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앞마당 한켠에는 보수가 끝난 닭장이 번쩍거리는 외형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이야 노을이랑 찹쌀이 덕분에 빨리 끝났네. 고마워. 너희들이 최고야!”
나는 닭장 보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 공신들에게 칭찬을 아낌없이 퍼부어주었다.
두 녀석이 도와준 덕분에 나는 못질만 했을 뿐, 별로 힘들이지 않고 닭장 보수를 마칠 수 있었으니까.
“푸힛! 나는 위대하고 대단한 노을이다!”
“이건 식은 죽 먹기다 꽉!”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을 하자, 노을과 찹쌀의 고개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드러난 목을 살살 긁어 주자, 둘 다 만족스러운지 고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둘 다 정말 대단해.”
노을의 나무 컷팅 솜씨도 대단했지만, 특히나 더 대단했던 건 찹쌀의 물대포 실력이었다.
물을 사용할 수 있는 정령임은 노을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물이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거나, 사물에 닿기만 하면 본연의 색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하여튼. 알면 알수록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너 식은 죽 먹어봤냐?”
돌연 쓰담쓰담을 즐기며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노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안 먹어봤다 꽉!”
“식은 죽은 맛있는 거냐···?”
갑자기 번쩍 뜨인 눈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귀를 기울였건만.
식은 죽의 맛이 궁금해서였다니.
노을다운 질문에 속으로 웃음을 삼킬 때였다.
“나도 모르겠다 꽉!”
찹쌀이 감은 눈을 뜨지도 않고, 그저 TV에서 그렇게 얘기하는걸 봤을 뿐이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찹쌀에게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하자, 노을은 고개를 돌려 나를 말 없이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챱챱 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입.
직접적으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나는 노을이 전달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파악할 수 있겠다.
“식은 죽이 먹고 싶은 거구나?”
“아니다! 아직 저녁을 먹을 때가 안됐으니 참을 거다!”
연신 침을 삼키면서 아니라고 해 봤자···.
조금 전에도 ‘TV는 TV일 뿐, 몰입하지 말자!’라는 것을 외쳤음에도 식충이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노을을 보며 나는 모른 척 중얼거렸다.
“어우 그래?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배가 좀 출출해서 간식을 좀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노을이는 안 먹겠네?”
“가, 간식···?”
역시. 간식이라는 말에 노을이 단박에 반응했다. 찹쌀도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나는 간식 먹을 거다 꽉!”
“나, 나도 먹을 거다! 나 빼놓고 먹으면 슬프다···. 컁! 근데, 뭐 먹을 거냐?”
자신을 빼놓고 먹으면 안 된다며 노을이 내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그래. 같이 먹자. 오늘 간식은 식은 죽은 아니고. 따뜻한 단호박 수프. 어때? 먹을 사람?”
식은 죽은 내가 좀 별로 안 좋아해서.
아플 때도 나는 죽 대신 밥을 고집하곤 했다.
흐물거리고 밍밍한 죽을 먹을 바엔 밥을 꼭꼭 씹은 뒤 죽을 만들어 넘기는 게 훨씬 더 나았으니.
하지만 수프라면 말이 달랐다.
아직도 나는 할머니가 아침 투정을 하는 나를 위해 만들어주셨던 크림 수프를 잊지 못한다.
중학생 시절.
성장통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나는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
‘할머니! 나갈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눈을 뜨자마자 눈곱만 떼고 학교로 가야 하는 날들이 많았고, 당연히 아침은 스킵이었다.
할머니는 그런 내게 뭐라도 먹이기 위해 양념한 밥을 김에 동그랗게 말아 입에 넣어주기도 했지만, 한두 개만 먹다 달려 나가야 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아이고 야야. 학교 가서 이거라도 먹어라. 알았제?’
그러던 어느 날, 뛰쳐나가는 날 붙잡은 할머니가 보온병과 따끈한 빵을 내 손에 쥐여 주셨다.
보온병에는 고소한 크림이 가득 들어간 걸쭉한 수프가 들어있었고, 갓 구운 듯 따끈한 빵은 밤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따뜻하고 걸쭉한 수프에 찍어 먹던 달콤한 빵은 아직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그러니, 이 맛을 요 대단한 녀석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비록 빵은 없지만, 수프를 만들 재료들은 충분했으니.
게다가 아직도 창고에는 먹어야 할 호박들이 많았다.
단호박 수프를 만들면 단호박 3개는 소비할 수 있으니,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창고도 비울 수 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
“나! 나! 나 먹을 거다! 따뜻한 단호박 수프가 뭔진 모르겠지만 식은 죽 보다 더 좋은 것 같다!”
