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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8화 (8/163)

7.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아. 마이크-마이크- 테스트- 테스트. 친애하는- 친애하는-, 미화리- 미화리- 주민-주민- 여러분- 여러분-,]

“이야. 저 에코는 아직도 똑같네.”

지잉-하고 마이크가 켜지는 노이즈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화려한 에코를 자랑하는 마을회관 스피커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르륵

스피커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마을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는 스피커는, 연식이 오래되어서인지 웅웅거리는 통에 창문을 열지 않으면 잘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우리-우리우리 마을에-마을에마을에-]

“더 심해졌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닌 게 아니라, 방송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앞에 말했던 단어들이 메아리처럼 빙빙 돌아 전체적인 문장을 듣기 힘들었다.

마이크를 타고 뭉개져 들리는 목소리와 오래되어 지지직거리는 스피커의 콜라보는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마치 물에 들어간 상태에서 듣는 것 같은 스피커 소리에 창문을 닫고 다시 스테이크를 먹는 데 집중하려 할 때였다.

[....한울이가- 한울이가-]

“뭐야? 내 얘기야?”

얼핏 들리는 내 이름에 닫으려던 창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오게-오게-되-오-었-게-]

“...이거 좀 너무 한 거 아냐?”

창문을 활짝 열었음에도 웅얼거리는 소리는 여전했다.

아니, 더 심해졌다고 해야 하나.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어렴풋이 말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하면, 이제는 메아리가 뒤에 나오는 말을 삼켜버려 의미 파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내 이름이 나온 만큼 뒤에 내용이 궁금하였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송에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왜 그러냐?”

제 몫의 버터 스테이크를 해치우고, 명이나물과 와사비를 얹은 두 번째 스테이크를 먹던 노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별거 아니야. 얼른 마저 먹어.”

“혹시 저 소리가 잘 안 들려서 그러는 거냐?”

“그렇긴 한데, 괜찮아. 방송 끝나고 이장님께 전화하면 되니까.”

두 앞발로 야무지게 스테이크를 쥐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노을의 모습에,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본 노을은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스테이크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거라면 나 위대한 여우 정령 노을이 해결해 줄 수 있다!”

“오. 진짜?”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잠깐만 기다려라!”

한쪽 볼로 스테이크를 몰아넣은 노을은 그러고는 식탁을 지지대 삼아 일어났다.

그러더니 곧이어 이장님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친애하는 미화리 주민 여러분, 우리 마을에 기와집 할머니 댁 손주 한울이가 여서 살겠다고 서울서 왔습니다. 농사한다고 하니, 기와집네 땅에는 오늘부터 손도 대지 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맙소사.

노을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노을아, 큰일 났다.”

“뭐가 큰일이냐?”

“나중에 설명해 줄게. 일단 여기 좀 치우자.”

곧 있으면 어르신들이 집으로 들이닥칠 확률이 높았다.

방송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서둘러 치운다면 깔끔한 집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터.

한 사람의 식사라기엔 많은 양의 접시들을 모아 싱크대에 넣고, 식탁을 치울 때였다.

“한울이 집에 있나?”

마당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면 모르나. 불 켜진 거 보니까 있는 거 같네. 한울아 문 열어봐라. 내다. 옆집 할배.”

어르신들의 발은, 내 예상보다 더 빨랐다.

**

미화리 산골 마을.

20가구도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주민들의 사이는 끈끈했다.

“니는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야제. 내는 누가 차를 남의 집 앞에 갖다 댔나 했다.”

특히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품에서 자란 나를 마을 어른들은 많이 챙겨주셨다.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확인을 해 봤어야지.”

“낸들 알았나. 안 그래도 오늘 이장한테 물어볼라 캤다.”

특히나 지금 내 앞에서 투덕거리는 옆집 심 할아버지와 앞집 강 할머니는, 가끔 할머니가 볼일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울 때면 나를 맡아 돌봐 준 만큼, 친손주처럼 나를 챙기시는 분들이셨다.

“하하.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그래. 방금 밥 먹었나? 할미가 설거지해줄까?”

집에 들어오면서 주방 싱크대를 힐끗 본 강 할머니가 거실 테이블 옆에 앉으며 말했다.

