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5화 (5/163)

4. 첫번째 만남

움칫거리는 귀.

폭신할 게 분명한 동그란 머리.

그리고 그 뒤로 살랑거리는 풍성한 꼬리.

“내, 내 말이 들리는 거냐?”

까만 양말을 신은 것 같은 발을 다소곳이 모은 채 고개를 올려 눈을 반짝이며 묻는 털 뭉치, 아니, 여우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눈만 끔뻑였다.

여우가···. 말을 해?

-사아아

생각지도 못한 존재와의 조우 때문일까, 말하는 여우를 멍하니 보고만 있자니, 선선한 봄바람이 정신 차리라는 듯 차례 내 볼을 훑고 지나갔다.

“왜 대답이 없냐···? 설마,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내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우의 고개가 축 처졌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서 있던 귀까지 접으며 한숨을 폭 내쉬는 털 뭉치는 금방이라고 캥! 하고 울어버릴 것 같았다.

“아니 들리긴 하는데···.”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자, 동그란 뒤통수가 단박에 들렸다.

“들, 들리는 거냐?”

기대감을 눈빛으로 표현한다면 저러할까.

내 대답을 들은 여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풍성한 꼬리를 살랑이며 내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프네.”

비현실적인 상황에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볼은 작금의 상황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어디 아픈 거냐?”

아프다는 내 말에 뱅글거리는 걸 멈춘 여우는, 내 다리를 지지대 삼아 두 발로 일어서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보았다.

“...이게 진짜라고?”

주위에 생명체라고는 잡초밖에 없던 곳에서 들린 환청.

아지랑이를 뚫고 나온 털 뭉치.

그리고 말하는 여우.

지금 이 상황을 민준에게 말한다면, 당장 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다시 시작하자고 할 것이 분명했다.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 뭐 이런 거로.

“머리가 아픈 거냐? 땅을 못 파서 머리가 아픈 거라면 내가 해결해 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어이없는 이 상황에 머리를 짚자, 두 발로 일어나도 내 무릎에 겨우 닿는 여우가 해결해 주겠다고 나선다.

원인 제공자가 누군데.

하지만 차마 내 두통의 원인이 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고저 없는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달했다.

“와-. 정말 고마운 일이구나. 해결해 주겠다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난 위대한 여우 정령이다! 킁!”

고맙다는 내 말에 여우가 솜방망이 같은 발을 내 무릎에 턱 올리며 콧김을 내 뿜었다.

“....그래. 위. 대한, 여우야”

그냥 여우도 아니고, 위대한 여우란다.

“여우가 아니고, 여우 정령이다!”

정령이라는 말을 뺐더니 바로 정정 요청이 들어왔다.

“어. 미안. 위대한 여우 정령아.”

“케헤헹! 그럼 바로 해결해 주겠다!”

여우 정령이라고 말해주자 그제야 흡족한 웃음을 터트리는 털 뭉치.

나를 돕겠다며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 같이 작은 발을 허우적거리는 여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무리만 하지 말렴.”

“걱정 마라! 나는 위대한 여우 정령이다!”

내 말에 다시 한번 콧김을 흥하고 내뿜은 여우는, 밭이 시작되는 저 끝으로 도도도 달려가더니, 마치 다이빙 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영락없는 여우인데···.”

언젠가 티비에서 여우의 습성을 본 적이 있었다.

다이빙하듯 펄쩍 뛰어 사냥하고,

-콕

굴을 파 사는 습성이 있어 땅을 파는데 선수라는···.

-두두두두두두

그저 말하는 것만 제외하면, 다른 여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건만.

“헐.”

위대한 여우.

아니, 위대한 여우‘정령’님은 정말로 위대했다.

다이빙해 뽀족한 코를 삽처럼 땅에 박은 것뿐인데, 땅속으로 쑥하고 들어가더니 그대로 돌진하며 밭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이거···. 실화냐.”

여우가 지나간 땅은 마치 트랙터가 지나간 듯, 어김없이 그 속내를 드러냈다.

“컁?”

내가 30분 동안 파놓은 코딱지만 한 구덩이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여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다이빙과 돌진을 했다.

