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거 실화야?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달이 제 얼굴을 보였다.
청명한 달빛이 땅을 비추자.
노을이 앞발 하나를 들어 올렸다.
팟칭-!
퐁실한 솜방망이 발에는 평소와는 달리 날카로운 발톱이 드러나 있었다.
갈고리처럼 생긴 발톱은 심혈 기울여 연마한 듯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쿄호호. 이때만을 기다렸다!”
스치기만 하더라도 중상을 입을 것만 같은 날카로운 발톱.
발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을은 이내 결단을 내린 듯,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뾱.
“어떠냐!”
경이로운 속도로 앞발을 휘둘렀다 회수한 노을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든 노을.
노을의 공격을 받은 땅에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야. 대단한데?”
모종을 심기 딱 좋은 깊이로 파여진 구멍을 보며 노을을 향해 칭찬했다.
“푸힛! 나는 대단하다!”
내 칭찬에 신이 난 듯, 노을의 꼬리가 한층 더 빠르게 살랑거렸다.
“그런데 노을이 힘들지 않겠어?”
모종을 심기 좋은 구멍이 파지긴 하였지만, 저 작은 앞발에 비해 이 밭은 너무 넓었다.
게다가 앞발을 휘두르기 전 기를 모으듯 한쪽 발을 드는 과정이 있는 걸 보아하니, 내가 호미를 사용해 땅을 파는 것과 시간상으로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침에 해도 되겠네.”
노을의 도움으로 밭을 갈아엎었을 뿐인데, 마을 회관을 통해 방송까지 탔다.
모르긴 몰라도 누군가 노을의 그 돌진을 목격했다면, 마을 방송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마을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경작을 하는 것.
어르신들이 놀라 기절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자니, 노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침?”
“아아. 노을이랑 같이 파려면 아침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 중이었지.”
헤드 랜턴을 쓴 모양새가 수상쩍어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조도를 낮췄더니 온통 흙밖에 없는 밭에서 작업하기가 쉽지 않았다.
밤에 작업하려고 했던 것도 행여나 누가 너무 빠른 노을의 작업 속도를 볼까 싶어서였던 것만큼, 땅을 갈아엎을 때를 제외하고는 낮에 작업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모종을 심을 구멍을 같이 파자는 내 말에 또다시 한쪽 발을 하늘로 뻗던 노을의 귀가 쫑긋거렸다.
“같이?”
같이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을.
“그래. 읏차. 봐봐. 어떤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마치 너도 땅을 팔 수 있어? 라는 의문 서린 노을의 눈빛에, 손에 쥐고 있던 호미로 재차 거머쥐었다.
호미를 잡은 손을 땅으로 뻗자, 하늘로 뻗었던 앞발을 내린 노을이 도도도 달려왔다.
팟팟팟.
호미질 세 번 만에 구멍이 파였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잘 팠다! 칭찬한다!”
노을이 손. 아니, 발로 뚫은 구멍보다는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굳었던 땅을 삽질 할 때와는 달리 내 의도 대로 파였다.
“그렇지? 그러니까, 같이 얼른 파고 들어가자고.”
“알았다!”
“근데 그냥 파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시합할까?”
어둑어둑한 사위.
이제 파기 시작한 밭.
능률을 빠르게 올리기 위해서는 특효약이 필요한 법.
“시합?”
“어. 시합에서 이기면, 이기는 사람 부탁 한번 들어주기. 어때?”
“오오! 좋다!”
“오케이. 그럼 하나둘셋 하면 시작하는 거다?”
“컁! 좋다! 시합이다!”
이긴 사람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조건을 들은 노을이 컁컁거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자, 공정한 시합을 위해서 출발선에 서시고.”
“섰다!”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먼저 파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오케이?”
“알았다! 얼른 시작하자! 킁!”
출발선에서 연신 앞발을 구르는 가을.
누가 보면 달밤에 무슨 짓이냐고 할 모양새였지만, 나와 노을은 진지했다.
앞선 노을의 시범을 보자면, 이번 시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벌써 노을에게 할 부탁도 정해놓았다.
‘이기면 콩콩이 좀 해 달라고 해야지.’
어르신들이 떠난 뒤.
한바탕 대청소하고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고 있자니, 노을이 어깨로 올라와 콩콩 뛰었다.
