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만 믿어라!
탁.
다 마신 잔을 카운터에 올리자, 지민이 기다렸다는 듯 맛에 대한 평가를 요구했다.
“어때? 맛있지? 사람들이 즙으로 많이 먹는데 이게 호박을 통째로 갈아야 더 영양가가 풍부하거든. 내가 이거 곱게 갈겠다고 무려 스무디용 믹서기를 샀다는 거 아니냐. 믹서기 하나에 200만 원이 넘음.”
어쩐지 호박을 통째로 간 것 치고 목 넘김이 좋다 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혹시 너 이거 만들 때 다른 거 넣은 거 있어? 비타민이라던가 마그네슘이라던가.”
“응? 아니? 왜?”
비타민과 마그네슘을 액상으로 마시면 피로회복에 효과가 즉각적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고 이어지는 야근에 지쳐 약국에 가면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본 약사가 저 두 개를 손에 쥐여주어 알게 되었다.
그나저나.
그런 걸 넣지 않았다라.
뭐, 플라세보 효과 이런 건가.
빈속에 당분이 들어가서 그럴 수도.
“아니다. 목 넘김이 좋네.”
“어. 장난 아니지? 나도 이렇게까지 비싼 걸 살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아부지 가게에 믹서기로는 내가 원하는 그 부드러움이 안 나오더라고.”
그나저나.
한번 물꼬가 터진 지민의 수다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게에 처박혀서 있는 것보다는 영업이 천직인 것 같은데.
왜 잘 다니던 대기업 영업팀을 박차고 나와서 이럴까.
“....그래서 내가 ‘크림치즈와 생크림을 감싸 안은 달콤 말랑 쫀득 꿀 호박떡’을 출시한 거 아냐. 늙은호박이 옛날에는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쓰였대. 잘 먹으면 보약이라니까?”
[귀···. 귀가 아프다!]
끝없는 수다에 노을이가 짧은 다리를 올려 제 귀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맛있는 호박떡을 만드니 좋은 사람이 분명하다며 지민을 볼 때마다 반짝였던 눈도 짜게 식은 채였다.
그 마음 다 안다.
그냥 듣는 것뿐인데 급격히 몰려오는 피곤.
나는 노을의 투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민에게 말했다.
“어. 알았어. 수고.”
물꼬 터진 사람의 수다를 피하는 방법은 딱 하나.
그 자리를 뜨는 것.
하지만 지민은 짜게 식은 내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이제는 자신의 사업계획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벌써가? 야, 더 들어봐. 그래서 내가 저 믹서기를 산 이유가 뭐냐면, 호박떡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호박 주스도 만들어서 팔려고. ‘통으로 갈아 만든 100% 호박 주스’랑 ‘크림치즈와 생크림을 감싸 안은 달콤 말랑 쫀득 꿀 호박떡’! 아침 식사 대용으로 완전 잘 팔릴 것 같지 않냐?”
아침 대용으로 호박 주스와 호박떡이라.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다만 호박 주스의 경우 호박떡과는 달리 100% 호박에 의존해야 하기에, 원물의 품질에 더욱 신경 써야 할 터였다.
식품 판매에는 마케팅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품질이 최우선이니까.
아무리 마케팅을 잘하더라도 원물이 좋지 않으면 소비자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기 마련.
‘뭐, 얘는 벌써 호박떡으로 인정받았으니 걱정은 없겠네.’
지민은 이미 호박떡으로 충성고객을 확보해 놓은 상태니, 분명 이것도 날개 돋친 듯이 팔릴 터였다.
그나저나.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워커홀릭’이라니 ‘워라벨’을 맞춰서 생활하라느니···.
회사의 망령에서 빠져나오라던 사람은 대체 어디 갔지?
순식간에 나를 일모드로 끌어드린 지민에게서 뒤돌아선 나는, 가게를 나가기 전 지민을 위한 팁을 알려줬다.
사업은 알아서도 잘 하는 것 같으니, 사업이 아닌 다른 부분에 대하여.
“간다. 아, 더 수다 떨고 싶으며 사리 켜놓고 해. 요즘에 ai가 맞장구 잘 쳐준다더라.”