“...”

순식간에 ‘콕’, ‘두두두두’ 이 두 조합으로 300평이나 되는 땅을 갈아엎은 여우.

땅에서 나온 여우는 몸을 한차례 턴 후 나에게 총총거리며 돌아왔다.

“어떠냐? 이제 머리가 아픈 건 나았냐?”

그리고는 미처 털지 못한 흙을 콧잔등에 묻힌 채, 앞발 하나로 내 다리를 짚고 일어서며 내게 물었다.

“어? 어. 나았어. 아주 싹 다 나았어.”

“푸힛! 나는 대단한 여우 정령이다!”

“진짜 대단하다. 고마워.”

빈말이 아니라,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갈아엎어진 밭을 보고 있자니, 눈앞의 여우가 정령이든, 말을 하는 동물이든, 상관없어졌다.

-착

고맙다는 내 말을 들은 여우 정령은 나머지 한발을 내 다리에 올렸다.

그리고는 무언가 기다리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여우정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마운데 왜 먹을 걸 주지 않는 거냐···?”

응?

먹을 거?

**

“나는 떡을 좋아한다!”

여우 정령의 주장은 타당했다.

노동하였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달라는 것.

“남자 사람이 흙을 파니까 여자 사람이 고맙다고 하며 음식을 줬다!”

“음식?”

“...나도 흙을 잘 팔 수 있는데! 아무도 내 말을 듣지 못했다···.”

“어이구. 속상했겠네.”

“맞다! 인간들은 왜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거냐···. 나는 밥이 싫다. 고수레는 대체 누구냐? 고수레는 밥만 좋아하는 거냐?”

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해 보자면, 여우는 우연히 봄을 맞이해 밭을 가는 걸 본 듯했다.

호기심에 그 주변에서 알짱거리다가 떡을 먹어보게 된 거고.

그 뒤로는 그때 맛본 떡 맛을 잊지 못해 밭을 가는 사람들을 찾아 다닌 것 같았다.

“고수레는, 그냥 추임새 같은 거라고 하면 되려나.”

어르신들이 많다 보니, 이곳에서는 도시에서 이미 사라진 옛 습관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밥을 먹기 전 한 수저 정도 덜어 ‘고수레!’라고 하며 풀밭에 던지는 행위도 그중 하나였다.

한강에서 피크닉 하다가 고수레를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아, 비둘기가 테러하는 건 제외다.

“그럼 고수레는 없는 것이냐?”

“그렇지.”

“고수레 먹으라고 딱 한 입만 맛봤었는데! 아깝다!”

떡을 던질 때 고수레라고 했기 때문에, 고수레 몫을 남겼었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여우.

“혹시 그때 먹은 떡 모양 기억하니?”

저렇게 먹고 싶어서 안달 내 하는데, 기왕이면 이 털 뭉치가 찾는 떡을 주고 싶었다.

오늘 내 목표는 이 털 뭉치 덕분에 끝낸 지 오래이기도 하고, 어차피 이사 떡을 사러 읍내에 나가려고 했기에 별로 수고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모양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냄새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내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바로 이 털 뭉치와 친해지는 것.

“오케이. 그럼 떡 사러 가 볼까?”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운 외모, 밭 300평을 순식간에 갈아버리는 능력.

거기다 말까지 통하는 여우와 친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정말이냐? 너는 참 좋은 사람이다! 내가 본 인간 중에 제일 멋있다! 최고다!”

떡 하나에 저렇게 좋아하며 온갖 찬사를 내뱉는 여우를 보자니, 아직 가슴 한켠에 뭉쳐있는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

할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누구와 친해지고 싶을 때는 먹을 걸 나눠 주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일단 먹여라. 식구라 안카나. 내 입에 맛있는 거 같이 먹자고 하는데,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노. 짐승도 지 밥 주는 사람한테는 잘한다 아이가.’

할머니의 말씀은 정확했다.

“...너는 착한 사람이니까 특별히 여우라고 불러도 괜찮다!”

떡을 사러 가자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우는 단 한 번만의 도약으로 내 어깨에 올라와 앉으며 말했다.

