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원인이 뭔데?
옆집 심 할아버지가 주신 스테비아 방울토마토 모종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칙칙
바로 분무기 안에 있는 액체.
이걸 뿌리지 않으면 아무리 스테비아 방울토마토에서 씨앗을 받아 심는다고 해도, 일반 방울토마토가 될 뿐 혀를 얼얼할 정도로 단맛을 내뿜는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는 되지 못한다.
‘봐봐라.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라는 건 말이다, 이게 꼭 필요하다.’
꿍쳐놓은 쌈짓돈을 꺼내듯, 옆에 끼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비밀스럽게 꺼내 든 ‘스테플러스’.
스테비아를 베이스로 만든 액비였다.
‘알았제? 딱 4방울이면 된다.’
업계 비밀을 유출하는 것 마냥,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스테플러스’ 액비를 꺼내든 심 할아버지가 전수해준 스테비아 방울토마토 재배방법.
“그게 뭐냐 꽉?”
“이걸 이렇게 뿌리면 달달한 토마토를 얻을 수 있대.”
나는 지금 전수받은 방법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물론 이렇게 뿌린다고 해서,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토망고’, ‘샤인마토’등 정말로 혀가 얼얼할 만큼 단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들은 재배하지 못한다.
뿌리는 것만으로는 저만큼의 당도를 올리지 못하기 때문.
시중에 유통되는 스테비아 토마토들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그건 바로 챔버라는 특별한 기계를 사용해 가공하는 것.
완숙한 토마토를 수확해 세척 후, 기계에 넣어 압력을 이용해 스테비아를 직접 토마토에 주입하는 만큼, 그 당도는 상상 이상이다.
그렇지만 완숙한 토마토를 사용하고, 가공하는 만큼 유통기한이 짧고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맛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말이 있듯이, 스테비아 토마토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지금 내가 하는 방법은 기계가 없더라도 집에서 간단하게 당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챔버에 돌려 가공하는 것보다는 단맛이 덜하고 품도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래도 비스무리하게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를 만들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꾸왁? 내가 하겠다!”
기계적으로 분무질을 하고 있자,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찹쌀이 말했다.
“응?”
“그렇게 해서는 저녁은 언제 먹냐? 나는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꽉!”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되는 분무질에 손아귀가 뻐근해지던 참이었다.
근데, 찹쌀이 얘 물만 뿌릴 수 있는 애 아니었나?
“한 번에? 어떻게 하려고?”
액비가 들어있는 분무기를 찰랑거리자, 찹쌀이가 고개를 쭉 빼며 말했다.
“맛을 볼 수 있게 해줘라. 꽉!”
“...?”
호르르
챱챱챱.
찹쌀이 원하는 데로 희석액을 뚜껑에 부어 줬더니, 물을 마시듯 입으로 넣고 고개를 높이 들어 챱챱거리며 그 맛을 음미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꽉! 노을아 노래 좀 해줘라!”
와인 소믈리에처럼 희석액을 입에서 호로록 굴리던 찹쌀이 노란 부리로 희석액을 밭에 퉤! 뱉으며 말했다.
“호엥? 알았다! 컁!”
뾱뾱거리며 비닐에 모종이 심길 구멍을 파던 노을이 하늘 높이 들었던 앞발을 회수했다.
이내 총총걸음으로 방울토마토 모종 앞에 선 노을은, 뱅글뱅글 돌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노을의 노래와 동시에 쑥쑥 자라는 방울토마토들.
“어? 잠깐만 얘들아!”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는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분무질을 해줘야 했다.
이렇게 급격하게 성장시켜서는 액비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말하는 틈에 벌써 내 키를 넘어선 방울토마토를 보며 둘을 급하게 말렸지만.
노을과 찹쌀의 행동은 내 외침보다 더 빨랐다.
“꽈아아아악!”
알알이 맺히기 시작한 방울토마토에 찹쌀의 물대포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
탱글.
노을의 노래와 찹쌀의 물대포를 맞아 순식간에 자라난 방울토마토가 매끈함을 뽐내며 초록색 가지에 주렁주렁 열렸다.
빨리 감기를 한 듯 눈 깜짝할 새에 자라버리는 농작물의 모습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근데 이거, 방울토마토 맞지?
호박을 수확할 때도 느꼈던 거지만, 작물들의 사이즈가 묘하게, 아니 대놓고 컸다.
“엄청···. 크네?”
“한울이가 키우는 토마토가 그냥 토마토라면, 나랑 노을이 키우는 토마토는 TOP다! 꽉!”
작은 살구 크기만 한 방울토마토를 보고 있자니 찹쌀이 퐁실한 가슴 털을 내밀며 말했다.
“어···. 그래.”
저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TV를 끼고 살더니.
광고란 광고는 다 외웠나 보다.