그저 뛰었을 뿐인데 어지간한 마사지를 받은 것보다 효과가 좋았다.
피로도 풀렸는지, 이 밤중에 호미를 들고 설쳐도 피곤하지 않았다.
“자, 그럼 준비하시고.”
“준비하시고!”
노을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몸을 한껏 낮췄다.
“하나···.”
숫자를 셈과 동시에 땅에 박히는 노을의 앞발.
“켕!”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안한 느낌에 나는 남은 숫자를 빠르게 내뱉으며 호미질을 바로 시작했다.
“둘셋!”
파파팟.
조금 비겁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나는 콩콩이를 받기 위해 무아지경으로 호미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뾱뾱뾱뾱!
뭔가 내 옆에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
설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노을이 네 발이 흙에 반쯤 박혀있었다.
그러니까, 한 번에 구멍을 네 개를 팠다.
“그럼 먼저 가겠다! 캬항!”
멍하게 자신을 보는 나를 향해 인사를 날린 노을은, 네발 신공을 보이며 밭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뾱뾱뾱뾱!
뾱뾱뾱뾱!
한번 점프할 때마다 들리는 4개의 구멍이 생기는 소리.
잠깐만.
발하나 올려서 달빛도 좀 쬐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인간적으로 한발 쓰다가 네발 쓰는 건 반칙 아니냐?
이거 맞아?
**
“다했다!”
“...”
“왜 그러냐? 설마, 어디가 아픈 거냐?”
당연한 말이지만, 시합에서 진 건 나였다.
무려 1초나 빨리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을의 네발 신공을 이기지 못한 것.
‘캬항! 내가 이겼다!’
‘...그래. 부탁이 뭐야?’
‘쓰담쓰담을 해줘라!’
분명 맛있는 요리를 부탁할 거라 생각했던 노을은, 내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앞발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얼떨떨하게 노을의 머리를 쓰담듬어주자, 충분히 쓰담쓰담을 즐긴 노을이 우다다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을의 우다다가 끝난 지금.
300평 텃밭에는 화성 분화구 같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파여 있었다.
“아니, 밤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 중. 이걸 누가 봤으면···.”
어후.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괜찮다! 한울은 땅을 잘 못 파지만, 요리를 잘한다! 자신감을 가져라! 컁!”
노을은 내 걱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어깨 위로 총총 올라오더니, 제 앞발을 내 얼굴에 턱 올리며 위로했다.
조금 전까지 밭의 구멍을 만들어 낸 그 앞발로.
“하하. 고맙다. 땅을 잘 못 파도 괜찮은 거야?”
“모든 걸 잘 할 수는 없는거랬다!”
나 참.
이런 기특한 소리를 하는 아이를 이기려 숫자를 빠르게 내뱉은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려 했다.
“고맙다.”
“고마우면 쓰담쓰담해줘라...”
“하하. 얼마든지.”
반질거리는 코를 하늘 높이 들고 컁컁거리는 노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노을이 만족스러운 듯 골골거렸다.
“자, 그럼 이제 모종만 몇 개 심고 집으로 돌아갈까?”
노을이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모종을 심을 수 있는 구멍을 판 덕분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알았다! 그럼 나는 옆에서 노래를 부르겠다! 컁!”
식물들을 빠르게 자라게 할 수 있다는 노을의 능력도 볼 겸, 지금 당장 옮겨심기가 필요한 모종들을 심을 생각이었다.
“오케이. 좋았어. 내가 먼저 심으면서 갈 테니까, 따라와.”
“알겠다!”
노을의 대답을 들은 나는, 둑에 쌓아둔 모종판을 하나 가져와 심기 시작했다.
일단은 단호박과 호박.
강 할머니와 심 할아버지가 가져다준 모종들과 달리 지민이 키웠다는 모종은 시들시들했다.
폭.
조심스럽게 모종을 틀에서 꺼내고, 구멍으로 옮긴 뒤.
스윽.
흙으로 살살 덮어주고,.
“이왕 심은 거, 잘 자라라.”
쪼르르.
물을 적당히 부어주면 끝.
잎이 축 처진 모양새가 안쓰러워 흙이 충분히 젖을 만큼 물을 주었다.
날이 밝을 때 비료라도 더 주든지 해야지.