꼬리를 목에 두르고 앉아있는 자세가 굉장히 안정적인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우라고 불러도 된다니.

그냥 여우라고 부르면 ‘여우 정령’이라고 매번 정정 요청을 하던 걸 생각하면 굉장히 너그러운 처사였다.

“오, 그거 영광이네. 근데 여우 정말 괜찮겠어? 아니면 이름으로 불러줄게.”

“이름? 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다니.

이건 좀 충격인데.

‘위대한 여우 정령’이라고 하길래 이름도 있을 줄 알았건만.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뾰족했던 여우의 두 귀가 축 처졌다.

여우라는 호칭 대신 ‘위대한 여우 정령’이라는 호칭 그렇게 집착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없으면 지으면 되지. 내가 지어줄까? 음. 노을이 어때?”

“노을이···?”

“네 털빛이 노을빛이니까, 노을이. 어때?”

“너무 마음에 든다! 고맙다!”

다소 직관적인 이름이었음에도, 여우는 신이 났는지 내 어깨 위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기쁨을 마음껏 표출하며 뛰는데도 느껴지지 않는 무게가 신기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지어줄 걸 그랬나.

“노을아, 이제 내리자. 도착했다.”

노을과 대화하는 사이 시장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내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주변 작은 마을들의 쇼핑 플레이스인 읍내는 평일 아침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론 북적인다는 기준은, 하루종일 길에 서 있어봤자 사람보다 산짐승들을 더 자주 보이는 마을 기준.

“우와. 사람들이 많다!”

처음 보는 많은 사람에 노을이 신기한 듯 외쳤다.

큰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누구도 노을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케이. 좋았어. 미화 떡집은 아직 저기 있네.”

노을의 소리도, 모습도 몰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인 떡집의 위치를 파악하며 중얼거렸다.

작은 시골 마을들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떡집은 한곳밖에 없어 오랜만임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찾기가 쉬웠다.

“그 떡 냄새가 맡아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허공에대고 반질거리는 코를 킁킁거리던 노을이 눈을 반짝 뜨며 말했다.

“오 그래? 그럼 내가 너 따라갈 테니까 가봐 노을아.”

“알았다! 얼른 따라와라!”

“천천히 가. 넘어진다······. 어?”

냄새를 따라 쏜살같이 달리는 노을을 따라가자, 노을은 미화 떡집이 아닌 다른 떡집의 출입구 앞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 떡집]

“이런 곳이 생겼어? 구름 떡집이라···. 여기 맞아?”

“맞다! 여기서 그 떡의 냄새가 많이 난다.”

-꿀꺽.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지, 어느새 입안에서 홍수가 나려는 노을의 모습에 나는 유리문을 밀었다.

-차라랑

구름 떡집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청아하게 울리는 풍경소리.

시골 읍내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어서 오세요”

구름을 형상화한 듯한 내부를 보고 있자니, 카운터쪽에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터에는 마스크를 낀 여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포장을 하고 있었는데, 뒤에 쌓인 택배 박스가 이 집의 인기를 가늠케 했다.

하지만 떡들은 모두 카운터 안쪽, 주방과 연결된 곳에만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있을 뿐.

여느 떡집처럼 매장 안에 디스플레이 되어있는 떡들이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별스타 맛집 이런 곳은 아니겠지.

예약하지 않으면 사지도 못한다는 곳이면 곤란했다.

“혹시 떡 구매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마을에서 읍내로 왕복 40분이다.

시골에서 왕복 40분은 굉장한 거리인 만큼, 여기서 구매를 못 한다면 원래 가려던 미화 떡집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잠시만요, 확인해 드릴게요. 혹시 예약하셨을까요?”

“아뇨,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럼 죄송하지만, 떡은 저희가 지금 예약판매만 하고···. 응? 혹시 김한울?”

예약하지 않았다는 내 말에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포장을 멈춘 여자가 고개를 들어 거절의 말을 하더니 돌연 내 이름을 말했다.

“누구···?”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눈만 보이는 상대방에게 의문을 표하자, 여자는 바로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나야 강지민.”

아니, 네가 여긴 웬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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