이 지구상에서 아마 너의 수다를 지치지 않고 맞장구쳐 줄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 일 거다.
“사리? 야!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아, 배터리 충전은 잊지 말고.
**
“맛있다! 캬항!”
“떡이 그렇게 좋아?”
차로 돌아오자마자 호박떡을 하나 줬더니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는 노을.
“응! 맛있다! 별미로 딱 맞다!”
별미라니.
왠지는 모르겠지만, 노을의 입에서 별미라는 단어가 나옴과 동시에 내 입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별미? 노을이 너 안 먹어도 된다며?”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지 안 먹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아. 오케이. 접수. 그러니까, 맛있는 것만 먹는다는 거지?”
“맞다! 역시 똑똑하다!”
역시. 식탐 여우 정령 아니랄까 봐.
맛있는 것만 먹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해 냈다.
먹지 않아도 되기에, 기왕에 먹는 건 다 맛있는걸 먹는 다라.
“그래. 그럼 호박떡이랑 내 요리 둘 중에 어떤 게 더 좋아?”
“당연히 네 요리가 더 좋다!”
지금 호박떡을 먹고 있는 만큼, 고민할 거라 생각했건만.
단번에 내 요리가 좋다는 노을의 대답에 내 입꼬리가 한껏 위로 올라갔다.
“오? 이거 영광인데?”
“호박떡도 맛있지만, 귀, 귀가 따갑다. 캬항···.”
귀가 따갑다니.
아무래도 이 귀여운 여우정령이 지민에게로 가는 일은 영영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보지도 못하니, 당연한 건가.
아무튼.
“하하. 귀가 따갑다니. 그럼 안되지. 그럼 떡을 먹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먹었던 거야?”
“숲에 있을 때는 숲에 있는 과일들을 먹었다!”
“아하. 산 열매들.”
어릴 적 숲에서 뛰어놀며 간식 삼아 먹었던 열매들.
사람들이 얼마 없는 마을이라서인지, 내 키가 닿는 곳에도 항상 열매들이 있었다.
“응! 내가 노래를 불러주면 언제든지 열매를 먹을 수 있다! 다음에 숲을 가게 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
으름이 익을 때쯤이면 항상 온 산을 뒤졌었는데.
“오. 그거 기대되는데?”
이제는 그냥 먹고 싶을 때 노을만 데리고 가면 되는 건가?
“특별히 한울에게는 쓰담쓰담 한 번으로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
“하하. 영광이네. 고마워.”
나는 제철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산 열매를 쓰담쓰담 한 번으로 먹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노을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었다.
반짝.
눈을 게슴츠레하게 감고 쓰담쓰담을 즐기던 노을의 눈이 갑작스럽게 떠졌다.
무언가 물어볼 게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생겼다.”
“어. 뭐?”
“호박을 주면 호박떡을 얻을 수 있는 거냐···?”
“응? 뭐라고?”
밖의 소음 탓에 질문을 잘 듣지 못해 다시 묻자, 노을이 까만 발로 트렁크와 떡이 담긴 상자를 차례로 가리켰다.
“호박을 준 것뿐인데, 호박떡이 생겼다···!”
“아아. 그건 호박이 너무 좋다고 선물로 준 거야.”
“호박이 좋으면 떡을 주는 거냐?”
귀를 움칫거리며 고개를 쭉 뻗는 걸 보아하니,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
맞다고 하면 당장 집 창고에 있는 호박을 들고 가 구름 떡집 가게 문 앞에 잔뜩 쌓아둘 것 같은 노을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호박을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돈 주면 다 살 수 있어.”
“돈?”
“어. 이런 현금.”
“아! 그거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다들 소중히 품고 다니는 거다!”
하긴.
현금을 그냥 손에 쥐고 다니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힘들긴 하지.
“소중히? 그렇네. 소중히 품고 다니네. 뭐, 돈이 있으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으니까 그래야겠지?”
직관적이지만, 본질을 꿰뚫어 보는 노을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반면 내 대답을 들은 노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럼 돈이 많으면 그 입에서 살살 녹던 고기도 매일 사 먹을 수 있는 거냐?”