휴. 식탁이라도 치워놓길 잘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거실에 앉는 대신 주방으로 가 식탁부터 치워주셨을 거다.

“괜찮습니다. 후식 먹고 설거지하려고요. 이사 떡 하나씩 드시죠. 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이사 떡? 인사 떡이라 해야 맞는 말 아이가? 으하하!”

세심한 성격의 강 할머니와 달리, 심 할아버지는 실없는 농담을 쉴 새 없이 날리는 타입이었다.

“....떡이 노란 게 맛있게 생겼네. 고맙다.”

“이따 가실 때 더 싸드릴게요. 많이 드세요.”

“그래? 안 그래도 점심이 시원찮았는데, 잘됐네.”

그래서 두 분은 만나기만 하면 투덕거리기 바빴다.

“됐다. 뭘 또 준다고 하노. 우리가 다 가지고 가버리면 니 다른 사람들한테 인사 우째 하려고. 넣어두라.”

“커흠. 맞다. 넣어두라.”

투덕거리는 것보다는, 일방적으로 혼난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지금도 좋다고 떡을 싸달라는 심 할아버지를 눈빛 한 번으로 제압한 강 할머니가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한울이 니 농사 짓는다고? 뭐 필요한 건 없나? 농사짓는다고 마음먹었으면 이 할매 한데 왔어야지.”

이게 바로 짬바라는 것일까.

나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던 방송을 정확히 들으신 듯했다.

“소소하게 하려고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감사는 뭔 감사. 밖에 씨감자 가져다 놨으니까 심어봐라. 감자 이거는 밭에 묻어만 두면 지가 알아서 큰다.”

아까 현관문을 열었을 때 무슨 포대가 보인다 싶더니.

그게 씨감자였을 줄이야.

농사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모종만 2가지다.

“감사합니다. 잘 심어 볼게요.”

저 무거운 씨감자를 가져왔을 강 할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심 할아버지가 불쑥 끼어들어 자신의 모종을 어필했다.

“하이고. 저거 썰어가, 재 묻혀서 심으려면 힘들다. 내가 가지고 모종은 그냥 꼽기만 하면 된다 꼽기만.”

저가 심 할매보다 더 좋은 작물을 가져왔으니, 제게도 감사 인사를 해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나는 감사 인사를 전할 수가 없었다.

“꼽기만 하면 되는 작물이 어딨노!”

강 할머니의 반박으로 2차 전쟁이 발발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므로.

그때였다.

마을회관에서 마침 돌아온 장 이장이 열린 현관에 신을 벗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이고. 방송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들 앉아있나.”

타이밍 좋게 등장한 장 이장님 덕분에 2차 전쟁은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심 할아버지의 화살은 그에게로 튀었다.

“이장 니는 한울이 왔으면 바로 알려줘야지. 와 이리 늦노!”

강 할머니와는 싸워봐야 매번 자신이 지는 걸 알기에, 그 타겟을 바꾼 것.

하지만 이장님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늦기는! 야 언제 온 지 아나? 정리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냐. 내 아까도 원래 방송 안 할라 그랬는데, 누가 야 밭을 다 파놨길래 사고를 미연에. 어? 미연에, 방지하려고 방송 먼저 한 거 아이가.”

“그렇나.”

순식간에 이장님에게도 패한 심 할아버지는 말없이 떡을 집어 먹었다.

혹시나 모를 다툼에 휩쓸릴까 봐 먼저 마을에 알렸다는 이장님의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 나는 그 밭을 갈아엎은 건 나라는 걸 알려주기로 했다.

정확히는 노을이 하였지만, 노을을 말할 수는 없으니.

“제가···.”

하지만 한번 시작된 이장님의 추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한울이가 팠을 리는 없고. 저 비리비리해가꼬 겨우내 굳은 밭을 어찌 파노. 관리 한지 오래돼서 돌도 많아 보이던데.”

“제가 했···.”

이장님이 잠깐 말을 쉬는 텀에 다시 내가 했음을 주장하려 했지만, 강 할머니가 더 빨랐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볼도 홀쭉해가지고, 불쌍해서 어쩌노. 이제는 지 챙겨주는 할매도 없고.”