그렇게 지민에게서 받은 모종을 거의 다 옮겨심을 무렵.
[♩♪♬~]
신비로운 노랫소리가 밭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청명한 달 아래에서 식물들을 위해 노래하는 여우 정령이라.
비현실적이나 못해, 신성하게까지 보이는 광경에 나는 모종을 옮겨심던 걸 잠시 멈추고 눈을 감았다.
[♩♪♬~]
얼마나 노을의 노래를 감상했을까.
스스스슥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빠지직.
노을의 노랫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귀에 걸려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으악! 노을아 멈춰!”
눈을 뜬 나는 급하게 노을의 노래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무슨 문제가 생겼냐?”
왜 그러긴.
“무슨 호박이 벌써···.”
분명 시들한 모종을 심은 지 몇 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방금 내가 지나온 밭 한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노란 늙은호박과 초록색의 밤 호박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
다음 날 아침.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날이 밝자마자 차를 끌고 구름 떡집으로 향했다.
쿵.
“이게 다 뭐야?”
호박이 가득 찬 큰 박스를 카운터 위에 올리자, 눈이 동그래진 지민이 물었다.
“호박.”
“호박인 걸 누가 몰라서 묻냐. 어디서 났냐고.”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내게 지민이 핀잔을 주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길게 대답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지인.”
“이야. 호박 너무 좋은데? 누가 이런 호박을 이만큼이나 선물로 줬대? 보관 엄청 잘 했나 보다. 진짜 좋은데?”
“있어.”
“야, 그런 지인 있으면 나도 좀 알려주라. 호박 좀 사게. 근데 너 무슨 일 있어? 엄청 피곤해 보인다?”
무슨 일은.
그저 마을 어르신들께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으려고 깜깜한 밤에 모종을 좀 심겠다고 나갔다가, 아닌 밤에 호박 수확하고 나른다고 고생한 거밖에 더 있겠냐.
피곤해서 대답을 단답형으로 할 수밖에 없는 거 빼고는 괜찮단다. 친구야.
“그냥 좀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 호박을 사기에는 그 사람이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사람 아니라서.”
“그래? 아쉽네. 어쨌든, 땡큐쏘머치.”
“고마우면 호박떡 남은 거 좀 줘봐.”
집 창고를 가득 채우다 못해 처치 곤란한 호박을 처리하기 위해 가져 오긴 했지만,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침을 꼴깍 삼키는 노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흐흐. 내가 그랬지? 한번 먹으면 계속 생각난다고. 자. 여기.”
“오. 어째 오늘은 순순히 주네?”
저번과는 달리 순순히 호박떡을 내주는 지민에게 카드를 건넸다.
“호박 가져다줬는데 뭘 돈을 받아. 그냥 가져가. 이런 거 있으면 또 가져다주고.”
어지간히 호박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민은 호박떡값을 받지 않았다.
안 받으면 나야 땡큐지.
“오케이. 간다.”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고 인사를 하자, 지민이 나를 불러세웠다.
“야. 잠깐만. 이걸로 주스 만들어 줄테니까 그거 먹고 가.”
“호박 주스? 됐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련다.”
“야. 이게 매일 오는 기회가 아니다 너? 내가 너 지금 너무 피곤해 보여서 특별히 만들어 주는 거야. 호박도 싱싱하기도 하고. 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듣기만 해도 상상될 것 같은 맛에 거절했지만, 내 말을 상큼하게 무시한 채 지민은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위이잉-!
도마에 둔탁한 칼질 소리가 들리고.
벅벅 안을 긁는 숟가락 소리가 들리더니, 윙윙거리는 믹서기 소리를 끝으로 주방의 소음이 멈추었다.
“짜잔! 마셔! 쭉 들이키고 귀가하시게!”
큰 잔에 주황빛 액체를 가득 담아 온 지민이 내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못해도 500mL는 될 법한 양이었다.
“먹고 안 죽어. 심지어 맛있어. 누님 말을 믿어봐라. 쭉 들이켜. 피로회복에 진짜 최고라니까?”
호박이 약도 아니고.
약장수처럼 호박의 효능을 줄줄 읊는 지민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은 나는, 호박 주스를 들이켰다.
“..!!!”
그리고 경악했다.
주스를 마시면 마실수록 회복되는 피로 때문이었다.
...이거 실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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