“나도 먹겠다 꽉!”
다행히 노을과 찹쌀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오케이! 그럼 단호박 꺼내러 가볼까?”
“내가 꺼내오겠다! 한울은 주방에 가 있어라!”
“나도 돕겠다 꽉!”
창고에서 단호박을 꺼내려 하자, 재료는 자신들이 준비하겠다는 둘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지이잉.
핸드폰 진동이 울리더니 화면이 켜지며 발신자 이름이 떠올랐다.
[구름 떡집 강지민]
“얘들아 잠깐만.”
얘가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하는 거지?
강지민과는 평소 동창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에서 톡만 드문드문할 뿐.
개인적으로 통화한 적이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여보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로 속사포 같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여보세요? 어. 나야. 강지민. 다른 게 아니고. 한울아, 너 저번에 가져온 호박. 그거 집에 많다고 했지? 나한테 다 팔아. 내가 돈은 얼마든지 줄게!
“호박?”
-어! 호박! 야 너 그새 다 먹은 거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제발 아니라고 하라고! 어? 제발! 플리즈!!
갑자기 전화 와서는 다짜고짜 호박 타령이라니.
얘가 뭘 잘못 먹었나.
**
“진짜 왔냐?”
“그럼 진짜 오지 가짜로 간다고 했겠냐. 그나저나, 호박은 어디 있어?”
지민과 통화를 마친지 딱 30분이 지난 지금.
목놓아 호박을 찾던 지민은 아직 호박이 남아있다는 내 말에 포터를 끌고 등장했다.
“이 트럭은 뭐냐. 도대체 호박이 얼마나 필요해서 그래?”
작업복에 빨간 목장갑까지 낀 모양새가 본격적이었다.
“전부다.”
“어?”
“전부. 다.”
전부라니.
아니, 내가 호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이럴까.
“너 호박 거래 하는 데 있다며. 거기서 호박 쓰면 되는 거 아니야?”
“어. 아직도 거기랑은 거래하고 있어.”
“그럼 이유가 뭔데? 와서 설명해 준다며.”
심지어 전화상으로도 호박의 유무만 물어봤지, 내 호박을 그토록 찾는 이유는 알려주지도 않은 상태였다.
만나서 말을 해준다며.
이유를 묻는 내 말에 매의 눈으로 우리 집 마당을 살펴보던 지민은, 목장갑을 매만지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네가 준 호박, 뭐 탄 거 아니지?”
다시 말하지만 내 집은 산 바로 아래 있는, 사람들도 하루에 한두 명 다닐까 말까 하는 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없다는 소리.
게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한다는 소리가 내가 호박 주스를 마신 뒤 지민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그거 어디서 많이 들은 대사 같다?”
그때의 지민처럼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지민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들어봐.”
“어.”
“왜 우리 엄마가 부기가 심해서 내가 매일 호박 주스 갈아서 준다는 거 기억하지?”
“응.”
“그리고 내가 호박 주스 만들어서 팔려고 라벨까지 제작했다는 것도 기억하지?”
“어.”
기억을 못할 리가.
불과 며칠 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지민은 비로소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내쉬고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오케이. 네가 가고 나서, 내가 엄마 주려고 호박을 갈았단 말이야. 그리고 마셔보니까 너무 맛있는 거지···.”
동의한다.
나도 생각보다 맛있어서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가는 김에 호박떡 주문한 손님들한테 서비스로 한 팩씩 보내자 싶어서 다 갈았거든? 어차피 너한테 공짜로 받은 거기도 하니까.”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뿌린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민, 얘는 영업 쪽으로 난 애였다.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샘플에 대한 호응도가 컸다. 특히 식품 쪽은 그게 더 강했다.
신제품이 나올 때 식품업계 영업팀이 마트에 나가 판촉 행사를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지민의 생각은 상업적으로 훌륭했다. 호박 주스 샘플을 받은 고객들은, 높은 확률로 다음 주문에 호박 주스를 같이 주문할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잘했네. 호박 주스도 이제 잘 팔리겠네.”
“어. 잘 팔릴 거야. 아주 잘 팔릴 거야. 지금 문의 게시판에 언제 판매되느냐고 묻는 글들로 가득해.”
“축하한다.”