오. 한 번에 돈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다니.
이런 게 바로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는 신동인 것일까?
마치 팔불출 부모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질리지만 않으면.”
“떡보다 맛있는 고기가 질릴 리가 없다!”
“세상엔 그것보다 더 맛있는 것들도 많아.”
“더···. 맛있는 거···?”
만류귀종이라했던가.
어떤 주제로 이야기해도 끝은 결국 맛있는 음식 얘기인 노을.
아무래도 할머니들께 요리를 조금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천천히 만들어 줄게.”
꼴깍.
침을 삼킨 노을이 이내 고개를 들어 추가 질문을 시작했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거냐···?”
“그런 건 아닌데···.”
“돈은 어디서 생기는 것이냐?”
“일하거나, 뭘 팔면 생기지?”
“팔아···?”
“음···. 예를 들면 우리가 키우고 있는 것들도 팔 수 있지.”
“호에에. 그것들을 팔면 돈이 생기는 거냐?”
“그렇지?”
“그럼 많이 팔면 돈도 많이 생기는 거냐?”
“그렇지 않을까? 아무래도 팔 게 많으면···. 근데 굳이···.”
잠깐. 노을에게 대답을 해주던 나는 순간 대답 하는걸 멈추었다.
대화의 흐름이 이상했다.
분명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음식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 전형적인 노을의 대화 패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돈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니.
언뜻 밀려오는 불안감에 차를 갓길에 세울 때였다.
혼잣말로 ‘많이 팔면 돈이 많아 진다는 거냐···?’따위를 중얼거리던 노을이 결심했다는 듯 대시보드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선포했다.
“나에겐! 목표가 생겼다!!”
"오. 목표?“
목표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두게 되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니까.
하지만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노을을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노을이 폭탄선언을 하기 시작했다.
“작물을 많이 키우겠다! 물을 줄 수 있는 친구를 데려오겠다!”
"친구라니?“
위대한 정령은 너 혼자가 아니었니?
“걱정 마라! 내가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
게다가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니.
“나만 믿어라!”
조막만 한 까만 발을 내 팔에 턱 얹으며 킁! 하고 콧김을 내뿜는 노을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했다.
“저기 노을아···?”
아니 저기, 내 목표는 안부낙도(安富樂道)야 노을아.
게다가, 퇴사하면서 돈도 많이 받았다고!
**
다음 날 아침.
나는 노을의 재촉으로 아침부터 등산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제 차 안에서 했던 노을의 다짐 중 하나가 이루기 위해서였다.
“노을아, 어디까지 가는 거야?”
대나무 숲을 지나, 양옆으로 밭이 쫙 펼쳐진 야트막한 언덕까지 지나고.
마을 사람들의 특별한 물을 담당하는 옹달샘까지 지났지만, 노을의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저 꼬리를 살랑이며 가벼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꽤 많은 거리를 걸었음에도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는 걸 보니, 농사의 효과가 대단한 것 같았다.
“숲을 이렇게나 깊게 들어온 건 처음이네.”
차악.
힘들이지 않고 길이 아닌 곳을 가는 노을의 뒤를 따라가니, 어릴 적 그렇게 숲을 뛰어다녔음에도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저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산책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상쾌함을 배로 품은 공기를 크게 들어 마실 때였다.
“이제 다 왔다! 여기다!”
사사삭.
앞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걷고 있던 노을이 컁! 하는 소리를 끝으로 풀숲 더미로 쏙하고 사라졌다.
“여기라고?”
유독 빽빽한 나무 때문에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노을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팔을 넣어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와···.”
숲을 내 놀이터처럼 뛰어놀았던 나조차 여태껏 보지 못했던 절경이 내 눈을 밝혔다.
수풀로 둘러싸인 깨끗한 연못.
연못을 둘러싼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황금빛 햇살.
그 햇살을 받아 금빛의 빛을 산란하는 연못.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꽉?
“오리···?”
“인사해라! 내 친구다!”
눈부신 반짝임이 어린 연못에서, 두 번째 정령과의 조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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