부와 내가 준 증거들을 등에 업은 민준이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장과 서 팀장을 압박하며, 사과와 더불어 무지막지한 금액의 위로금을 뜯어낸 것.
덕분에 내 통장 잔고엔 평생 만져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금액이 찍혀있었다.
-솨아아
“오랜만에 듣네. 대나무 소리.”
마치 이미 끝난 일은 생각하지 말라는 듯,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대나무 소리에 나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 집 옆에 난 길을 따라 대나무 숲을 잠시 걷기로 했다.
“여기는 세월이 지나도 똑같네.”
불과 차로 몇 시간 떨어진 서울은 하루가 다르다고 변하는데, 이곳 대나무숲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대나무 숲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옹달샘이 하나 나오는데, 그 샘의 물맛은 시중에 나오는 그 어떤 생수보다 달고, 시원했었다.
“지금도 있으려나.”
숲 한가운데서 바람과 대나무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어릴 때를 회상하는 찰나였다.
“거기 누구여?”
꺾어지는 길 저편에서 흙을 밟는 발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나이든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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