이제 잘 팔고 돈도 많이 벌 일만 남았을 텐데. 어쩐지 축하한다는 내 말에 지민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아니.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
“다른 호박으로 주스를 만들었더니, 그 맛이 안 나!”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공산품도 어떤 라인에서 생산되느냐에 따라 품질이 약간씩 다른 마당에.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농산물 제품이 모두 같은 맛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어차피 원물로만 파는 건 원물 상태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거지. 소비자들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줘.”
소비자들도 이 점들을 알고 있기에, 원물에 대한 퀄러티 변화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하지만 지민의 반응은 달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것도 그거지만, 다른 호박으로 간 호박 주스는 그 효과가 안 나와!”
“효과?”
“왜 너도 그때 물었었잖아. 여기 비타민이나 마그네슘 이런 거 탄 거 아니냐고.”
“그랬었지.”
분명 지민이 갈아준 호박 주스를 마시자마자 풀리는 피로에 그렇게 묻긴 했었다.
하지만, 기분 탓인 줄 알고 그냥 넘겼는데···.
“근데, 그 말을 우리 엄마가 똑같이 물어봤어.”
“어머니가?”
“어! 엄마가 맨날 내가 호박 주스 줘도 고맙다고 하고 끝이었거든. 근데 그날 네가 준 거로 간 호박 주스는 먹고나서 바로 그다음 날 이거 어디서 났냐고. 이걸로만 주라고 난리가 났어.”
“그..래?”
“어! 근데 우리 엄마뿐만이 아니라, 내가 샘플로 보냈던 고객님들 전부다!”
“전부다···?”
내 예상이 맞을 줄이야.
“응. 그렇다니까! 전부 다 붓기가 자고 일어나니까 다 빠지고 없다고 언제 판매되냐고 출시일 물어서 난리야.”
“다른 호박은?”
“내가 방금 말했잖아. 내가 진짜 문의 게시판 그렇게 터지는 건 또 처음 봐서. 바로 시작하려고 다른 호박으로 아무리 테스트해봐도, 그 맛이랑 효과가 안 나와.”
“...”
하지만 아무리 내 예상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근거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노을이 키운 작물이니 지민을 보낸 뒤 노을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때였다.
[당연하다! 이 위대하고 대단한 노을이 키운 호박은 다른 호박들이랑 다르다! 푸힛.]
지민의 반응을 듣던 노을이 내 어깨 위에서 자신이 키운 호박은 다르다며 꼬리를 한껏 흔들어댔다.
자신이 키운 호박을 지민이 애타게 찾자 신이 난 모양.
오. 그렇단 말이지?
노을에게 확언에, 내 일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머리를 싸매면서 고민을 한 결과! 원인은 니가 준 호박! 그것밖에 없음.”
“그래···?”
“어. 그러니까, 한울아. 진짜 그 생산자분 연락처 좀 알려주면 안 되겠니?”
노을이 키운 호박은 특별하다.
특별한 호박으로 만든 호박 주스의 맛은 아주 뛰어날뿐더러, 효능까지도 다른 호박들과 비교 불가.
특별한 호박에 대한 계산을 끝낸 내가 입을 열었다.
“음···. 근데 내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분이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분이 아니셔서.”
거래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적당히 포장하여 보여주는 것이 좋다.
전문 농사꾼이 아니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지민이 대번에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나, 강지민. 워라밸 지켜서 일한다. 약속해. 한정 판매할게. 어? 제발. 내가 가격도 잘 쳐 드릴게! 어? 도매가격 말고! 소매가격으로!”
노을은 전문 농업인보다 더 뛰어나지만, 어쨌든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정령은 아니니 말이다.
“소매가격이라···.”
하지만 노을이 원치 않는다면 거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어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노을은 이미 꼬리를 살랑이며 방방 뛰고 있었다.
[가격? 돈을 준다는 거냐? 좋다! 내 목표다! 컁!]
“어! 다른 광고 안 하고 입소문으로만 팔거라. 어느 정도는 괜찮아.”
“그래? 그 정도면 뭐. 알았어. 알려줄게.”
노을이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뭐, 어쩌겠나. 조금 귀찮아질 것 같지만, 하는 게 맞지.
정보를 알려준다는 내 말에 지민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야. 완전 고마워. 어딘데?”
“이름은 신비농장이고...”
“어. 신비농장.”
타닥타닥.
지민이 터치패드를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사장님 성함은 김한울.”
“사장님 성함, 김한울. 어······? 뭐라고?”
한창 집중을 하며 터치패드를 치던 지민의 고개가 벌떡 들렸다.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게 꽤나 놀란 모양.
그런데 어쩌냐. 지금부터 그렇게 놀라면 안 될 텐데.
“그럼 가격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고객님?”
이왕 거래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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