대표적인 영상매체에 중독된 찹쌀의 모습에 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과연 자라나는 이 새싹들에게 TV를 계속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왠지 어릴 적 TV 만화에 푹 빠져있던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마 디비 자라’라고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났다.
‘할머니, 미안. 힘들었겠네.’
이제서야 그때 할머니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라도 찹쌀이 TV 시청을 할 때 옆에서 같이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먹어봐라! 이게 한울이 원하던 게 맞는 거냐?”
노을이 유독 탐스러운 방울토마토가 열린 가지를 꺾어 입에 물고는, 총총 걸어와 내 손에 떨어뜨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뭐, 찹쌀은 노을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고민을 해결해준 노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가지에 있는 방울토마토 하나를 따 입에 넣었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하나만 넣었을 뿐인데, 입안이 가득 찼다.
톡.
탱글탱글한 토마토를 이 사이에 넣고 깨물자, 톡 하는 기분 좋은 터짐과 함께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음···. 어?”
순식간에 퍼지는 아찔한 단맛에 탄성을 내뱉자, 오매불망 내 입만 바라보던 노을이 화들짝 놀래며 고개를 휙 돌려 찹쌀을 소환했다.
“왜 그러냐? 맛이 없는 거냐? 찹쌀아!”
“뭐가 이상한 거냐? 꽉? 그럴 리가 없다! 먹어보자 꽉!”
오묘한 내 표정에 자신들도 먹어보겠다고 내 앞으로 오는 노을과 찹쌀에게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떼어주었다.
두 손에 꼭 쥐고 한입을 베어 물던 노을의 눈이 댕그래졌다.
“나도 먹어보겠다! 컁! 어···? 이 맛은···.”
꿀꺽.
입에 있던 방울토마토를 넘긴 노을이 흥분한 듯 꼬리를 힘차게 살랑거리며 말했다.
“방울토마토가 달다! 엄청나게 달다! 눈물 나게 달다! 그런데 맛있다 컁!”
노을의 말이 맞았다.
노을과 찹쌀이 키운 방울토마토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달면서도, 상큼했다.
“어. 너무 맛있어서 그랬어. 찹쌀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저 물만 뿌릴 수 있는 정령인 줄 알았는데···.
설마, 한번 맛본 액체는 복제할 수 있다.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한울이 준 물맛을 보았다! 이상한 게 있어 없애고 뿌렸다! 꽉!”
“...?”
세상에.
설마 한 것뿐인데. 사실일 줄이야.
트랙터와 맞먹는 노을에 이제부터 모든 액비란 액비는 다 섭렵할 찹쌀까지.
“정말 노을이랑 찹쌀이 둘 다 너무 대단한데?”
“맞다! 나는 대단한 노을이다!”
“나도 이제 대단한 찹쌀이다 꽉!”
내 칭찬 한마디에 우쭐거리는 정령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나라는 아니더라도, 작은 화전마을 정도는 구했나 보다.
**
오늘도 마을의 대소사를 챙기고 저녁 늦게 들어온 장 이장은, 아내가 앉아있는 소파에 슬쩍 궁둥이를 붙였다.
“토마토네?”
“예. 영감. 방울토마토랍니다. 한번 자셔보소. 참 맛있데이.”
TV를 보면서 간식 삼아 먹고 있던 참이었는지, 아내의 앞에는 잘 익은 토마토가 있었다.
“요새 방울토마토는 이치로 크나···. 왐마! 임자, 이거 억수로 단데 먹어도 괘안나?”
방울토마토라는 소리에 제법 큰 방울토마토를 한입에 넣은 장 이장은 화들짝 놀랬다.
씹자마자 퍽 하고 터지는 과즙의 달콤함은 피곤함을 싹 날려버릴 정도.
하지만, 당뇨를 앓고 있는 아내에게는 당은 치명적이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내를 보자, 문제없다며 장 이장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혹시나 해서 아까 하나 먹고 좀 있었는데, 괜찮더라.”
“그럼 이건 어디서 났는데?”
먹고 나서 어지럽지도 않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말에 한시름 놓은 장 이장은 본론 적인 질문을 했다.
“이거 한울이가 주고 갔다 아닙니까. 스테이크 방울토마토라든가 뭐라 카든데.”
“아. 스테비아 방울토마토인가 보네. 그라믄 괘안타. 많이 무도 된다. 아이고 한울이 금마가 임자 당뇨 걸렸다고 했더니만, 그 좋아하던 과일 못 먹어서 걱정하더니 이리 바로 가지고 왔나 보네.”
심가에게 듣기로는 스테비아 토마토에 들어가는 스테비아는 체내로 흡수가 되지 않고 밖으로 배출되어, 당뇨 환자들이 먹어도 되는 과일이라고 했다.