“애인도 없다더라.”

“아이고. 큰일 났네. 노총각 아이가. 결혼 언제 할라꼬 그라노?”

“....”

어떻게 하면 범인을 찾던 이야기가 노총각으로 끝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밭갈이의 범인이 나임을 알려주려 했던 걸 포기했다.

지금 여기 있는 어르신들은 모인 김에 수다를 떨고 싶으신 거다.

한참을 내 걱정을 빙자한 수다 타임을 갖던 강 할머니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내 정신 좀 봐라. 이것 좀 무봐라. 니 좋아했다 아이가.”

우육포.

어릴 때 과자 대신 강 할머니가 내게 주신 간식이었다.

훈연향과 짭조름함이 완벽히 어우러진 육포를 한입 베어 문 나는, 어깨에 앉아있는 노을에도 건네주었다.

[이 맛은···! 캬항! 이것도 맛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싸우는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던 노을은, 내가 건네주는 음식을 정신없이 입안에 넣으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러다 볼 터지는 건 아니겠지.

양 볼 가득 음식을 넣어 오물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는 했지만, 건강을 생각한다면 제지를 해야 했다.

왜,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종종 비만 견 혹은 비만 고양이 같은 녀석들이 다이어트 한다고 고생하지 않나.

[왜, 왜 뺏는 거냐?]

“살찌면 안 돼. 다이어트.”

[나는 살이 찌지 않는 위대한 정령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다이어트? 니 다이어트 할라꼬? 할 데가 어디 있어서? 원래 남자는 좀 살집이 있는 게 좋다.”

“아뇨. 제가 아니라···.”

무심코 노을과 대화를 한 걸 깨닫고 수습하려 했지만, 심 할아버지가 더 빨랐다.

“크흠. 내가 가지고 온 모종 중에 방울토마토도 있거든? 그기 그렇게 다이어트에도 좋다더라.”

“방울토마토가 특별해 봤자 방울토마토 아니가. 뭔 생색이고.”

“뭐라카노. 이 방울토마토는 그냥 방울토마토가 아닌 거라! 이거는, 어? 그냥 방울토마토가 아니고!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라는 거다! 뭐 알지도 못하면서···.”

이제는 숫제 울 것 같은 심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얼른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해 드렸다.

“오. 스테비아 방울토마토 듣기만 했지, 먹어본 적은 없는데. 감사합니다.”

“역시. 서울서 학교 나온 아는 다르다. 바로 아는 거 봐라! 내가 비료도 줄 테니까, 가져가라.”

“우리 집 비료가 더 좋다. 갖고 가라.”

“좋아 봤자지. 우리 집은 내가 직.접. 만든다. 알제? 할배집 작물이 우리 마을에서 제일 잘 팔리는 거?”

“제일 잘 팔리기는. 싸게 파니까 그러지.”

다시금 시작된 비료 발 다툼에 내가 해탈한 미소를 머금을 때였다.

이 두 사람을 모이게 만든 이장님이 두 어르신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마. 고만 싸워라. 강가랑 심가는 만나기만 하면 싸우노. 아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마, 고만하고 집에들 갑시다. 한울이 니는 다 심으면 알려주고. 알겠제?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네. 이장님.

멀리 나가진 않겠습니다.

**

시골의 밤은 도시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해가 지고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 때면, 비로소 길 위에 드문드문 자리한 주황빛 가로등이 깜빡하고 켜진다.

점점 어두워지는 밤하늘과 그와 반대로 제 영역을 넓혀가는 가로등.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 수놓기 시작할 때면, 집안을 밝히는 불들은 하나둘 꺼지기 시작한다.

완연한 어둠이 내린 골목.

빛이라고는 깜빡거리는 가로등밖에 없는 거리에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머리에 무언가를 쓴 남자가 나타났다.

“노을아, 준비됐어?”

“나는 준비가 되었다!”

반짝.

어둠 속에서 노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사위가 어두워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위대한 여우 정령인 노을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바스락.

노을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나도 헤드 랜턴의 조도를 조절하며 말했다.

“자, 그럼 좀 심어 볼까?”

모두가 잠든 야심한 저녁.

남자와 정령의 비밀스러운 농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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