안심한 장 이장이 몸을 이완시키는 걸 보며 미소지은 아내는, 그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갸가 어릴 때부터 착하다 아이가. 내가 뭘 주면 꼭 다음날 그 작은 손으로 뭘 갖다 줬다.”
“그니까 말이여. 그 얼라가 저렇게 컸으니···. 얼른 우리 임자 같은 예쁜 짝지를 만나야 할 텐데.”
“아이고. 요즘 세상에 결혼 안 해도 된다. 괘안타. 괜히 아한테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알겠죠?”
아내의 말은 곧 하늘.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인 장 이장은 자연스럽게 아내의 발을 들어 제 허벅지에 놓았다.
아내의 발을 주물러 주기 위해서였다.
“네. 알겠습니다. 어디 보자, 우리 임자 발이 오늘은 얼마나 부었나···. 으잉?”
당뇨를 앓기 시작한 후,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아내의 다리는 이 시간쯤 되면 띵띵 부어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자신이 매일 주물러 주며 풀어줬는데···.
“와 그리 놀래는교.”
아무리 눈을 다시 비비고 끔뻑여 봐도 아내의 다리는 날씬했다.
“아니, 임자 다리가 오늘은 안 부어서. 오늘 운동 좀 많이 했나?”
“진짜 그렇네. 오늘? 평소랑 똑같이 운동했는데.”
장 이장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다리를 확인한 아내도 놀랍다는 듯 연신 자신의 다리를 살폈다.
“임자 이번에 약 바꿨나...?”
장 이장은 호전된 아내의 상태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 질문하기 했지만, 실패했다.
아내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이므로.
“똑같던데. 뭐, 오늘 컨디션이 좀 좋은가 보지. 드라마나 보입시다! 오늘 드디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아이가!”
그건 바로 막장드라마 시청.
욕하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드라마!
아내의 말에 장 이장도 자세를 바로 했다.
“어잉? 진짜가? 그라믄 봐야지. 그 호로잡놈이 나쁜 놈인 거 밝혀지고! 어이? 그 또 뭐꼬? 회장 목숨 구해준 사람이 친아들이란 것도 알아야 되고···.”
“맞다. 맞다. 오늘 다 밝혀져야 된다.”
“오. 이제 시작하네! ”
다른 건 몰라도 막장드라마의 복수극은 꼭 챙겨봐야 했다.
*
드라마가 끝난 후.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참았던 숨을 내쉬며 꽃분이가 말했다.
“아이고 시원하다! 드라마는 이래야제! 안 그럽니까?”
“...크허헝”
하지만 장 이장은 이미 꿈나라로 갔는지, 우렁찬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꼬 자는교."
막장 드라마의 꽃은 드라마가 끝난 뒤의 후기를 나누는 것이건만!
그새를 못 참고 자버린 남편에 꽃분이 곱게 눈을 흘겼다.
서늘한 느낌에 선잠에서 깬 장 이장이 눈을 끔뻑이며 일어났다.
"음···? 쓰읍. 아녀. 안 잤어. 잠깐 눈만 감았다. 눈만. 명상했다."
"코까지 골고 잘 주무시더구먼. 명상은."
"내 눈만 감고 있었지 다 듣고 있었다! 근데 안 졸리나? 웬일로 지금까지 깨있노. 원래 내보다 더 빨리 자야 하는 거 아이가?"
여기서 잘못 반응했다가는 삐친다.!
아내가 던지는 지뢰를 요리조리 피하던 장 이장은, 문뜩 자신보다 쌩쌩한 아내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오늘 이상하게 몸이 개운하네. 생각해보니까 눈도 잘 보이는 것 같고."
오늘따라 몸도 개운하고, 눈도 잘 보이고···.
거기다 다리도 붓지 않았다라.
“임자, 큰애가 새로운 한약이라고 뭐 지어왔드나? 오늘 평소랑 뭐가 다르나?”
“아니. 다 똑같은데···? 아! 한울이가 준 방울토마토랑 호박 주스 그거 먹어서 글나보다.”
“방울토마토랑 호박 주스 먹고?”
“와 토마토랑 호박이 혈액순환에 좋다고 한다 아입니까. 그래서 그런가 보제.”
“뭐라꼬? 혈액순환에 좋다고? 임자 어지럽지는 않나? 그 단 거 먹었는데?”
“아니? 안 어지러운데?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정신이 말똥말똥하다고? 그람 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내의 건강을 나아지게 만든 원인을 파악한 장 이장은 서둘러 소파에 던져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탁.
핸드폰 플립을 연 장 이장은, 침침한 눈에 힘을 빡 주었다.
그리고 한자한자, 다이얼을 정성스럽게 누르며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울아,,내다,이장,,니가준,방울토마토랑,호박주스,,어데서샀는지,알수있나,,,]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피곤까지 몰아낸 사나이 장순택의 문자는,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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